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여벌 열쇠와 행복 밥'의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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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란 무엇인가.
  히로는 눈앞의 테이블에 놓인 통장 두 개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통장 하나는 표지가 낡은 것이 제법 오래된 것 같았고, 다른 하나는 빳빳한 새것이었다. 도대체 왜 이게 눈앞에 놓이게 된 것일까.

  “이게 뭐죠?”
  “네 거다. 늦어서 미안하다.”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조금 전과 같은 말을 한 번 더 한 뒤 고개를 숙였다. 히로는 놀라움보다 먼저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흰머리가 적잖이 섞여 있는 아버지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아버지가 검은 머리가 아니게 되었더라. 아니 예전에 검은 머리이긴 했던가? 아마도 그랬던 것 같긴 한데, 예전을 떠올려보려 해도 아버지의 머리 색이 어땠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아니, 고개를 들어주세요. 먼저 설명을 좀.”
  “그렇구나.”

  아버지는 고개를 천천히 든 뒤 먼저 새 통장을 조금 더 히로 쪽으로 밀었다.

  “이건 얼마 전에 팔았던 예전 집터의 매매대금이다.”
  “그래요…?”

  집을 나온 후 예전 집을 팔기로 했다는 연락을 새어머니에게서 받았을 때, 히로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은 곳이었다면 뭔가 말을 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분명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살던 소중한 장소였지만,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지내야만 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따뜻한 추억이 있는 곳이었지만 쓸쓸한 기억이 배어 있었다. 그 복잡한 마음이 아무 답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나중에 여자친구인 나기사로부터 집이 공터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히로는 그렇구나, 말고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랬을 텐데.

  “그걸 왜 제게?”
  “원래 네 돈이야.”
  “원래?”
  “그 집은 아케미의 명의였으니까. 애초에 네게 상속했었다.”

  그동안의 재산세 등등은 미성년자의 보호자로서 아버지가 내고 있었고, 성년이 된 직후에 집을 허문 뒤 집터로 바꿔 매매하면서 현금화를 했다는 설명이었다. 금융업에서 일하는 아버지니만큼 기본적인 내용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확인해도 되나요?”
  “물론.”

  히로는 색이 선명한 통장을 들고 안을 열어보았다. 과연 계좌의 주인은 ‘니시오 히로’였다. 그리고 잔고를 확인한 히로는 잠시 숨을 멈췄다. 거기엔 얼마 전에 봤던 방송에서 ‘평균적으로 집 한 채를 짓는 데 얼마나 드는지 아시나요?’라며 리포터가 외쳤던 총액을 훌쩍 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많이….”
  “전철 근처의 수도권 주택지는 다 비슷비슷하다. 토지로 돌려서 오히려 적은 편이야.”
  “그래요?”
  “그래. 하지만 건물이 없는 편이 거래가 쉬우니까. 그리고, 이것도 네 몫이다.”

  아버지는 낡은 통장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번째 통장도 역시 히로의 이름이었고, 금액은 조금 전의 거의 절반에 가까웠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드문드문 입금된 기록만 있고 출금은 없는 통장의 최초 입금 날짜는 히로가 태어난 날에서 석 달이 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통장 속지를 찬찬히 넘기며 살펴보는 히로를 향해 아버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너에게 집을 넘기고 나서는 세금도 있었고, 비과세 한도에 맞추느라 금액이 좀 들쭉날쭉하다만. 증여 신고는 해뒀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아버지가, 직접?”
  “개설은 했지. 나머지는 세무사 사무실에 맡겼다. 잘 아는 사이라 절차나 금액은 틀림없어.”
  “그렇군요.”

  히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펼쳤던 통장을 닫고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렸다.

  “일단 마실 거라도 주실래요? 목이 좀 말라서.”
  “아, 그래. 뭐로 줄까? 커피? 녹차나 주스도 있고.”
  “주스로 할게요.”
  “알았다. 금방 가져오마.”

