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토스터를 고치는 일은 조금 번거로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이 과연 아침?
  나는 약간 고개를 기울여 보았다. 어쩌면 아침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이미 정오를 넘겨버렸으니까. 하지만 '아침'이라는 것이 저녁에 잠든 뒤 깨어 일어난 직후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지금이 아침이다. 말하자면 '아침'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할 경우 내게는 지금이 아침이라는 말이다.
  물론 해가 떠서 머리 꼭대기에 이르기 전까지의 시간만을 아침이라고 부른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지만, 거의 매일 이 시간쯤에야 눈을 뜨는 나는 때때로 지금 이 순간을 아침이라고 생각해 버리곤 한다. 더 어려운 논리를 통해 이런저런 토론을 벌이는 것도 좋겠지만, 아침밥도 먹지 못한 지금 그 생각을 진행시킨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배가 고플 때 머리 속의 논쟁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지금은 일단 토스터를 고치는 일에 신경을 써야겠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그저 '귀찮다'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일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절실할 때 이 단어를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즉 아침을 먹기 위해서는 토스터가 필요하고, 나는 지금 배가 고프기 때문에 이 토스터를 고쳐야만 한다는 말이다. 밥도 먹기 전에 뭔가 뚝닥거리며 고치기부터 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지극히 불만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토스터를 고쳐야만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치솟는 짜증을 꾹꾹 참아가며 수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잉-윙-

  소리가 깨끗하게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도 뭔가 선이 제대로 맞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전자 토스터는 모빌 슈츠만큼 고치는 데 시간이 걸린다거나 일일이 설계도를 봐 가며 재조립을 해야 한다던가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언제나 모빌 슈츠같은 복잡한 기계류를 만지작거리는 데에만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사람이 토스터 하나에 낑낑거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매일매일 토스터만 고치며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만지지 않던 기계류를 손질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간단한 물건이라 해도 쉬운 일이 아닌 게 확실하다.
  그 증거로 나는 벌써 삼십 분째 침대 옆에 주저앉아 이 토스터의 배선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지이잉-징-위이이잉---
  "...코우? 무슨 소리에요?"

  니나에게도 이제야 겨우 아침이 찾아온 모양이다.
  그녀가 눈을 비비고 얼굴을 둘러싸고 있던 금발을 걷어내는 것은 언제 보아도 아기 고양이처럼 보인다. 나는 토스터에서 잠시 눈을 떼고 꽤 길어진 금발을 쓸어올리는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바보처럼 씩 웃어주었다. 잠이 막 깬 게슴츠레한 눈과 부시시한 머리칼을 가지고도 그녀는 내게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어머 코우, 토스터가 왜 이래요? 뚜껑을 다 열어놓고?"
  "고장났어. 고치고 있는 중이야."
  "맙소사."

  그녀는 내 손안에 놓인 토스터의 모양새를 보더니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찰랑. 그녀의 몸에 감겨 있던 시트가 어깨 아래로 내려갈 듯 말듯하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트 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한 대 얻어맞고서야 다시 토스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지 말아요. 옷 갈아입을 테니까."

  '응' 이라고 대답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리던 나는 다시 한 번 등을 찰싹 하고 맞은 뒤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뜻으로 목 위에 쿠션까지 하나 머리에 얹어야 했다. 하지만 이건 뭔가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두 사람뿐인 침대 위에서 연인의 몸조차 마음대로 못 본대서야 말이 되나. 하지만 그녀는 한낮에 알몸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로 항상 나의 불만을 잠재워 버린다.
  그녀에게 지금은 아침이 아닌, 한낮인 것이다.

  "자, 자 됐어요."

  반바지와 편한 셔츠로 옷을 갈아입은 후 그녀는 내 머리에 놓인 쿠션을 치우면서 내 뺨에 살짝 입맞추고는 내 옆에 주저앉아 바닥이 뜯어져서 내부의 선이 죄 드러난 모양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금방 될 것 같아요?"
  "잘 모르겠는데."
  "어디 봐요."

  그녀가 깨기 전 15분 동안이나 공을 들여 애써 그려놓은 배선도를 간단히 그녀에게 빼앗긴 뒤, 나는 여자들에게는 제멋대로인 면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었다. 여자들은 깨끗하게 청소해놓은 바닥에 먼지를 떨어뜨리고 세제로 닦아놓은 욕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샤워를 한다며 잔소리를 하면서도 애써 깔끔하게 그려놓은 배선도 위에 연필로 선을 직직 그어대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녀의 직업이 엔지니어라는 사실은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요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는 것이다.

