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의 오전

from Fanfic/Gundam 2009/06/30 13:03

  어떤 것보다 그대의 마음을 다스릴지어다.
  이젠 달리는 것도 그만두었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의 등쌀에 못이긴 입술은 가뭄 난 논처럼 쩍쩍 갈라져 있고 머리는 미친년 산발. 아침도 못 먹은 채로 두 시간 삼십 분 만에 5층짜리 종합병동 전 구역을 일주하는 기염을 토해냈으니 무리도 아니다. 슬슬 좀 진정하고 정신을 차리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몰골로 병동 안을 계속 돌아다니는 건 환자에게나 다른 의료진들에게나 민폐라는 걸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어차피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속이 뒤집어질 때까지 곳곳을 뛰어다닌다 해서 찾아지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매번 조바심이 나는 것인지.
  이제 겨우 제 한 몸 정도 추스를 체력으로는 큰 사고를 치지도 못하리라. 설령 뭔가 일을 낸다 해도 여기는 병원. 간호사들이며 조무사들과 다들 안면 트고 지내는 처지이니 누군가 도와주지 않을 리도 없다. 물론 회진이 막 지나간 방에서 혼자 넘어져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렇게 되면 최소 다섯 시간은 그 상태 그대로 방치될 테니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아아, 어쩌지? 지금 회진이 돌고 있는 곳은 어디지? 그 중에 환자수가 제일 적은 병실은 어디지? 로라에게 연락해야겠어! 허둥지둥 주위의 내선전화를 향해 달려가 버튼을 눌러대던 그녀는 스스로의 부산함이 다시 부활했음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다시 수화기를 내렸다.
  그 무엇보다 그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지어다....
  열여덟 살의 간호조무사 화 유이리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경구를 중얼거리며 머리를 다시 쓸어 넘겼다. 언제나 그렇듯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돌덩이 같은 심화가 가슴에 꼭 들어차 있는 것은 온전히 나 혼자 걱정이 지나친 때문. 찾고 나면 금세 사라지고 마는 근심에 마음을 홀랑 넘겨주어서는 안 돼. 그러나 숨을 가다듬으며 푹 내쉬는 한숨 끝에는 어쩔 수 없이 원망이 흘러나왔다.

  “카미유 비단, 이 바보 같으니!”

  지구로 내려와 더블린의 병원에 겨우겨우 자리를 얻은 뒤, 전쟁 탓에 정신을 놓은 소꿉친구를 입원시키고 침대머리를 지킨 지도 벌써 두 달째. 처음 왔을 무렵의 그는 계속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말은커녕 밥도 자기 손으로 먹지를 못 했다. 때가 되면 아기들이나 먹는 유동식을 먹이고, 모자라는 영양소를 채워줄 약을 주사하고, 근육에 힘이 떨어지지 않도록 운동을 시키고, 욕창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몇 시간마다 자세를 고쳐 주는 것은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 일이 자신의 몫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고맙게도 그와 그녀가 함께 몸담았던 비정규 전투조직 에우고는 용케도 연방군 조직으로 편입되는 데 성공하여, 치료비 외에도 꽤 도움이 될 만큼의 연금이 두 사람 몫으로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덕분에 근무시간을 조금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자 사정은 더 좋아지는가 싶었다. 심지어 몇 주 상간으로는 그가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여전히 밥은 떠먹여야 하지만 조금씩 씹을 수도 있게 되었고,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걷기도 했다. 분명한 진단도 없이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이라는 병명 하나에 의존하여 장님 코끼리 만지듯 진행되던 치료가 효과를 보이는 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먹이고 씻기고 돌보며 소중히 여기던 마음에 보답이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하지만 문제는 걸을 수 있게 되고부터 그가 말없이 사라지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침대 옆에서 병실 문 밖으로, 문 밖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병동 밖으로 나가는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화 씨 전담 환자 또 없어졌어!”
  “뭐? 이번엔 어디로 갔는데? 본 사람 있어?”
  “글쎄, 내가 아나.”