  조금 허둥대며 문을 열고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히로는 작게 한숨을 흘렸다.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와는 쉽게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독립한 이후 본가에는 삼 년 정도 연락을 끊다시피 살고 있었고, 처음에는 달에 한두 번 정도 연락을 해오던 새어머니 아야메 씨에게도 휴대폰을 바꾸며 번호가 달라진 이후 새 번호를 굳이 알리지 않았다. 접촉 하나 없이 2년 넘게 흐른 적도 있었는데 최근에야 겨우겨우 얼굴을 맞대고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다소 부드럽게 갈무리된 관계. 아버지가 따로 만나자며 연락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아니, 애초에 아버지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 리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년 즈음 나기사와 결혼하기로 했다고 보고할 겸 인사를 갔다 온 지 채 며칠도 채 안 되어 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상당히 서두르는 듯 최대한 빨리 와달라는 요청에 둘의 일정을 맞출 겨를도 없었다. 혼자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연초에 새 기획이 들어왔다며 바쁘게 일하고 있을 여자친구의 일정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운송 스케줄이 끝난 다음 날 아버지의 사무실로 찾아온 게 오늘이었다. 그런데 회의실에서 안부 인사가 오가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미안하다. 용서해다오’라는 말과 함께 통장이 불쑥 내밀어졌다. 워낙 표정이 단단한 얼굴이라 티가 나지는 않았겠지만 히로는 속으로 상당히 당황해하는 중이었다.
  먹든 마시든, 뭔가를 입에 집어넣지 않으면 진정이 안 될 것 같아.
  아버지는 채 몇 분도 되지 않아 주스와 물을 챙겨 돌아와 주스 쪽을 히로에게 건넸다.

  “오렌지 주스다. 괜찮을까?”
  “네. 고맙습니다.”

  받은 병은 캐비닛에 있는 것을 그냥 꺼내온 듯 살짝 서늘했다. 히로는 병을 따자마자 한 모금에 절반 넘게 비우고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익숙한 향의 미지근한 음료가 속을 채우면서 열이 올랐던 머리가 조금은 식는 것이 느껴졌다.

  “마실 걸 미리 챙길 걸 그랬구나. 생각을 못 해 미안하다.”
  “아뇨. 그나저나 여기, 일하시는 곳이죠? 시간은 괜찮으세요?”
  “오늘은 오후 휴무로 되어 있으니까 괜찮다. 남은 건은 조금 있다 돌아가도 돼.”
  “휴무인데 일을 보신다고요?”
  “원래 여기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곳이야. 어쩔 수 없지.”

  소파에 등을 붙이며 피곤한 듯 넥타이를 고쳐 매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히로는 그러고 보니 늘 그랬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도 아버지는 언제나 퇴근이 늦었고, 퇴근 후에도 일을 들고 와서 밤늦게까지 마무리하곤 했다. 주말에 출근하는 일도 드물지 않아서 자신이 아버지와 무언가를 함께 했던 기억은 적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자신은 집안에서 마냥 혼자였고 아버지와 시간을 보낸 적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증권회사란 그런 곳이겠지.

  “힘드시겠네요.”
  “성과에 쫓기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요즘에는 그래도 휴일 정도는 지켜진다만.”

  돌이켜보면 아버지와 일 얘기를 했던 적은 없었다. 자신의 진로에 아버지의 직업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학교에서 성적이 좋으니 대학에 가라는 권유를 받았음에도 취업하겠다며 주요 교과목 시험을 일부러 망친 적도 있었다. 기억도, 추억도, 관심도 없었을 텐데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닮아가는 미래만큼은 한사코 거부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망치듯 집을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쁜 일인가 봐요. 애널리스트라는 건.”
  “아무래도 경쟁이 치열하지. 너는 어떠냐? 장거리 운송을 했던가?”
  “네. 다음 달부터 회사를 옮기긴 하는데요.”
  “그래?”
  “작년에 면허를 몇 가지 더 땄거든요. 그 김에 약품 운송 쪽으로 가기로 했어요.”
  “그렇구나. 옮기는 회사는 어느 쪽이냐?”
  “나리타시 근처에요. 앞으로는 치바와 나리타 사이를 주로 오가게 될 것 같네요.”

