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風梅花', '꽃이 내리는 밤'과 간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왕의 몸은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무게를 온전히 지고 있다 한다. 그렇다고 왕이 씨름선수처럼 몸을 키워 무슨 거대 코끼리인 양 바닥에 발자국을 쿵쿵 찍어 누르며 다닌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나라의 무게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왕의 몸집이나 키는 그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왕을 모시는 이들에게 그 무게는 천근의 쇠뭉치보다도 무거웠다. 궁의 공기 속에 항시 떠도는 그 무게는 흐르는 안개처럼 차마 손으로 잡을 수는 없을지언정 피부를 통해 바로 느껴졌고, 때로는 호흡처럼 코로 들이마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 궁 안을 떠돌던 무게가 엊그제부터 확 덜어졌다. 비록 쉬쉬하고는 있다지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궁 안에서 지내는 대부분의 이들에게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물며 왕이 계신 곳의 잡스러운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내전 궁녀들의 경우에는 지금 궁 안에 왕이 계신가 안 계신가를 누군가에게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하여 마치 납시어 주무실 왕이 곧 왕림하실 듯 호청이며 베갯잇을 여민다 해도 이런 날이면 은근한 마지막 손길 한 번이 덜 가게 마련. 보통의 경우라면 오늘의 침소 단장은 벌써 끝났으리라. 지금쯤은 휘영청 보름 달 밤에 드물게 생긴 여유를 어찌 보낼까 즐겁게 궁리하며 삼삼오오 흩어져야 마땅하였을 터다.
  그러나 내전 앞에 열을 지어 서있는 시녀들의 얼굴에는 즐거움 비슷한 것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심지어 얼굴이 퍼렇게 질려 있는 시녀들도 꽤나 있었다. 지엄한 왕명으로 국내에서의 복례를 금지하고 있기에 차마 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빌지는 못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부복이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모두의 표정에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여사 쇼케이는 수시로 잘 웃고 시녀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나 그녀의 칼날 같은 시선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이는 화낼 때의 그녀만큼 건드리고 싶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되곤 했다. 오죽하면 쇼케이가 진짜로 화를 내기 시작하면 경왕조차도 수습을 기린에게 넘기고 도망간다는 소문이 돌 정도겠는가.

  “뭐라고들 지껄였는지 내 앞에서 다시 말해 보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맨 앞에서 추궁을 받고 있는 시녀 두엇은 거의 울 듯 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사과를 주워섬기기만 하고 있었다.

  “내전의 기강이 얼마나 해이해졌으면 감히 너희 주제에 왕과 기린의 사이가 어쩌니 하는 얘기를 함부로 주워섬겨! 그 잘난 입 다시 한 번 놀려보라는데 차마 그건 또 못하시겠다는 거냐!”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이 머저리 같은 계집들! 즉위 십 년에 이제 겨우 회달이라는 얘기가 들어갈까 말까 하는데! 왕께서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번연히 보면서 잘도 아무 생각 없이...!”

  화를 못 이겨 더 이상 말을 찾지 못하고 씩씩대며 숨을 고르고 있는 쇼케이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시녀들은 급기야 발 아래로 굵은 눈물을 떨구기 시작하였다. 있는 대로 경을 칠 생각이었건만 막상 흑흑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그만 마음이 약해져 버려, 열화를 못 참고 내전을 쩌렁하게 울리던 쇼케이는 짐짓 그들의 눈물을 못 본 척 애꿎은 달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이나 푹 하고 쉬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이들이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 보기는 어려웠다. 그저 주변에 돌고 있는 소문을 가벼이 입에 담았을 뿐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지각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야단을 치는 것도 그간 경왕이 이끌어 온 내전의 법도와는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내전의 살림을 도맡아온 사람이 쇼케이보다는 오히려 스즈 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군다나 자신이 이렇게까지 난리를 칠 이유는 없다 봐야 할 것이다. 잠행을 나가고 없는 경왕이 돌아오고 나면 오히려 자신을 다소 힐책할는지도.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떠벌리고 있던 소문의 내용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릴지도 모르는 뜬소문을 내전 궁녀들이 앞서서 입에 담아? 한갓 궁녀라고는 해도 왕과 함께 나랏일을 돕는 위치에 있는 신선들이 고작 십 년의 안정에 이렇게나 빨리 긴장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정신 나간 것들.

