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리(節理)

from Fanfic/Gundam 2015/01/01 13:53

  무중력의 덱에는 무엇이든 띄워 둘 수 있다. 정형화된 물체이기만 하다면 덱 안에서 무엇이 떠돌든 여분의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놓은 자리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둥둥 떠 있기 때문에 편할 때도 많다. 물론 안전 규정에 의하면 조금이라도 단단하거나 뾰족한 부위가 있는 물체를 고정하지 않은 채 작업하는 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이지만, 시간이 부족할 때 주변에 장비들을 가득 띄워두고 대량의 작업을 해 본 사람이라면 원칙 운운하는 잔소리를 끄집어내느니 대강 알아서 피해 갈 것이다. 누가 뭐라던 그 편이 무지막지하게 편하니까.
  그리하여 소년은 주변에 극세사 수건부터 세라믹 솔, 심지어는 무게가 제법 나가는 원적외선 청소기까지 잔뜩 주위에 띄워 둔 채 자신의 MS를 박박 문질러 닦고 있는 중이었다. 관성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되므로 행여나 당장 함선이 움직이거나 하게 된다면 소년의 머리에는 커다란 혹이 생기게 되겠지만, 비록 텅 빈 우주에서나마 이 배는 잠시 엔진을 끈 채 정박하고 있는 중이었고 주변에는 엄폐물도 제법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경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작동하겠지 하고 소년은 다소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청소 작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여타의 일은 그다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칠이 잘 된 금속을 매끈하게 닦는다는 것은 꽤나 까다로운 일이라서, 집중력 분야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소년으로서도 제법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열심히 열심히 닦고 나서도 뒤돌아서면 금세 원인 모를 자국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잘 닦아 두었던 손가락 관절에 얼룩이 남은 것을 보았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이게 몇 번째인지도 기억이 안 날 지경이었다. 이놈의 마그넷 코팅은 정말이지! 속이 상한 나머지 소년은 옆에서 일렁이던 수건을 잡아채 짐짓 거칠게 MS의 오른손 검지를 후려쳤다.

  “잘 안 닦여?”
  “네. 정말 빌어먹게 속 터지네요.”
  “잠깐 비켜 봐. 내가 한 번 봐 줄게.”

  좀 전부터 소년 쪽을 지켜보던 메카닉 요원 한 명이 저쪽에서 다가오며 건넨 말에는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전투시간이 긴 모빌 슈츠를 깔끔하게 닦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 만큼 아는 사람인지라 뭔가 타박을 놓는 대신, 소년을 대신해 교차 목측 점검을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작업자들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와도 같았다. 놓친 얼룩을 찾아내는 데에는 끊임없는 반복 작업에 지친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눈으로 보고 점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고맙습니다.”
  “아냐. 그나저나 고생이네.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잘 안 되니까 신경질이 나요.”
  “피곤할 걸. 내가 본 것만 해도 벌써 열 시간 넘었을 건데.”
  “그랬나요?”
  “그러니까 지치지. 얼마 동안 하는지도 체크 안 하고 작업을 쭉 했단 말이야?”
  “타이머 체크를 깜박 했습니다.”
  “이 자식 큰일 내겠구먼.”

  머쓱하니 대답하는 소년을 향해 혀를 끌끌 찬 뒤 메카닉 요원은 잠자코 다시 점검을 재개했다.
  아무리 자유로운 근무시간을 보장하는 조직이라도 모두들 인간인지라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작업 시간은 규율 위반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이들이 속한 조직 에우고는 현재 전 구성원에게 매일매일 전투 역무를 부여함으로서 극한의 스트레스를 받도록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루를 24시간 단위로 끊어 열 두 시간 이상의 작업은 원칙적으로 말하면 체포되어 영창에 들어가도 할 말 없는 중범죄였다. 게다가 소년처럼 메카닉 요원 이전에 모빌 슈츠 파일럿으로서 하시라도 전투에 투입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킬 의무가 있는 경우라면 더욱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어디 세상 일이 원칙대로 되던가. 소년은 워낙에 사방에서 온갖 말을 해줘봐야 귓등으로도 들어 처먹지 않는 성정으로 이름 높았다. 심지어 지구에서는 남들 눈치도 안 본 채 72시간 동안 70시간을 근무한 적이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을 지경이었다. 설마 진짜로 그랬을 리는 없겠지만, 지금도 계기 좀 만질 줄 안다고 제멋대로 작업 타이머를 껐다 켰다 하고 있는 마당이니 그때라고 오죽했으랴. 요원이 MS의 전체 상태를 휘 둘러보고 있을 때 두 사람을 향해 메카닉 팀장의 날카로운 일갈이 날아왔다.