  나기사와의 결혼을 결심했을 때, 앞으로의 진로를 위해 제일 먼저 정했던 것은 장거리 운전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벌이도 회사 사정도 나쁘지 않지만 언젠가 아이가 생겼을 때 그 아이의 성장을 바라보지 못한 채 자라는 것은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스스로 만드는 가족과는 되도록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다. 같이 식사를 하고 각자의 성장을 공유하고 싶었다. 지금처럼 일주일에 사나흘은 떨어져 전화로만 안부를 확인하는 일은 사양이었다.
  그래서 연말부터는 가능한 수도권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곳으로 이직을 시도하고 있었다. 경력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계획하던 자격을 따는 일도 최대한 서둘렀고 좋은 곳이 있는지 여기저기 머리를 숙이고 물어보기도 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 이번에 옮기는 회사는 아주 바쁜 시기가 아니면 딱히 야간 근무나 연장 근무를 할 필요가 없는 대기업이었다. 연봉도 더 높아졌고 안전 관리나 복지 처우도 훨씬 좋아졌다.

  “나리타 쪽 약품 회사…라면, 혹시 *케다 화공?”
  “맞아요. 아시는 회사인가 보네요.”
  “기업분석을 조금만 해도 모를 수가 없지? 굉장한 곳으로 가게 되었구나.”
  “자격을 가진 젊은 사람이 모자라는가 보더라고요. 운도 좋았고.”

  아버지가 아는 회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다. 이번에 옮기는 회사는 화공업계 최고의 대기업이었으니까. 심지어 면접을 보게 해 준 것은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의 사장님이었다. 의욕 있고 실력 있는 젊은이에게 중소기업은 너무 좁으니, 가야 할 곳에 보내주겠다며 너털웃음을 짓는 얼굴에 히로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장님이 젊은 시절 그곳에서 일하다 독립해서 회사를 차렸다는 것도 그날 처음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탁자에 놓였던 것도 오렌지 주스였다. 얼음이 들어 있던 유리컵에서는 아주 신선하고 청량한 맛이 났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향이었다.
  지금 머금은 주스에서는 옆집 누나였던 나기사가 취직해서 그녀의 본가를 떠나고 아버지가 재혼한 후, 옛집에서 혼자 밥을 먹던 시절의 맛이 났다. 먹고 마시는 그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빈 위장을 메꾸거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입에 집어넣을 때 느껴지는 냄새. 배를 채우면서도 마음 어딘가를 텅 비고 쓸쓸하게 만드는 맛은 집을 나와 장거리 운전을 다니던 무렵까지도 히로를 내내 따라다녔다.

  “일하면서 추가로 자격을 딴 거냐?”
  “네. 특수면허하고 위험물 취급 자격을 몇 가지.”
  “회사 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다니 수고가 많았겠구나.”
  “아뇨. 혼자 힘으로만 한 건 아니니까요. 도움도 많이 받았고.”

  아버지의 도움은 없었지만, 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히로는 주스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집을 나와 혼자 살겠다고 얘기했을 무렵 어쩌면, 이라고 몽상했던 적은 있었다. 히로가 아는 한 아버지는 바쁜 대신 돈 걱정을 하며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는 대학을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때 등록금 정도는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졸업하고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 내게 방을 구할 정도의 도움은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홀로 떠돌면서 히로는 몇 번이나 망상 속의 아버지에게 받은 돈을 집어 던지는 자신을 보았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이따위 돈 몇 푼으로 내 마음을 붙들려고 하지 말라며 소리치는 스스로의 우울을 견디지 못해 히로는 더 이상의 사고를 포기했다. 아버지는 독립하는 데 돈이 든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없거나, 아들 따위는 독립하든 말든 상관없을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에게서 관심이나 애정을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계속 괴로워하느니 아예 마음을 끊는 편이 나았다. 이복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는 드물게 떠올렸던 공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그중 제일이 나기사 씨인가?”
  “그렇게 되네요.”

