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환하다.
  하얀 빛 사이로 투명한 날개를 가진 재색의 나비들이 춤을 추었다. 무리를 지어 여기저기로 날아다니며 유혹을 했다. 형체도 없고 모양도 갖추지 못했건만 그들의 날개 자욱보다 더 우아한 무늬란 존재하지 않을 듯 싶었다.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흐느적거림. 그래서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가슴아픈 그림자.
  그는 그 빛에 보호받고 있는 것이 맞았다. 달아나지만 않는다면 여기에 영원히 머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은 따스했고,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새로 빤 두터운 솜이불로 둘러싸인 침대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호흡이 깊어졌다.
  그러니까 날 그냥 이대로 둬 줘.
  그는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밑도 끝도 없는 잠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여태 왜 모르고 있었을까. 마치 기억나지 않는 고향으로 갓 돌아와 여기가 고향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참으로 오래 헤메었어.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
  춤추는 나비들은 잠들 때까지 각양각색의 일렁거림으로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다른 생각일랑 할 필요도 없거니와 할 수도 없었다. 점점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어지러운 춤사위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귓전으로 조용한 고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몸 속의 그 무엇과 연결된 다른 누군가의 소리 같기도 한 그 어떤 것.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그는 꿈도 없는 잠을 자기 시작해서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을 돌던 나비 떼 같은 것은 더 이상 없었다. 귓가의 고동소리도 사라지고, 주변의 온기도 식은 지 오래. 그는 아쉬움을 느끼며 눈을 깜박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겨우 깨달았다.
  여기가 어디일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쯤, 옆에서 나이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아, 끝났으니까 그만 일어나거라. 헬멧도 벗고."

  그는 처음으로 양호실에서 전자광 치료를 받아본 것이다.

                                                  *                                   *

  카미유는 양호실의 침대에서 일어나서 벗어놓았던 티셔츠를 찾아 입었다. 옆에서는 양호 담당 의사가 헬멧을 들고 선 채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분은 어떠니? 좋아?"
  "좋아요."

  그는 간단하게 대답한 다음 통학용의 가벼운 가방을 찾아 들었다.
  카미유가 양호실 신세를 지게 된 것은 두 달 전의 일로, 학기초에 있었던 담임과의 면담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때 보였던 약간의 소극적인 태도가 적극적인 성격을 좋아하는 이번의 담임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카미유 자신은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가 이번 학년초에 받은 성격 판정은 '자폐가 우려되는 심인성 장애'였다. 작년까지 나타나던 내성적인 성격으로서의 표식이 병적인 상황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소견이 나와 양호과에서 퇴행 요법을 겸한 광치료법을 사용하게끔 된 것이다.
  광치료법은 원래 빛이 풍부한 계절 동안에는 보통 사람과 같이 지내다가 빛이 적은 계절이 되었을 때 우울의 증세를 보이는 광우울증의 경우에 한해서 사용하던 요법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아동 신경증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널리 사용되게끔 된 것이다. 약물치료처럼 효과적이지는 못하지만 부작용이 없으므로 약물 치료 이전 단계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목요일에도 와야 한다, 알겠지?"
  "...목요일에도."

  카미유는 앵무새처럼 의사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치료 초기에는 일주일에 한 번이었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으로 횟수가 늘었다. 양호과에서는 카미유가 알지 못하는 사이 다음 달까지 효과가 없다면 부모에게 알리고 동의를 얻은 뒤 항우울제를 투여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럼 잘 가라."
  "...."

  카미유는 대답 없이 의사를 향해 꾸벅 절을 한 뒤 양호실을 나선 뒤, 그대로 잠시 서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를 궁리했다. 학교 안에서는 갈 곳이 없었다. 학교 안을 돌아다녀 보았자 놀림감이 될 뿐이라는 것은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일이어서 서클 같은 것을 아예 들지 않은 것이다. 학교의 녀석들에게 조롱거리가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여자 같은 이름 때문에, 둘째는 올 들어 양호실에 자주 드나든다는 사실 때문에, 셋째는 아버지의....

  - 아버지, 오늘은 쉬는 날이던가.

  아버지가 쉬는 날이라면 어디 길거리에서 헤메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밤까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새삼 다짐하는 카미유였다. 그 동안은 일 때문이라고 변명하며 집에 잘 돌아오지 않던 아버지가 요즘 들어서는 집안까지 공공연하게 여자를 끌어들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다. 어머니 역시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아버지와 그리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어머니의 경우 정말로 일을 하느라 집에 오지 않는다는 점이겠지만.
  아버지의 외박이 외도 때문이라는 점을 카미유가 직접적으로 확인한 것은 작년 겨울의 일이었다. 거리를 걷다가, 노처녀인 생활지도 선생과 아버지가 딥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던 것이다. 키스를 나눈 당사자들은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했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은 어린 카미유가 보기에도 분명했다.
  혹시나 어머니 혼자 아버지의 외도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어머니와 대화를 시도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바쁘다. 진지하게 아버지의 외도에 대해 두 사람이 의견을 나눌 시간 따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국 어머니가 사실을 아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카미유의 가슴에만 남아 있게 되었다.
  게다가 카미유와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보던 아이들에 의해 그 소문은 결국 학교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지금도 두 사람이 서로의 집에서 몰래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로서는 계속되는 아이들의 조소가 무엇보다도 통렬한 것이었다. 결국 카미유는 다음 학년 때 학교 안에서 친구를 만드는 데 실패했고 외토리가 되고 말았다.