  “야. 안 그래도 정신없는 판에 정비 다 끝난 놈에 둘이나 들러붙어 뭐 하고 있어!”
  “미세부품 세정 목측 테스트 중입니다, 팀장님.”
  “그거야 나도 두 눈 멀쩡하니 알겠는데, 테스트가 뭐 필요하다고 그래? 번쩍거리게 잘도 문질러 놨구만.”
  “손가락 끝에 들러붙은 게 영 지워지질 않아서요. 완전 까진 거면 코팅 다시 해야 하잖습니까.”
  “시국이 어느 땐데 겨우 손가락 갖고 코팅 타령이야. 결벽증 생겼냐? 거기 넌 가서 메타스 부품유격 보던 거나 마저 끝내.”
  “앗, 네.”
  “그럼 여긴 제가 그냥 다시 닦아요?”
  “가만있어, 그냥 내가 볼 테니까.”

  계속된 정비로 지칠 대로 지친 팀장은 가차 없이 옆에 붙어있던 요원을 쫒아내 버렸다. 정비작업은 전투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역무인데다 인간적인 연속 업무시간 규정이라는 물건은 상사가 될수록 더 느슨하게 적용되게 마련. 모르긴 몰라도 그의 실질적인 연속 작업시간은 이미 이삼십 시간을 넘긴 지 오래일 것이다. 소년의 은근한 항의에 직접 테스트를 해 주는 것은 아마도 아직까지는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기 때문일 테지만, 아마도 서너 시간 후면 소소한 배려마저 사라지고 당장 어딘가 틀어박혀 쪽잠이라도 청하지 않으면 폭발하게 될 것이 뻔했다. 그때까지는 해주겠다는 걸 거절하지 않도록 하자.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오일 뭍은 손으로 검사 장비에 손도장을 찍는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파일럿이 들어가서 쉬지도 않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좀 잘까 했는데 역시 오염이 마음에 걸려서요.”
  “바빠 죽겠는데 겨우 껍질 까진 걸로 시비냐. 속 좁은 놈아.”

  그 껍질 까진 데 고압전기 공격이라도 받으면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바로 죽는다고!
  이따위 인정사정없는 말버릇을 갖고도 그가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은 오롯이 실력 때문이었다. 그 실력을 깊게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면 팀장이고 뭐고 정권 한 방 날리고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불행히도 그의 지적은 맞는 말인지라 소년은 입 밖으로 내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그들의 함이 속한 조직 에우고는 지금 지구 연방 산하의 특수조직 티탄즈와 한창 격한 전투를 치르는 중이라 일개 모빌 슈츠의 사소한 문제에까지 정비 인력을 돌려줄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팀장이 소년이 조종하고 있는 MS가 에우고 최고의 MS이고, 그 파일럿인 소년이 올린 전과가 꽤나 혁혁하기 때문에 팀장이 몇 마디 투덜거리는 정도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했다.

  “제가 그래도 많이 도와드리고 있잖습니까.”
  “제타는 어찌되었건 기본적으로 네 설계니까. 그동안 네가 한 게 있으니 봐 주기는 한다마는 다음부턴 어림없어.”
  “매번 잘 봐주시면서 또 그러시네요.”
  “내가 너무 사람이 좋아 그렇지.”
  “...지금, 농담하신 거죠? 저 웃을까요?”
  “표층이미지 진동수 카운트할 거니까 그 잘난 입이나 닥쳐.”
  “넵.”

  작업을 위한 삼사 분 간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소년은 멍하니 정비 구역 내부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체 오른쪽엔 화력은 낮지만 기동성만큼은 탁월한 MS 메타스가 마무리 정비를 받고 있었고, 그 건너편에서는 황금색의 백식이 내장을 드러낸 채 부품을 교환하고 있는 중이었다. 맞은편으로 분리되었던 하반신을 다시 맞추고 있는 녹색의 네모도 보였다. 단순정비를 받고 있는 기체는 없어 하나같이 핵심장비의 심층교체가 이루어지는 중이라는 사실이 이전의 전투가 얼마나 지독했는가를 잘 알 수 있게 했다.
  스페이스노이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여러 대기업들의 출자를 받아 군 출신들을 대거 영입했다고는 해도, 태생이 민간인 조직인 에우고의 전력으로는 연방의 특수 부대로서 한때나마 연방 전체 예산의 5%를 끌어다 썼던 군 조직 티탄즈에 전쟁으로 맞설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게릴라처럼 소규모 국지전을 펼치면서 뒷거래를 통해 연방이 지원하는 티탄즈의 예산을 반으로 깎아 보겠다는 것이 작년 초에 수립했던 조직의 목표라면 이해가 될까.
  하지만 전년도 4/4분기의 여러 사건으로 사정은 180도 달라졌다. 에우고의 어설픈 도발에 끌려온 티탄즈가 먹잇감을 찾는 언론을 상대로 무리수와 악수를 겹장으로 놓는 동안 에우고는 연방 자금의 일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지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같은 스페이스노이드 출신이면서 자력으로 소행성대에 국가를 건설할 정도의 재력을 갖춘 네오지온 세력이 잠시나마 그들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급성장한 에우고와 급축소된 티탄즈는 전쟁이 벌어진 지 반 년 만에 거의 조직과 자금의 규모가 엇비슷해졌다. 조직 구성 이래 처음으로 아낌없이 돈을 쓸 수 있게 된 그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종종 화상통화로 연락하는 자금책인 그라나다의 웬 리라던가 뉴홍콩의 스테파니 루오가 때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전화를 끊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조직 수뇌부는 올해의 목표로 티탄즈의 완전한 해산을 규정했다. 심지어 목표 달성 예정이 앞으로 겨우 넉 달쯤 될까 말까한 6월 초였다. 처음엔 환영하던 아가마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왔다.