  “앞으로 궁에서 그런 얘기를 입에 담는 일이 또 있으면 내가 직접 그자의 입을 찢어놓을 줄 알아!”

  쇼케이의 날선 목소리에 궁녀들은 지레 겁을 먹고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그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아...!”

  뒷길을 통해 모습을 나타낸 이는 금발 청년의 모습을 한 이 나라의 기(麒) 케이키였다. 자비의 생물인 기린이 등장하였으니 이제 큰 경을 칠 일은 덜었다 생각하였는지 궁녀들의 표정에는 다소간 안도의 기색이 엿보였으나, 쇼케이는 그마저 마음에 들지를 않아 케이키에게 불편한 목소리로 퉁을 놓았다.

  “내전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그저 와 본 것뿐입니다만.”
  “자비의 기린께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들끼리의 일입니다. 괘념치 마시지요.”
  “그러려 했습니다만 너무 소리가 높으셔서요. 저는 그저 달을 보려 했을 뿐인데 여사의 목소리가 내전 지붕까지 들리더란 말입니다.”

  쇼케이는 단속을 하려 했던 일이 자신 때문에 오히려 주변으로 더 퍼졌을까 싶어 순간적으로 확 얼굴이 붉어졌다. 내전 지붕까지 들렸다면 경계를 지키는 경비병에게 안 들렸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혹 누군가가 이 일을 노사나 영주 중 누군가에게 보고라도 한다면? 오, 천제시여. 어쩌자고 저에게 이런 새된 목소리를 주셨나이까. 뾰루지 긁다 부스럼 만들겠나이다.

  “그, 그렇게까지 잘 들렸습니까?”
  “내용까지는 그다지 안 들렸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게다가 전 제법 좋은 귀를 갖고 있지요.”
  “아 그렇지요. 기린께서는....”

  인간이 아니니까. 쇼케이는 지나치게 흥분한 자신을 새삼 깨닫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린을 노려보았다. 아마도 그는 소리가 주위로 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러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의표를 찌른 것이리라. 진정하는 것이 좋다고는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나 단단히 야단을 칠 기회를 놓치도록 한 것이 얼마쯤은 야속하였다. 케이키의 눈초리에는 분명 약간의 웃음기가 숨어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어인 일입니까. 늦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분들을 모아 두시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기린께서는 아실만한 일이 아닙니다.”
  “안 들렸다면 모르되 기왕 여기까지 오게 하셨으니 알려 주세요. 자, 무슨 말씀을 나누셨기에 여사께서 저리 화를 내십니까?”

  케이키의 질문은 쇼케이의 앞에서 울며 서 있던 궁녀를 향했다. 그러나 기린의 등장 이래 저으기 안심하던 표정의 궁녀는 그 질문을 받자 아까보다도 훨씬 더 퍼렇게 질린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죄, 죄송합니다! 그러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제발 말씀드리지 않게 허락해 주소서!”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케이키를 향해 쇼케이도 열을 내서 궁녀의 역성을 들기 시작했다.

  “그저 분수에 어긋나는 잘못을 저지른 것뿐입니다. 들으실 만한 일이 아니시라 했잖습니까.”
  “죄송합니다! 일각이라도 왕께 누를 끼치려고 한 일이 아닙니다! 부디...!”
  “뭐라 하셨습니까.”

  기린의 눈가에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지는 것을 보며 쇼케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함부로 소문을 주워섬기는 품새가 어리석다 했더니 심지어 사죄를 하는 것도 저리 아둔하단 말인가. 왕과 기린은 반신의 관계였다. 이 세상에서 기린에게 가장 중한 것은 기린 스스로가 아니라 왕이어서, 세계를 향한 기린의 자비를 거두게 할 수 있는 존재는 그 기린이 섬기고 있는 왕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저것이 딴에는 용서를 구한다면서 함부로 왕을 거론하다니. 문자 그대로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꼴이 아닌가.

