모두 잠든 밤의 여관.
  혼자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제로스는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람? 사실은 아니다. 조악한 공기의 흐름에 마족인 그가 몸을 떨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의 본체는 정신세계인 아스트랄 사이드에 있으므로 인간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곳에 구현해놓은 작은 말단부가 밤 공기의 흐름 따위에 영향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천 하고도 몇 년쯤 전 황금의 용족을 멸절 직전으로 몰아간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옷자락 하나 날리지 않은 채 미소를 흘리고 있던 적이 있었더랬다. 직속은 아니지만 그의 상관 중 하나인 패왕 그라우세라는 중무장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싸우면서도 갑옷이 찰랑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를 떨리게 하는 이 바람은... 그는 생긋 웃었다.

  "'그 분'의 소리인가."

  갈가리 찢기고 얼음 속에 봉인되었지만 위대한 그의 주인은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비록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지 모르지만...정신 세계에서는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때때로 지금처럼 아스트랄 사이드 전체를 뒤흔들 만큼의 긴 호흡이 그 분을 속박하고 있는 사슬 틈새로 새어나오는 일도 있었다. 그 분의 호흡을 따라 아스트랄 사이드에 본체를 두고 있는 모든 마족이 숨을 죽였다.
  명령은 명백하다.
  나를 구하라, 그리고 세상을 멸하라.
  그러나 제로스는 지금쯤 여관 안에서 쿨쿨 자고 있을 붉은 머리의 마도사 아가씨와 저녁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상한가요? 무엇이?"

  마족은 멸망을 원한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어째서, 마족은 자살하는 일이 없지?'

  인간이나 심지어 신족에게조차도 가능한 자살이 마족에게는 불가능하다. 위대한 그의 주인 루비아이 샤브라니구드마저도 세계의 멸망보다 가두어진 자기 존재의 구원을 먼저 명하고 있다. 마족은 명령받지 않은 이상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걷지 않는다. 모든 존재와의 완전한 공멸(共滅) 이외에 마족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의 방식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말이 안 되지 않아? 멸망을 원하고 있는 주제에 죽기는 싫다니. 죽고 싶으면 혼자 죽으라고.'
  "잔인한 아가씨로군요."

  제로스는 히죽거렸다. 물론 인간 마도사 한 명이 '죽고 싶으면 혼자 나가 죽어'라고 선언한다 해서 마족이 순순히 그 말에 따라 줄 리는 없다. 마족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한낱 '먹이'일 뿐. 앙탈이 귀여울 수는 있을지언정 위협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치고는 그 손에 참살당한 마족의 숫자가 놀랄 정도로 많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한 마디가 마족 전체에 대한 협박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제로스는 나무 위에서 마치 자세를 바로잡는 것처럼 몸을 뒤척거렸다.
  마음이 불편했다. 얘기를 마치면서 그녀가 보인 눈빛은 어떤 의미였을까? 절망도 아니고 우울도 아니면서, 동시에 기쁨도 아닌 감정... 그녀는 그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로스는 지금도 그때 보였던 그녀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뭐, 너도 여러 가지로 어렵겠지. 힘 내.'
  "무슨 힘을 내라는 건지... 원."

  제로스는 허탈한 나머지 피식 웃어버렸다. 멸망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강한 존재에 대한 집착...애초부터 마족은 혼자 죽을 수 있게끔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자란 팔다리를 퍼덕거리며 살아가는 인간일 뿐인 존재에게 그런 눈빛을 받을 만한 일이던가?
  나는 그 인간 마도사에게 동정을 받은 건가? 중급 마족, 수왕부 직속 신관인 이 제로스가?

  "어이없는 인간이로군요. 당신은."

  그때 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세계의 침몰을 위해 구원을 외치는 끈적끈적한 목소리. 위대한 왕의 선언. 제로스는 모락모락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어두운 유혹에 몸을 맡긴 채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주인이시여... 오세요. 어서... 당신의 백성은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나이다...."

  멸망을 위해 자신을 보호하도록 만들어진 존재.
  그 모순을 느끼지 못하도록 창조된 순마족 제로스는 그저 멸망의 달콤한 내음에 눈을 감았다.

2009/02/10 15:38 2009/02/10 1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