  “돈이면 다 된다더니 허풍도 작작 하지?”
  “아 진짜. 파일럿이나 병기는 충원도 없이 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승기를 잡은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문제는 자금의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순식간에 기체나 파일럿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었다. 물론 금방 찍어낼 수 있는 사라미스급이나 네모 같은 대량생산 부대가 늘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최신예 정예부대로서 언제나 작전과 전투의 선두에 서 있는 그들의 함 아가마로서는 대규모 전투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이 딱 죽을 맛이었다. 정비나 조정의 부하가 말도 못하게 걸렸다. 소년 자신의 기체만 해도 실전투시간이 채 이천 시간이 못 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이차장갑 수준의 교체를 31퍼센트나 해야 하지 않았던가. 특히 상체와 양 팔의 일차장갑 일부는 떼어내는 과정에서 이미 부스러져 모양을 알아볼 수도 없었더랬다.
  왜냐하면 그 폭발을 동체로 직접 받아내야 했으니까.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고밀도 마그넷 코팅이라도 바로 눈앞에서 박살나는 MS의 파편을 튕겨낼 재주는 없었다. 위기상황이라면 보통 사람보다 열 배는 빠른 대응속도를 자랑해서 미래를 내다보기라고 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도 듣고 있는 소년의 조종 실력으로도 자기 손으로 쏘아버린 MS의 후폭풍을 피할 수는 없었다. 라이플을 겨눌 때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고 발사의 순간 섬광 사이로 그 아이의 눈물을 보았다. 잘하면 조금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회피해볼 수도 있었을까? 하지만 조종간을 쥔 소년의 손은 그 순간 꼼짝달싹 하지 못했다.

  -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1초 후에 어디에 있을지를 안다는 것과 1초 후에 있을 장소로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그 아이는 소년의 모함과 동반함을 파괴할 목적을 갖고 달려왔다. 천지사방으로 빔을 날려대는 난장에 비하면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경로여서 그 무모한 돌진을 막기 위해 어디를 어떻게 노려야 하는지 찾아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세 발짝만 앞서 가 방아쇠를 당기면 되었다. 심지어 지금이라도 경로를 3차원으로 다시 그려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그 위치로 기체를 옮기고 라이플을 발사하는 타이밍이 머릿속 생각보다 다섯 발짝은 늦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온 몸이 두뇌의 명령을 거부했다.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정말-이번에는-제발-더 이상은-그만 두고-멈춰’라며 비명을 질렀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데도 매번 익숙해지지 않는 한 자락 감상을 떨치는 데는 절대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손상이었다.

  “얌마.”
  “네?”
  “어디에 국소 오염이 있다는 거야? 깨끗하기만 한데. 문제없잖아.”
  “그럴 리가요. 방금 전에도 봤는데요.”
  “눈 삐었어? 제대로 봐라. 자.”

  눈을 돌려 보니 과연 장갑 부위는 속된 말로 삐까번쩍하다 싶게 잘 닦여 있었다.

  “어라? 그럴 리가 없는데요.”

  소년은 눈을 비볐다. 방금까지도 보였던 얼룩이 어디로 간 거지. 분명 손가락 끝에 시커먼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시력이 어떻게 된 게 아니라면 분명 왼손 둘째손가락과 셋째손가락에….
  아니 오른손이었나?
  방금 전까지 소년이 낑낑거리며 닦고 있던 손가락은 왼쪽이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비웃음을 날리고 있는 얼룩을 확인했었다. 그러니 남은 얼룩은 분명 오른손에 있어야 맞았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다가왔던 메카닉 요원과 같이 투덜거리며 확인했던 손가락은 왼쪽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런 얼룩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분명 보였다. 마치 사람을 놀리듯 시야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양 손 구석에 덕지덕지 붙은 거뭇한 자국이.