  “방금, 왕께 누를 끼친다 하셨습니까.”
  “아아...!”

  궁녀는 실수를 깨닫고는 무릎에 힘이 빠진 듯 급기야 땅 위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상했는지 케이키는 짧은 한숨을 쉰 다음 옆에서 후들후들 떨며 서 있는 다른 궁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제 저 분께 여쭙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저는 들어야겠습니다. 무슨 얘기였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가, 감히 이런 말을...면전에서....”
  “면전이든 아니든 이미 한 번 하신 것 아니십니까. 어서요.”
  “그, 그러니까...그런...그게....”

  말을 잇지 못한 채 한참을 더듬거리던 궁녀는 결국 대답을 하며 시선을 발 아래로 내리고 말았다.

  “왕께서...사가(私家)의 남자 때문에...기린을 멀리 하신다고...그래서, 두 분 사이가...전과 다른....”
  “네에?”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무슨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케이키가 궁녀의 말에 입을 떡하니 벌리자 그 궁녀 역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빌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쇼케이는 뒷머리가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왕이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나서 케이키와 사이가 멀어졌다던가 하는 건 단순한 소문을 넘어 왕의 지위마저도 위협할 수도 있는 문제다. 사사로운 감정에 빠져 나라와 스스로를 놓은 선대 여왕의 뒤를 이어 현 경왕이 갓 등극했을 무렵에는, 경의 백성들조차 신왕의 등극이 얼마나 갈 것인지를 미심쩍어 하고 있었다. 왕을 믿지 않는 백성을 이끄느라 경왕이 겪어낸 고생은 당연히 필설로 형용된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안이했던 관리 조직을 뒤엎어 공과에 따라 재배치하는 와중에도 세금을 절반이나 감면하자 당장 부족한 자금은 궁 안의 것으로 보충해야 했다. 고운 정자는 부수어 집을 짓는 재목으로 삼았고 큰 돌은 부수어 농가의 머릿돌로 보냈으며, 귀금속은 물론 번듯하나 별 쓸모는 없는 기명과 꽃나무를 싹 팔아치운 덕분에 내궁이 허해마냥 휑해졌지만 왕은 괘념치 않았다. 열과 성의를 다한 지 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다른 나라로 떠났던 이들이 돌아올 만큼의 나라꼴을 겨우 갖추게 된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여자가 다스리는 경국에는 여전히 음해며 의심이 끝도 없는 이어지는 중. 한 점 먼지라도 못 털어 안달인 이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역시나 여자는 안 된다던가,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의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부족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라도 하면 어찌 되겠는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소문이 사가의 백성에게까지 퍼지게 되면 꽤나 고약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궁 안의 이들이 생각 없이 입에 담고 있다니.
  경왕이 최근 잠행을 더욱 자주 다닌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몇 년씩이나 정무에 모습을 안 나타내기도 했다는 연국의 왕 같은 경우는 둘째치고라도, 태과로서 먼 바다 건너 봉래에서 자란 경왕에게 있어 나라의 숨은 사정을 파악하는 데 잠행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쇼케이가 여사가 되기 전, 경왕을 처음 만났던 것도 그녀가 초칙을 발표하기 전 도망치듯 궁에서 빠져나와 나라 안을 떠돌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왕의 행동을 두고 이제 와 새삼 이런 소문이 만들어지는 것이 그녀는 분했다.
  정말이지 민심이란 알게 모르게 예리하다고 하여야 할까.

  “아마도 다소 지나친 말장난을 치셨던 게로군요.”

  생각에 빠져 있던 쇼케이는 느닷없이 들린 케이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왕께서 지금 궁을 떠나 계신 것은 사실이지만, 아시다시피 그 모든 일이 경을 위한 것입니다.”

  기린의 얼굴에는 감히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형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가 죽어 질린 얼굴로 눈물이나 흘리던 시녀들이 그 얼굴을 보고는 무심결에 따라 웃었고, 숨길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며 발을 구르던 쇼케이마저 한순간 울화를 잊었을 정도였다. 사람만이 아니었다. 궁 안의 모든 초목과 동물이 함께 웃었다. 세계가 그들의 기린을 따라 미소 짓고 있었다.