  "카미유-!"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친구 사이였던 저 녀석만 빼고.

  "기다려, 카미유!"

  소꿉친구인 화 유이리이다. 하지만 카미유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서두르는 듯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름을 그렇게 크게 불러대는 것이 못마땅한 탓이었다. 여러 번 짜증도 내고 주의도 주었지만 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데서나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곤 한다. 그런 면으로 지능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기다려-! 같이 가자니까! 카-미-유-!"

  넓은 학교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못 들었다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아,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하교길을 걷고 있던 몇 녀석의 웃음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느끼면서. 화는 카미유 바로 앞에서 멈춰서더니 한참 동안 헉헉거리다가 발끈한 모양새로 그에게 따져들었다.

  "들었으면 대답을 좀 하라고 그랬잖아! 따라오느라 숨이 다 차네."

  카미유는 잠자코 뒤돌아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로 옆으로 작은 서류봉투 하나를 든 화가 따라붙었다.

  "왜 또 기분이 나쁜 거야, 카미유?"
  "...."
  "어? 정말 화난 거야? 왜 그래? 또 이름 때문이야?"
  "이름 때문에."
  "아 정말-뭐 어때! 나쁜 이름도 아닌데."

  카미유는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녀가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화로서는, 그의 이름이 카미유던 클로라던 라엔이던 상관없을 것이다.(아하하 ^^;) 어떤 이름을 갖고 있던 간에, 너는 너라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으니 불쾌해도 불평이나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을 수 없는 노릇이다.

  '태평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녀석이니까....'

  카미유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찌푸렸던 표정을 약간 폈다. 조금 눈치를 보고 있던 화가 느닷없이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오며 생글생글 웃음을 지었다.

  "저어기-이제 기분 풀렸어? 응?"
  "...응."

  하지만 뭔가 예감이 불길하다.

  "서클 들지 않을래?"
  "서클?"
  "응. 싫어?"
  "싫어."
  "우웃, 딱 잘라 말하네...하나만 들어 주라, 응? 안돼?"
  "안돼."
  "너무해-, 그러지 말고!"

  화는 카미유의 오른팔을 붙들고 늘어지며 그에게 매달렸다. 카미유는 뒤를 따라오던 아이들의 휘파람에 얼굴이 확 붉어지는 자신을 원망하며 화를 애써 떼어냈다.

  "...!"
  "실용체육 서클이라 한 조로 들어야 되는 걸-내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들어 주라. 들어 줄 거지? 응?"
  "...그...!"

  카미유는 다시 한번 '그건 정말 싫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와 주지를 않았다.
  무언가가 계속, 말이 나오려는 것을 막고 있다.
  몸 전체에서, 세상에 대한 의사 표현을 거부한다.
  그러나 화는 여전히 그의 팔을 붙든 채 놓아주려고 하질 않았다. 칭얼대는 그녀의 얼굴에는 벌써 반쯤 승낙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는 묘한 승리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약했으니까. 떼를 쓰고 매달리면 언제나 받아 주었으니까.
  옆을 스치는 아이들은 계속 키득거리면서 저 자식은 아버지 닮아 벌써부터 저렇다며 그를 비웃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입장을 변호해 주는 이는 없다. 오히려 마음놓고 비웃을 수 있는 약자를 발견한 것이 매우 기쁜 듯한 얼굴들이었다.
  어떻게 해도 이 진흙탕에서 도망을 갈 수 없다....
  가슴이 끓어올랐다. 화에 대해서는 물론, 주변을 지나가는 다른 녀석들, 울타리, 나무, 심지어는 하늘 위로 은은하게 보이는 콜로니의 거대한 외벽에마저도 분노가 느껴졌다.
  머리 속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싫다고 그랬잖아---!!"

  기차 화통 삶아놓은 것 이상의 비명에 화는 깜짝 놀라 그의 팔을 놓았다.

  "카미유...?"

  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분노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정말 화가 나 있는 것은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에게가 아니라....

  "카...미유...?"
  "우아아악-!"

  카미유는 몸을 돌려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비명을 내지르며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가만 두어도 자동으로 닫히게 되어 있는 현관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자마자 신도 벗지 못한 채 문에 등을 기대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격렬한 호흡을 진정시키느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 정말로 몰라?

  과연 누구한테 화가 난 걸까.
  뻔히 아들과 상관 있는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꼬리를 친 선생 같지도 않은 여자?
  아니면,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정사에는 관심이 없는 어머니?
  그것도 아니라면, 이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

  - 정말 모르는 거냐고!