  “자국이 남아 있는 게 보인단 말입니다.”
  “무슨 헛소리야? 이 바보 자식이.”
  “…손가락에 핏자국이…지금도 보인다구요. 아스토나지 씨.”
  “야, 카미유.”

  보이는데. 아니 사라지지 않는데. 지금도 언뜻언뜻 나타나는 자국이. 뚜렷하게. 때때로. 없다가도 있는 듯. 이쪽이든 저쪽이든.
  아스토나지는 무언가 푸지게 욕이라도 뱉을 듯 카미유를 향해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더니 입맛만 두어 번인가를 쩝쩝 다셨다. 그 반응에 소년은 되레 하릴없이 서글퍼졌다.

  “들어가 쉬어, 꼬맹아.”
  “하지만….”
  “잠이 부족하니 헛것이 보이는 게야. 방으로 돌아가. 뭐하면 수면제라도 두어 알 챙겨 주랴?”
  “….”

  소년은 답 없이 고개만 저은 다음 덱을 나가 방으로 향했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방에 돌아와서도 잠은 이룰 수 없었다. 눈을 떠도 감아도 며칠 전의 장면이 떠오르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로자미는 그의 동생이 아니었다. 차라리 어딘가 아버지가 싸지르고 내버려 둔 진짜 누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사실 그녀는 티탄즈에서 일부러 기억을 주입해 다른 인격으로 구성해 낸 강화인간이었다. 결국 티탄즈가 정한 때가 왔을 때 로자미는 적으로 돌아서 거대한 MS를 타고 그와 그가 카고 있는 배의 전원을 죽이기 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아무리 말려 보려 애써도 듣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없는 애정과 욕구, 희망과 기대는 오롯이 소년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애쓰지 않아서 죽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살면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열심히 살아도 포우는 죽었다. 이상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 생각했다. 더 좋은 세계를 위하면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은 세상을 위해 미친 듯 달렸는데도 로자미의 목숨줄은 끊어야 했다.

  - 신경 쓰고 있지 않습니다. 신경 쓰고 있으면, 뉴타입 같은 걸 하고 있을 수가 없지요. 처음도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로자미를 죽이고 돌아온 자신을 위로하는 모두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실은 카미유의 마음은 텅 빈 채 조각조각 부서지는 중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이라는 녀석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죽어버린 이의 핏자국이 가득했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떠난 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방팔방 모든 곳에 그들의 흔적이 남은 채였다. 어째서? 내 마음은 이미 얼마간 남아 있지도 않을 텐데. 왜 끊임없이 고통을 느끼고 있지? 카미유는 결국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어두운 방 가운데에 앉았다.
  삶을 제대로 살다보면 더 어려운 일이 다가오게 마련이라고들 했다. 그 일까지 넘어서야 고단한 삶의 결과물을 볼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죽지 않기 위해 시작한 전쟁은 결국 살인으로 귀결되었다. 이미 어머니와 연인과 누이의 피가 흐르는 손이 견뎌내야 할 더 힘든 살해란 도대체 무엇일까. 친구? 동료? 혹은 나 자신?

  “하.”

  메마른 웃음만이 입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런 거라면,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에 스스로 멱을 따 버릴 것을.
  그 어떤 노력을 통해서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노력이란 오만한 자의 만용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었다. 노력하면 밝은 미래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은 그저 혈기 넘치는 나이였던 탓이었다. 진심이 전해질 것을 의심치 않은 건 어린 아이의 치기였다. 한 사람 몫을 단단히 하게 되면 원하는 것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을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뉴타입이든 강화인간이든 한 사람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질 수가 없었다.
  내가 무언가를 하였던 하지 않았던 결국 차이는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을.
  허탄한 욕구와 그에 동반되었던 많은 마음들. 스스로의 기억에서, 시간에서, 삶에서 카미유는 아무런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아등바등 살지 말 것을.
  애초에 태어나지 말 것을.

  “사랑해 줄 것도 아니었으면서, 왜 나를 낳은 거야…엄마.”

  그러나 어머니는 여기에 없다.
  어딘가 슬픔 없고 아픔 없는 곳에 있기를 바라므로 여기에 그녀는 있어서는 안 되었다. 차라리 여기에 없어야 했다. 꿇어앉아 통곡하고 있는 자신의 유전자를 보면서 슬퍼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
  그녀는 하늘에. 분명 여기가 아닌 다른 하늘에.
  그리하여 멈출 방법 없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은 조금 비릿할 뿐 조금도 뜨겁지 않았다.
  그리고 로자미의 혼이 담긴 싸이코 건담 Mk-2의 파편은 여전히 아가마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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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타 건담 TV판 기준.

2015/01/01 13:53 2015/01/0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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