  갓 고등학교를 나온 애송이가 홀로 제대로 서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사회에 뛰어드는 것은 힘들었다. 요령도 모르는 신인이 대형면허 하나로 버텨야 했기에 남들이 가지 않는 험로나 오지의 장거리 운송밖에 받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보통의 고졸보다 받는 돈은 제법 되었지만, 집에서 나온 그가 홀로 먹고 자는 비용을 지불하고 나면 남는 돈이 생각만큼 넉넉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최대한 돈을 아껴 특수면허 학원에 다니거나 강습을 추가로 받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돈은 예상보다 모이는 속도가 훨씬 더뎠고, 조금이라도 소비를 줄여보고자 캡슐 호텔과 편의점을 전전하는 동안 몸은 지치고 의욕은 꺾여갔다. 좀 더 나은 미래를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사고는 머리를 공전할 뿐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비 오던 가을 우연히 나기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정처 없이 떠돌며 살아가는 그저 그런 운전기사의 삶에 불만만 가득한 채 영영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기사는 어린 시절 이후 몇 년이나 얼굴도 마주친 적 없는 자신의 무엇을 보았던지, 자취하며 지내던 그녀의 집에 두말없이 그를 맞아들여 주었다. 의도치 않은 기둥서방 생활에 죄책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시원스럽게 나중에 잘 되어 갚으면 된다고 했다. 거처가 안정되면서 면허가 한두 개 쌓여가자 자격 소지자만 배정되는 비교적 편한 경로의 운송을 맡는 일이 늘어났다. 시간에 여유가 생기니 생각했던 자격증을 따는 속도가 더욱더 빨라졌고 배송처에서 이직을 제의받는 일도 종종 생겼다. 무엇보다도, 다시 함께 밥을 먹게 되면서 그저 뱃속에 밀어 넣는 행위에 불과했던 식사에서 느껴지던 외로움의 향기가 사라졌다. 어머니가 죽은 직후의 고독에서 자신을 꺼내 같은 식탁에 앉혀 주었던 옆집 누나 나기사는 어른이 되고 만나서도 여전히 구원의 여신이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때까지 채 몇 달도 걸리지 않았다.

  “고마운 분들을 만났구나.”
  “네. 일을 시켜 주신 사장님이나 직장 분들도 많이 도와주셨고요.”
  “그래.”

  생수를 마시며 작은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의 표정에 보이는 그늘은 후회일까, 아니면 사죄일까.
  히로의 상상 속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젊은 시절 그대로의 모습으로 냉정하게 흰 봉투를 건네고 있었다. 지금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에 주름진 눈가를 하고 통장을 내밀 줄은 몰랐다. 마치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울화를 터뜨리고 있었을 자신이, 이렇게나 침착하게 그 모습을 마주하고 있을 줄도 몰랐다.

  “…그동안 돈이 필요한 상황이 많았을 텐데, 미리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일부러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 몇 번이고 받는 아버지의 사과에도, 예전의 자신이라면 마땅히 느껴지리라 생각했던 고통이나 분노는 태어나지 않았다. 이제 와 이딴 게 무슨 소용이냐며 소리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더는 미련스럽게 뒤통수에 과거를 달고 살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기사의 집에서 지내기 시작하면서 히로는 조금씩 가족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청혼하고 그녀의 가족이 되기로 한 뒤부터 비로소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새 가족을 이루었다는 것을 고통이 아닌 그저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였다. 그러다 근거리 출퇴근이 가능한 곳으로 이직이 결정되었다고 전했을 때, 나기사의 얼굴에 떠오른 뚜렷한 안심의 표정을 보고 히로는 자신이 더는 무언가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함께 살면서, 또 사귀면서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하는 장거리 운전 업무에 대한 불만을 말한 적이 없었다. 며칠이고 멀리 떠났다 드문드문 돌아오는 것 또한 그의 삶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보았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얼마나 깊은 애정을 얻게 되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간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불안하게 해 왔는지 알게 되었던 미안한 마음과 티를 내지 않고 기다려준 감사의 마음이 뒤섞인 채 부풀어 올라 한동안 나기사를 품 안에 가득 안는 것 말고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날의 식사는 사귀고 난 뒤의 첫 생일 저녁만큼이나 늦게 시작해야 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당연히 줘야 할 것이었는데 줄 생각이 안 들었다. 왜였을까.”
  “아버지. 예전에 주셨다면 아마 전 이 돈을 안 받았을 거예요.”
  “그럴 수는 없다. 이건 이미 네 거고….”
  “그래도요.”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자신은 단 한 번도 첫 번째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던 시절의 자신은 돈으로 마음을 표현했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을. 자신의 첫 번째가 아버지가 아니게 된 지금에 와서야.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을 새로 만들면서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웠고, 동시에 히로와의 관계는 거절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 다만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떠올리게 하는 히로와의 관계를 피하려고 일이라는 핑계로 도망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며 집에서 나간 히로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갈등을 회피하는 방식을 선택해 버렸다. 아버지가 아버지 나름의 고통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 꼭 그만큼의 분노로 히로는 새로 생긴 가족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것이다. 소중해야 했을 사람에게 이미 거절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이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망설이게 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는 지금도 돌아가신 어머니의 그림자를 남긴 채 어중간하게 식은 채였다. 마치 아버지가 건넨 주스의 맛처럼.