  “잠시 떨어져 계시다고 해도 왕께서는 늘 저와 같은 마음이시지요.”

  그들 모두는 깨달았다. 저것이 바로 기린의 진심이라는 것을. 자신들이 재미로 여겨 입에 올렸던 소문이 얼마나 삿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는지도.
  왕은 분명 경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신 것이었다. 언제나 남자의 복장을 하시는 것은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쏟지 않겠다는 의지 아니셨던가. 재위 초에 팔아치웠던 장신구 중 단 하나도 다시 사들이시는 것을 본 적 없었다. 한참을 어렵게 지내시던 때에는 기왕지사 영원한 생명을 받아 죽지는 않는 몸, 수라조차 안 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 하셨더랬다. 기린께서 저리도 믿고 계시는 왕을 감히 우리가 의심하다니. 저리 웃는 그들의 기린을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개중에는 감동으로 또 다시 눈물을 글썽이는 이도 있었다.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용서해주소서!”

  그러나 쇼케이는 궁녀들의 열띤 반응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직접 해결을 못 본 것이 서운하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속을 편치 못하게 하는 것은 환하게 웃고 있는 기린의 얼굴 한 켠에 걸린 서늘함 때문이었다. 그 자리의 다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만큼, 그리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늘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그저 한 자락의 예리한 서늘함. 거북하면서도 어디에선가 본 듯도 한 미묘한 익숙함. 그녀는 손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저 표정을 어디서 보았더라.
  다들 알아들었으면 되었다 싶어 모두를 제 방으로 돌려보는 와중에도, 그녀는 흩어져 가는 이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케이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까 보았던 서늘함은 나타났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지만, 혹시라도 그 표정이 나타난다면 어디서 보았던 것인지를 기억해 낼까 싶어서였다. 예전 방극국의 공주였던 그녀지만 기린의 표정을 읽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주라고 해도 그 당시 나라와는 담을 쌓고 지낸 탓에 보았던 기린이라고는 고작해야 예전의 호우린과 지금의 케이키 뿐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방극국의 가왕인 혜주후는 그녀의 부왕과 모후, 호우린의 목을 친 뒤 자신을 먼 나라로 쫒아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아, 가급적 자신의 생국과 연관되는 일은 피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쓰려왔다. 그 호우린은 두 번이나 왕을 잘못 택한 죄를 입어 목을 베여 죽었다. 호우린. 케이키. 설마.

  “그럼 저도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저...!”
  “네?”

  쇼케이는 스스로 생각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서는 케이키를 붙들었다.

  “기왕지사 달을 보실 생각이셨다면, 함께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갓 떠오르던 달은 어느 새 구름 위로 선뜻 솟아올라 꽉 찬 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                                          *

  따라나서기는 했으되 어찌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다. 십 년을 같은 곳에서 지냈다지만 마땅한 일 없이 기린과 단 둘이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도 사실. 경치나 보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잠이나 한 숨 더 자고 말겠다며 경왕의 초대도 곧잘 거절해버리곤 했던 쇼케이로서는 사정이 더욱 그러했다. 물론 그녀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이런 속담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궁 안은 넓고 서류는 많다.
  응준궁에서 공주로 편히 놀며 지내던 시절에도 한량하게 다니기보다는 이것저것 사들이기에 바빴던 그녀였다. 쫓겨난 이후에는 살아남기에 바빴고 금파궁에 들어온 이후에는 일로 바빴다. 바쁘지 않은 시간에는 뭘 하면 좋은지 통 알지 못했다. 그리하며 전망이 좋은 복도 난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도, 가만히 달을 보며 생각이 잠긴 케이키 옆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좌불안석이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하나. 이럴 때는 보통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예의던가?

  “춥지는 않으십니까.”
  “아, 네? 네. 괘, 괜찮습니다.”
  “달을 보시는 취미가 있으셨던 줄은 몰랐습니다만.”
  “네에, 네. 저도 처음인데...아니 그냥...오늘은 보름달이 대단해서요.”
  “그렇군요.”