  "여기하고 저기가 나간 거네요. 틀림없어."
  "응. 그래서 지금 두 선을 연결했더니 돌아가기는 하는데 울리는 소리가 나서. 팬이랑 연결된 선도 하나 맛이 갔나봐."
  "그걸 찾고 있던 중이었어요?"
  "응. 한 십 분이면 끝나지 않을까 싶어."
  "그럼 난 커피나 타올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 냉큼 일어서서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물론 아까까지 연필로 선을 그어대던 간이 배선도는 그대로 내팽개쳐 둔 채. 나는 토스터를 수리할 생각도 잠시 잊은 채 멍하니 앉아 이제는 휴지 조각에 좀더 가까워진 그 배선도를 바라보았다.
  니나는 물론 그 배선도에 선을 덧붙이는 것이 내 기분을 거슬리는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물론 기분이 상했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것하고는 다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거슬리는' 기분으로, 굳이 말하자면 채 익지 않아 조금 떫은 보리수 열매를 입안에 넣었을 때 입안에 번지는 텁텁한 느낌 같은 것이다.
  그런 정도의 기분을 굳이 입밖에 내어서 말할 생각은 없는지라 나는 그냥 그 종이를 집어 쓰레기통에 던질까 말까 하는 문제로 생각을 바꾸었다.
  탁.

  "무슨 생각을 해요? 커피 들어요."

  눈을 들자 생긋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가리키는 그녀가 보였다. 나는 기꺼운 기분으로 손을 뻗어 향긋한 냄새가 나는 컵을 들고 한 모금을 마셨다. 잘 블렌딩해 내린 원두 커피에 딱 한 숟가락의 설탕. 그녀는 언제나 내가 설탕 한 스푼을 넣는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녀는 세심하다.

  "고마워. 좋은 걸."
  "많이 내려 놓았으니까. 더 필요하면 말해요. 냉장고에 얼린 빵 말고 땅콩 버터랑 어제 먹다 남은 비스킷이 조금 있던데, 그걸로 아침을 먹는 건 어때요?"
  "당신은 빵을 더 좋아하잖아."
  "그래요. 하지만 토스터가 돌아가질 않으니 할 수 없잖아요. 조금 있으면 키스 씨랑 모라가 쳐들어 올 텐데, 아직 샤워도 못 했다구요."
  "그럼 딱 십분만. 십분 만에 안되면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어때?"
  "알았어요. 하지만 좀 더 서둘러 봐요. 난 배고프니까."
  "오케이."

  나는 다시 토스터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니나는 옆에 앉아서 뭐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없나 이리저리 궁리하는 것처럼 움찔거리다가, 이내 포기한 듯 그냥 침대 아래에 주저앉아 TV를 켰다.
생각해 보면 예전의 그녀는 멍하니 앉아 TV를 보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왁자하게 방을 닦는다, 침대 커버를 털어낸다 해서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일어나고 나면 집안이 언제나 분주했었다. 하지만 나하고 산 지도 슬슬 삼 년이 넘어가는 지금의 그녀는 곧잘 닦지도 않은 맨 바닥에 주저앉아 TV를 보는 것도 개의치 않게끔 되었다.
  그것은 내가 아까 비스킷과 땅콩 버터로 아침을 때울 수 있음에도 토스터를 고치기 위해 십 분간이나 더 고픈 배를 움켜쥐어 보기로 결정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다 싶은 성질머리를 조금 배우게 되었고, 그녀는 나의 너저분하다 싶을 정도로 방만한 느긋함을 조금 배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같이 한 사람들이 당연히 그러하듯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닮아가고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13시 뉴스 프레디 노만입니다. 연방 정부에서 내분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10대들의 우상 다이아나 창이 콘서트 도중 팬의 습격을 받아 응급실로 후송되었습니다. 세계 환경보전 협회가 아프리카의 사막화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먼저 주요 뉴스를 보시겠습니다.

  사실 TV를 틀어 놓는다고 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니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모든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집중해서 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나보다도 꽤 많은 내용을 기억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나보다 꼼꼼한 때문이거나 아니면 기억력이 더 좋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핑계 말고도 토스터를 수리하고 있다는 근사한 변명거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흘러나오고 있는 뉴스의 내용과 그 기사에 그녀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척 하기로 결심했다.

  - 연방 정부에서 최근에 우주에서 오래 머물렀던 정부원들을 중심으로 '에우고'라는 조직이 비밀리에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조직은 과거 지구권에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던 지온 공국의 사상을 잇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현재 연방에서는 에우고의 해산을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연방의 자마이칸 라닌건 소령의 얘기를 들어보시겠습니다.

  에우고. 못 들어본 이름이다. 하지만 지온 공국의 사상을 잇고 있다는 몇몇 조직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나마 얼핏 듣게 되면 나는 자동적으로 '그들'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목숨까지 내주었지만 결국은 잊혀진 사람들. 테러조직 데라즈 플리트. 스페이스노이드.

  핏.

  니나가 TV를 꺼버리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나는 뉴스와 니나에 정신이 팔려 토스터를 고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재빨리 다시 작업에 몰입하는 척 몸을 토스터 위로 다시 구부렸지만, 그 와중에 얼핏 그녀의 조금쯤 슬픈 듯한, 아니 조금 안타까운 듯한, 아니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든 그녀의 표정을 읽고 말았다.

  "뉴스에 뭐가 나왔어?"
  "아뇨,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래. 뉴스에 볼 게 없으면 채널 돌려서 영화라도 보지. 기다리기 지루하잖아."
  "응. 봐서요."