  “…결혼 얘기를 듣고 나서야 돈 생각이 나서, 너무 늦었다고 후회했다.”
  “그래서 서두르신 건가요?”
  “맞다. 아케미에게 너를 부탁받았는데, 그것조차 잊고 있었다니 내가 어떻게 되었던 건지.”
  “괜찮아요.”

  그렇다, 아버지는 이미 괜찮았다. 아버지에게는 새어머니와 의붓동생이 있으니까.
  그리고 히로도 이제 괜찮았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은, 이제 자신의 중심이 아니어도 되니까. 나기사를 만나 자신만의 장소를 얻었으니까. 각자가 서로의 중심이 아니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절대 크거나 아름답지 않은, 그냥 작고 평범하기만 한, 여벌의 마음을.

  “전부 미안했다. 용서해다오.”

  훈훈하지도 포근하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일 뿐이지만 텅 빈 마음의 외로움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을까.
  모두에게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는 용서의 정의라는 게 무엇인지 히로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피하고 어머니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던 시절보다는 모두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된 지금의 자신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나기사와 마음을 나누고 앞으로의 가족을 궁리하는 자신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아마도 스스로를 포함한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지금의 이 마음이, 자신만의 용서일 것이리라.

  “용서할 것도 없어요. 지금이라서, 감사합니다.”

  히로는 엷게 미소를 지으며 남아있던 주스를 마저 마셨다.
  앞으로 때로는 아버지와 둘이서 차를 마실 수도 있을 것이고, 가끔은 가족과 식사를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무언가를 함께 나누며 먹고 마실 수 없게 된다 해도 예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이 각자에게 따로 있는, 타인보다 아주 조금 더 의미가 있는, 그래서 앞으로 적당히 새로 쌓아 올리는 것만이 전부인, 꼭 그만큼의 관계임을 이제 인정하기로 하자.

  “저는 슬슬 들어갈까 하는데요, 아버지는 여기서 조금 더 쉬시는 게 어때요?”
  “아니다. 남은 일 처리하면 집에 가야지. 휴가니까.”
  “아, 아야메 씨와 아오이가 기다리고 있겠군요.”
  “그래.”

  그래서 쑥스러운 듯이 콧등을 만지작거리는 아버지를 보아도 어린 시절의 자신과 아오이를 비교하며 우울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히로는 저도 모르게 피식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두 개의 통장을 챙겨 속주머니 깊이 넣었다.

  “과연 나이를 먹고 볼 일이네요. 이런 면도 있으신지 몰랐어요.”
  “웃지 마라.”
  “하하.”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아버지를 향해 결국 웃음을 터뜨린 뒤 히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야메가 다음 달쯤 밥을 한 번 먹자고 전해달라더구나.”
  “아, 나기사한테 들었어요. 아오이가 유치원에 입학하던가요?”
  “맞다.”
  “시간 맞춰볼게요. 그때 뵙죠.”
  “그래. 잘 지내라.”

  사무실을 나와 나기사와 지내는 보금자리로 향하던 히로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려다 메신저의 알림 문자가 깜박이는 것을 발견했다.

  『얘기는 잘 끝났어?』

  시간은 조금 전, 나기사의 문자였다. 어려워했던 아버지를 혼자 만나러 간 자신을 분명 걱정해서 연락했을 것이다. 일하던 중에 연락하기 힘들었을 텐데 길지 않은 쉬는 시간을 내준 것이 기뻐 히로는 바로 답신을 보냈다.