  허겁지겁 대답을 주워섬긴 뒤, 쇼케이는 시선을 다시 달로 돌린 기린의 옆얼굴을 은근히 훔쳐보았다. 기대앉은 품새가 조용하기 이를 데 없어 그녀는 성급하게 여기까지 따라온 스스로가 좀 바보스럽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쓸 데 없는 근심 때문에 기린이 갖는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싶은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 때만큼은 정말로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행여나 케이키의 얼굴에 보였던 그 서늘함은, 호우린의 얼굴에서 보았던 게 아닐까 하고.
  정말로 경왕과 케이키의 사이가 멀어졌을까? 나라를 다스림에 소홀해 진 것인가?
  최근 보름쯤마다 경왕이 궁을 비웠다는 것 정도는 쇼케이도 알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잠행이었다. 그쯤이야 궁 안의 누구든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린이나 힌만조차도 둔 채 온전히 홀로 가는 잠행의 이유를 놓고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였다. 어딘가의 관리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던가, 타국의 신기술을 배워 오는 것이라던가, 허해에서 기린을 대신해 타고 다닐 요수를 길들이고 있다던가, 심지어는 사가의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던가. 어지간해서는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드물게는 달마다 봉래를 다녀오는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알리지 않고 가는 것이 잠행인지라 감히 용무를 왕께 물으려 하는 자는 없었다. 급기야는 답답함을 못 이겨 사정을 알 만한 태사에게 이유를 물어본 사람도 있었으나, 의외로 태사는 다음 달 보름엔 나가시지 않을 거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대답으로 여럿의 질문을 회피했다.
  그래서 지난 밤, 결국 쇼케이는 왕의 침소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요우시, 내일도 사가로 내려가?
  - 아, 쇼케이구나. 그럴 생각이야.

  그녀는 이름으로 왕을 부르는 것이 허락된 얼마 안 되는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공식적으로는 그럴 수 없었지만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그저 친구로서 자유롭게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경왕은 말했다. 그 편이 더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럴 수 있을 때는 돌려 말하지 않는 편을 선호했다. 그 점만큼은 쇼케이와도 성격이 맞는 부분이라 그녀는 과감하게 잡설은 모두 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혹시, 연왕을 만나러 가는 거니?

  그리고 드물게도, 요우시는 그 질문에 한동안이나 대답이 없었다.
  즉위 때부터 많은 폐를 끼쳤다고 했다. 잠행을 나갈 때 종종 만난다는 것을 케이키로부터 들은 적도 있었다. 그동안은 오백 년이나 한 나라를 올곧게 다스려 온 타국의 왕이 사심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날인가 엔키가 급히 찾아와 건넨 편지 한 장에 크게 흔들리는 경왕의 눈빛을 보고 쇼케이는 약간의 의심을 품었다. 부르면 목소리가 바로 들릴 정도의 지척에 있었건만 그 편지는 자신에게 건네지지 않았다. 바로 답을 할 정도라면 무언가 급한 일이었을 텐데 내용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경왕은 그날, 무엇에 정신을 빼놓은 것인지 자신이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의심하는 것조차 삿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은 인간이다. 인간 중에서만 뽑게 되어 있었다. 오백 년의 치세가 그의 강인함을 입증할지는 몰라도 이제 남은 것은 그의 내리막길일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감히 가능한 것은 쇼케이가 공주로서 그녀의 아버지인 왕이 길을 잃는 것을 곁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녀가 공주로 있을 때는 왕의 도리라던가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 없이 안락한 응준궁의 생활을 즐기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왕이 되자 부왕이 처음 했던 일은 도리를 위해 흐트러져 있던 칙령들을 정비하는 것이라 하였다. 엉성했던 궁의 체계가 확고하게 잡혀나가는 것을 호우린은 기뻐했다. 아버지와 기린이 함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금세 깔끔하고 정결해졌다. 항시 웃음꽃이 피었다고는 못할지언정 서로가 서로를 기꺼워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했다.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나면 조금쯤 줄어들 거라 여겼던 회의는 몇 년이 지나도 끝이 없었다. 아버지는 연이은 노고에 지쳐 말을 잃었으나 회의를 줄이려고는 하지 않았다. 좀 쉬시라며 모후가 애써 말려 보아도 회의 하나가 끝나고 나면 호우린과 함께 다시 다음 회의 일정을 짰다. 그 둘은 항상 함께 있었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들 사이가 도저히 뗄 수 없는 것이 되자 모후는 소박맞은 아내가 되었다. 왕과 기린의 관계를 모후가 질투하고 있다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어머니와 딸은 급기야 사치에 몰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쁜 보석과 아름다운 옷감으로 몸을 감싸는 것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익숙해지자 그만한 열락이 또 있으랴 싶었다. 왕이 있어 나라의 형편이 나아지고 있으니 이만한 일이야 뭐 별것이겠는가 하고 모녀는 금침 위에 옥비녀며 갑사 노리개를 늘어놓고 웃곤 했다. 물론 호우린은 이를 싫어했다. 그러나 그녀가 뭐라 말을 하면, 이번에는 아버지가 나서서 기린을 비난했다. 왕과 기린 사이의 문제만 없다면 고작 옷 몇 벌 가지고 왕의 가족을 힐책할 것이 뭐 있느냐고.
  결국 호우린은 부왕만큼이나 말수가 줄었고 화색이 돌던 얼굴에 점점 그늘이 졌다. 혜주후가 나서서 왕궁을 토벌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아마도 곧 실도의 병에 걸렸으리라. 아니, 어쩌면 이미 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과의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고통을 입 밖에 내지 못한 것일지도.
  케이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서늘함은 그러한 그늘의 전조일까?