  그 질문조차 누구를 다그치는 건지 알 수 없다면, 나는 미쳐버리는 게 나을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생각을 그냥 삼키자 마른 음식을 넘겼을 때처럼 가슴이 금새 또 답답해졌다.

  "카미유, 괜찮아?"

  문 저편으로 화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
  "...미안해, 저기...그렇게 화낼 줄은 몰랐어."
  "...꺼져."
  "나 서클 같은 거 가입 안 해도 되니까...."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가장 만만하고도 유일한 상대. 끊임없이 응석을 부리고 싶어지는 대상.
  정상적인 세상을 상징하는 친구. 그래서 지금은 꼬이고 비틀린 응답밖에는 해 줄 수가 없는.

  "가-그는 너랑 있고 싶지 않아! 가!"

  천천히 화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카미유는 손톱 끝을 꽉 깨물었다.
  혼란스러운 자신의 정신이 '나'와 '그'마저 혼동하고 있다는 것도, 그 혼란이 자신의 자폐 증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도, 화가 가버린 것이 자신의 거친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 혼동 때문에 당황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모른 채로.

                                                  *                                   *

  목요일에 양호실에서 나온 카미유는 다시 한번 망설였다.
  이번 목요일은 아버지가 쉬는 날이었기 때문에 집으로 바로 갈 수 없다. 길거리에서 헤메느니 오락실에 가서 새로 나온 MS 대전 게임이라도 해 볼까 하고 궁리를 하며 복도를 지나가던 카미유는 복도 끝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끝난 거니?"

  열려 있는 현관에서 새어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형태 외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애써 다정하게 가다듬은 흔적이 남아있는 그 목소리는 분명히 생활지도 선생의 것이었다. 카미유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킨 채 멈춰 있었다.
  인사를 할까? 무시할까? 아니면 욕이라도 내뱉어 볼까?
  그가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생활지도 선생은 천천히 그에게로 발을 옮겼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우는 것 같기는 했지만 얼굴을 당당하게 마주 보고 그것을 확인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가슴이 주체못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얘기를 좀 했으면 좋겠구나."
  - 웃기지 마!

  마음속의 외침은 역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머리 속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하며 그가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 현관 앞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미유! 거기서 뭘 하는 거야!"
  "...?"

  생활지도 선생이 그 목소리에 멈칫 하는 사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재빠르게 카미유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나꿔챈 뒤 그를 끌고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선생이 말리려는 듯 손을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저, 카미유군!"
  "나랑 서클에 가입하기로 했잖아! 바보! 늦기 전에 가자!"
  "...화?"

  현관을 나서자마자 짜릿한 햇빛이 전신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카미유는 뻣뻣하게 긴장해 있던 어깨를 조금씩 풀면서, 자신을 거의 반 강제로 끌고 가는 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승리의 미소도,  곤란한 누군가를 구해줬다는 자부심도 거의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 그로서는 조금 놀라웠다.

  "저 사람이랑 얘기하기 싫었지? 그렇지?"
  "그랬어."
  "응. 그런 것 같았어."
  "...."

  카미유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화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사정을 대충이라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무심한 척 해 주는 것은 그 자신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배려에 대한 감사를 표시할 필요조차 없도록 해 주는 마음씀이가 카미유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화는 몇 걸음 더 옮긴 뒤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 어쩔 거야?"
  "어쩔...."

  다시 한 번 화의 말을 따라 하던 카미유의 목소리를 화가 냅다 끊었다.

  "바보같이! 남의 말 따라만 하는 버릇 좀 고쳐!"
  "아."

  카미유는 입을 다물었다.

  - 정말이지, 조금도 부드럽질 않아.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던가 하고 카미유가 갈등에 빠져 있는데 화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쨌거나 카미유, 서클 나랑 가입하는 거다? 사촌오빠를 데리고 간다고 해 뒀단 말야."
  "...내,가 사촌오빠라고?"
  "그럼 어때서?"

  화의 검고 맑은 눈동자가 카미유의 것과 마주쳤다. 그가 억지로 '나'라는 말을 꺼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을 알아차린 듯한 눈동자였다.

  "애인도 아닌데, 오빠 좀 해 주면 안돼?"

  그 순간, 햇살이 화의 눈에서 보인 듯도 했다.
  아마도 그것은 화가 해를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순간, 눈이 아리도록 따가운 햇살이 마음의 상처를 받아주기는 해도 결코 사라지게 할 수 없었던 안온한 양호실의 빛보다 훨씬 절실하게 카미유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 조금도 편하질 않아.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라는 면에서는 헬멧 속의 가공된 안온함보다도 나을는지 모른다.
  화는 그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졌다.

  "좋아, 가자."
  "고마워~!"

  남의 연애사 따위 이젠 몰라. 남들이 알아서 하라지.

2009/02/10 15:39 2009/02/10 1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