  『지금 막 마쳤어. 잠깐 통화 가능해?』
  『지금은 괜찮아. 전화 줘.』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로 군? 어디야?”
  “아버지 사무실 앞. 걱정시켰네.”
  “아냐. 별일은 없었어?”
  “응, 오래 걸리지 않아서. 나기사는? 바빠?”
  “지금은 휴식 시간이야. 있다가 회의가 있지만, 퇴근은 정시에 할 것 같아.”
  “다행이네. 그럼, 시간 맞춰서 회사로 마중 갈게.”
  “어? 집으로 안 가?”
  “내일 둘 다 휴일이잖아. 오랜만에 외식하자. 할 얘기도 있고.”
  “나야 괜찮은데, 이야기?”
  “만나서 말해 줄게. 회의 가야 하지?”
  “그렇구나.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 있다 봐.”
  “응. 퇴근 때 봐.”

  핸드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히로는 자신의 옷을 먼저 살폈다.
  진한 감색 바지에 회색 재킷, 베이지색 셔츠. 집에서 출발해 아버지가 일하는 증권회사에 다녀온 참이라 캐주얼이기는 해도 정장이었다. 옷과 구두의 조합 같은 것까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기사가 잘 어울린다며 골라 준 것이니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사 줄 때만 해도 운전만 하는 자신이 이런 옷을 입을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음, 이 정도면 괜찮아.”

  시간을 확인하면 나기사의 회사로 이동해야 할 때까지 두 시간 반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조금 바쁠지도 몰라. 히로는 뒷주머니의 지갑을 확인하며 걸음을 약간 서둘렀다.
  나기사의 회사는 도심에 있어서 근처로 가면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여러 개 있었다. 미리 가서 꽃다발을 주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주문한 다음 지난주에 함께 갔던 공방에 들러, 나기사가 주의 깊게 바라보다 가격표를 보고 고개를 돌리던 목걸이를 사 오면 꽃다발이 완성되는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첫 프로포즈는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와 버렸고, 두 번째 프로포즈도 집에서 식사하다 말로만 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비교적 제대로 된 식당을 찾아 식사를 나누며 많은 것을 주고 싶었다. 오늘 받은 돈으로 지을 수 있는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의논하면서.

  “꽃과 선물에, 통장 얘기까지 하면 나기사가 놀라려나.”

  받은 돈에 모은 돈까지 합하면 함께 부동산 웹사이트를 뒤지며 여기가 최고겠다고 농담을 나누던, 학교가 많은 도심의 주택용 대지를 대출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지를 구하고 나면 건축비 정도는 이직할 회사에서 이율이 낮은 직원 대출을 알선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생각보다 빨리 얻을 수 있었다. 나기사의 회사까지 지하철 한 번에 갈 수 있고, 새로운 회사까지 가는 고속도로 입구와도 가까우며, 서너 개 정도의 방과 테라스와 주차장을 지을 수 있는 3층 정도의, 자신의 가족이 머물 집을.
  어머니를 잃고 홀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린 날의 자신을 저녁때마다 안도 가의 식탁으로 맞아 준 것은 나기사였다. 가족을 떠나 모든 일에서 겉돌며 거리를 떠돌던 자신을 그녀가 살던 집으로 받아 준 것도 나기사였다. 계속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장을 보고 거리를 걷는 모든 시간이 행복하고 소중했다. 지금 사는 집의 여벌 열쇠를 받기도 전에 히로는 이미 그녀와 함께 하는 삶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지은 집에서 그녀와 사는 미래를 상상해왔다.

  “그래도 기뻐해 줄 거야.”

  그 미래가 잡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에 히로는 드디어 아무 근심 없이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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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심보다는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몸을 맡기고 두드린 글.
  팬픽이라기에는 한없이 애매해서 올릴까 망설였으나 분노의 2차 창작을 위해 일본 화물기사 연봉과 진로, 도쿄 23구 집값에 소득 및 증여세 기준까지 뒤진 시간을 감안해서(...) 게시하기로.

       -Amille.
2024/03/23 19:59 2024/03/2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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