  끊임없이 토스터를 만지작거리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주위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역시 달에서 살아가고 있던 시절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기억일까.
  왠지 앞뒤가 안 맞는 일처럼 여겨진다. 그녀는 이제 지구에서 살고 있고, 또다시 우주로 올라가지 않는 한 그녀는 어스노이드이다. 그런데 어째서 스페이스노이드의 일에 여전히 그것이 자기 일인 것처럼 신경 쓰고 걱정하는 것일까.
  우리는 너무나 달라서 결코 지금 이상으로 더 다가갈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정오를 아침이라고 부르고 그녀는 정오를 낮이라고 부른다. 아침과 낮이 다른 것만큼이나 서로 다른 우리는 그 차이를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녀는 왜 정오를 아침이라고 불러줄 수 없을까. 낮이라고 부르는 정의에 너무나 얽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인정해 버렸기 때문에 나 혼자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여 줄 수 없는 것일까.
  그녀는 세심하고 민감하고...나 외의 다른 사람들도 많이 사랑하므로.

  "아침이 너무 늦는 거 같긴 해."
  "이건 점심이라구요. 코우."

  그녀는 왜 그를 사랑했을까.
  아니, 왜 아직도 그를 사랑했던 그녀 자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전에 그와 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결국 그는 데라즈 플리트에 참가하기 위해 그녀를 잔인하게 내팽개친 것이 확실한데도.
  그는,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그들은 왜 덧없는 꿈을 사랑했을까.
  목숨을 버리고도 그에게 돌아온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었는데. 어떤 한 가지 꿈이 '정의'라고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들 자신의 존재를 후회 없이 태워버릴 정도로.
어찌 보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세상에 살아갈 수 없던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들어 낸 '정의'라던가 '꿈'이라는 것에 인간들 자신이 얽매어 결국 목숨까지 잃게 된다는 것은. 그들은 이생에 대한 죽음마저 뛰어넘은 애정을 전 우주에 과시하며 죽어 갔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모른다.
  니나가 TV를 보며 이미 떠나온 달과 콜로니의 안위를 걱정하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자신은 지금 지구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눈앞에 있는-지금 이 나를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도.
  그녀에게는 사랑이 너무 많이 있다. 옆에 있는 나라는 존재를 너무나도 초라하게 만드는, 이루어질 수 없었는데도 버리지 않고 있는 사랑.
  그들에게는 사랑이 너무 많이 있었다. 그들의 목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마저도 같이 타버릴 만큼, 뜨거웠지만 결국 재마저도 남지 못한 사랑.
  세상에는 사랑이 너무나 많이 있다.
  온 사방으로 넘치는 사랑 뿐.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도 따져보지 않고 덤벼들게 되는 압도적인 사랑 뿐.
  나는 목을 조금 가다듬었다.

  "니나."
  "왜요?"
  "지금이 아침이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네?"
  "힘들 거야, 당신한테는 너무 추억이랄까-애정이랄까, 하여간에 남은 것이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만이라도 지금이 아침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뜻을 가득 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한참 동안이나 내게 머물렀다.
  어쩌면 질문을 잘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을 해 볼 재주는 내게 없었다. 더 이상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해도, 그녀는 더욱 힘들어 할 뿐일 테니. 니나는 한참 동안 나와 토스터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TV를 다시 켜며 중얼거렸다.

  "영화나 봐야겠네."
  "니나...."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코우, 지금이 아침이든 점심이든 별로 상관없잖아요? 배가 고픈 게 먼저잖아요. 그렇게 가만히 있지만 말고 토스터나 고쳐 보는 게 어때요?"

  그랬다.
  나는 내 생각에 빠져서 지금 배가 고프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에 빠진 채 그녀가 배고프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었다는 것은, 결국 내가 방금까지도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던 지나친 사랑이 내게도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기억 속의 사랑으로 인해 나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는 내 생각으로 인해 그녀가 일분이라도 더 굶게 된다는 사실은 간과했던 것이다.
  내가 니나의 사랑을 불만스러워했던 것은 결국 닮아가는 연인들 사이의 하찮은 투정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배고픔에 못 이겨 내 넘치는 사랑을 답답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토스터를 고치는 지루하고 번거로운 작업에 못 이겨 그녀의 추억을 잠시 질투했을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팬의 마지막 배선을 교체한 후에 액션영화를 보고 있는 니나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마음놓고 보낼 수 있었다.

  "다 고쳤어요?"
  "응."
  "13분 걸렸네. 빵 가져올게요."
  "3분 동안이나 더 기다려 준 거야?"
  "그런 게 아니에요. 시간이 가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어. 봐줬으니까 설거지는 당신이 해요."
  "너무해!"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에도 나와 닮아가는 그녀의 점심을 함께 한다.
  내게는 딱 이만큼의 사랑이면 충분하다.



  설정상 잊혀진 기억들 3, 4, 5편과 약간의 관련이 있습니다.

2009/02/10 15:43 2009/02/10 1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