  “말씀하십시오.”
  “네?”
  “평소 이런 종류의 도락을 즐기지 않으신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무언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셔서 여기까지 오셨겠지요.”
  “...네에.”
  “험한 얘기라도 함부로 왕께 고하거나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런 게 아닙니다! 기린께선 혹시 요우시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가요?”
  “잠행가신 곳 말씀이십니까?”
  “네, 하필이면 왜 또 연국으로만 가는 것인지...!”

  쇼케이는 순간 열이 치밀어 함부로 왕의 이름을 끄집어내며 울컥 말을 뱉고 나서야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케이키는 그 말에도 그저 담담한 채 뜬금없이 다른 말을 꺼내었다.

  “기린은 왕의 반신이라고들 하지요.”
  “네에? 네. 그런데 지금 왜 그것을....”
  “그런데 왜 왕이 죽어도 기린은 죽지 않는 것일까요.”

  쇼케이는 순간 선뜩해져서 자세를 바로 잡고 케이키를 보았다. 그것은 이미 한 번 왕을 잃어본 기린의 말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왜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다른 왕을 다시 골라야 하는지를 곰씹고 또 곰씹었을 터다. 위왕에게 갇혀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고 들었다. 생사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은 넘치도록 충분했을 것이다. 결코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음색이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왕이 죽어도 기린이 죽지 않는 것은 나머지 반이 나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린의 반은 나라입니다. 반면에 왕은 반을 기린과 나누고 나머지 반은 천명입니다. 그런데 기린을 잃으면 천명도 잃는 것이지요. 그래서 왕은 기린이 죽으면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다시 한 번 왕을 택하면서, 가장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 말을 하는 케이키의 얼굴은 무섭도록 처연하였다.

  “왕께서 절대로 제게 홀리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선대의 여왕은 케이키와 늘 함께이고 싶어 왕위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왕이 되고 난 뒤에도 나라보다는 케이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케이키가 나라에 더 힘을 쓰시라 직언하면 이번에는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좋다며 이를 뿌리쳤다. 급기야 케이키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조차 볼 수 없어 나라 안의 모든 여자를 타국으로 추방하려고 시도했다.
  항상 함께하는 것이 왕과 기린 상호간의 기쁨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것이 왕과 기린의 천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로에게 홀려 버려서야 나라가 돌아가지를 않는다. 또한 쇼케이도 그랬듯이, 왕 중에는 가족이 있는 경우도 많았고 결혼한 이가 왕으로 택해지는 경우에는 가족도 함께 등선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행여 왕이 기린과 다른 이 사이에서 함께 있을 이를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바른 왕과 기린의 관계인가. 붙어있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었다. 답은 어디에 있는가. 옳은 길이란 어떤 것인가.
  케이키는 진지해진 그녀의 낯으로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이번에는 살짝 웃으며 말을 던졌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왕께서 연왕께 마음을 주시고 계신 것은.”
  “아! 어떻게....”
  “저는 왕의 반신이니까요. 어심(御心)께서 가시는 곳을 제가 모를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러셨군요.”

  차마 말을 못 해 망설이던 스스로가 어이없는 나머지 쇼케이의 몸에서는 힘이 죽 빠져나갔다. 케이키에게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걸터앉았던 난간을 꼭 그러쥐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행이도 그는 눈치 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바랐던 바로 그대로의 일일지도 모릅니다. 기린은 민심을 받들어 왕을 선택한다고 하니, 그것은 저 자신의 소망이자 경의 민의였을 수도 있겠지요. 그분은 경을 버리거나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은 그저 그분 자신의 천명을 따르고 계신 것입니다.”

  케이키의 낯빛에 다시 한 번 아까 보았던 서늘함이 나타났다. 쇼케이는 그제야 그 표정을 또 어디에서 보았는지를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그것은 이미 죽은 호우린이나 부왕에게서 본 것이 아니었다. 길을 잃어 사라진 이들과는 티끌만큼의 관계도 없었다.
  그것은, 한참 동안 뜸을 들인 후에야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던 경왕의 얼굴에서 보았던 것이었다.

  - 아마도 못 만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대답으로, 내가 쇼케이를 안심시킬 수도 있겠지.

  그 음성에는 일말의 모호함도 없었다. 시간을 끌었던 것은 단지 설명을 가다듬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쇼케이는 바로 알았다.

  -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아. 그래, 난 연왕을 만나기를 바라고 있어.

  분명 평소와는 다른 여자로서의 무언가가 그녀의 태도에 깃들어 있었음에도 쇼케이가 그녀를 말리지 못한 것은, 바로 얼굴에 나타났던 바로 그 서늘함 때문이지 않았나. 그것은 심장을 잠식하는 어둠이 아니었다. 올곧은 마음으로 진지하게 자신만의 선택을 한 이의 표정이었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답을 찾아 홀로 길을 걷는 자의 얼굴. 반신이 있을지언정 기대지는 않겠다고 결정한 왕의 눈빛.
  바로 그 결심이 경왕을 선대의 여왕과 다른 왕으로 만듦과 동시에, 케이키를 그녀의 반신으로 묶고 있는 것이었다. 직접 보고서도 스스로의 과거에 파묻혀 요우시의 그 낯 하나 기억해내지 못하다니, 여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 행여나 이 나라의 갈 길이 멀다 하면 왕이나 기린 탓이 아니라 바로 이 나 때문이겠다. 그녀는 쓰게 웃으며 허어 하며 소리를 내어버렸다.

  “요우시는 진실로 경의 민의를 받은 왕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전 그분이 저의 왕이라는 사실이 종종 과분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케이키의 얼굴은 평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쇼케이는 문득 호승심이 일어, 일단 트집을 잡고 보았다.

  “반신이니 왕과는 동급이신 거 아니신가요?”
  “설마요. 전 그분의 발치를 뒤쫓기도 힘들 지경입니다만.”
  “제 친구라지만, 저도 요우시를 따라잡기 좀 힘들기는 하네요.”
  “그럼 여사께선 저와 동지가 되겠군요.”
  “그렇지요.”

  한 신선과 한 기린은 그렇게 설익은 농을 나누며 제대로 달맞이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만월의 달은 빠르게도 달려 벌써 밤을 반이나 지나도록 하고 있었다.

2010/06/09 10:55 2010/06/09 10:55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KIMSU 2010/06/27 05:0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음... 아머지? 아버지 + 어머니?

    12국기... 한번 보긴 해야 할텐데... 이상하게 손에 닿지를 않는듯...

    빌리도...

    • Amille 2010/06/30 08:47  address  modify / delete

      아 오타; 수정했습니다.
      사실 저도 십이국기 책은 없어요....;;; 팬픽은 치는데 팬의 소양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