  이런 레퍼토리가 반복된 것만도 벌써 수십 번.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가 움직이는 거리에 비례하여 늘어만 갔다. 시작은 십 분, 그 다음에는 십오 분, 그리고는 삼십 분. 찾는 시간만도 한 시간을 넘기게 되자 찾으면 바로 태워오기 위해 힘들여 끌고 다니던 휠체어도 병실에 그냥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번도 위험한 상황에서 발견된 적은 없다는 것이었다. 대개는 어딘가에서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약국 앞 의자나 채혈 대기실, 응급실 구석이나 인턴용 휴게실 등에서 무시로 발견되었다. 찾아내기 전에 다른 이가 연락을 주는 경우도 왕왕 있었고 여기저기를 헤매던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방으로 돌아와 있던 적도 있었다. 항상 그랬다. 그러니 걱정할 만한 일이 일어날 확률은 높지 않다. 무엇보다 마음을 다스리라 하지 않았나. 화는 과부하가 걸렸던 심장을 진정시키며 동시에 두뇌 쪽을 회전시키려 기를 썼다.
  이번에는 또 어딜 간 것일까? 사흘 전에는 결국 병원 건물을 나가 공용주차장 겸 직원 테니스장 근처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찾아냈더랬다. 그렇다는 것은 이번에도 건물 안만 훑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이미 안에 있을만한 곳은 거반 다 둘러보았고 사람들에게도 말을 해두었으니, 남은 것은 밖으로 나가보는 것이다. 병원은 출구 이외의 곳으로 나가려고 하면 경보가 울리게 되어 있고, 출구는 얼마 전부터 CCTV로 체크되고 있으니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가 그냥 홀로 나가게 두었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찾을 곳은 기껏해야 주차장, 운동장, 전망대 세 군데. 넓긴 하지만 어차피 휑한 곳이니까 눈으로 훑기만 하면 금방 찾을 수 있다.
  동선을 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주차장에서는 찾지 못했지만 한 번 왔던 곳은 또 오기 싫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의연한 스스로에게 경이로움마저 느끼며 운동장을 지나왔고, 전망대에 도착할 무렵에는 확신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해변을 향하고 있는 벤치에 앉아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같은 상황이 불과 삼십 분 전과 이토록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니 과연,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나.
  화는 무릎에 손을 얹고 정자세로 앉아있는 소꿉친구의 옆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여기 있었어? 카미유?”

  대답은 없었다.

  “계속 찾고 있었잖아.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카미유는 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시선을 딱히 어딘가로 고정하지도 못할 정도의 정신 상태임에도 그는 체력이 있는 한 꼿꼿한 자세만큼은 잘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하긴 어렸을 때 학교 수업에 들어가서도 항상 정좌에 정자세로 무심히 수업 내용을 흘려듣곤 하던 그였다. 마음이 다른 곳을 헤매는 상황이라도 몸은 그 자세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싶어 화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 있다가 해가 뜨면 더워질 텐데, 안 들어갈래?”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끌고 갈 것처럼 팔을 당기자 양 팔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알았어, 싫으면 주사 시간까지는 그냥 여기 있자. 나도 새벽근무 마치고 나오는 길이야. 대신 세수는 해야지?”

  화는 카미유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일회용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과 손을 살살 닦아주기 시작했다. 언제나 표정이 없는 얼굴이지만 그를 이렇게 어린애처럼 다루고 있노라면 조금쯤 떨떠름해하는 기색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세수를 하거나 몸을 닦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어쩌겠는가. 깜박 잊고 체크를 못 해 물 온도가 심하게 안 맞을 때 볼멘소리를 낸 적이 두어 번 있는 것 말고는 그는 꽤 얌전한 환자였다. 기왕이면 혼자서 방을 나가거나 하는 일도 없다면 좀 좋을까. 마지막으로 귀 뒤편을 꼼꼼하게 닦고 있을 무렵 맞은편 긴 벤치에 혼자 앉아 있던 노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말을 걸어 왔다.

  “남편인가요?”
  “아뇨. 저희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언제나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숨김없이 말하자면, 차마 입 밖으로 내어본 적은 없어도 첫 생리가 시작된 이후로 늘 그의 유일한 여자가 되기만을 바래왔다. 그러나 주변으로부터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놀림 받은 적은 많았으되 당당하게 연인이라고 칭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함께 나누었던 시간은 길어 때로는 내 것이 되었다 여겼던 적도 몇 번인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의 마음이 순식간에 그녀를 떠나 다른 물건, 다른 장소, 다른 놀이, 그리고 다른 이를 향해 움직이곤 했던 것을 어쩌랴.

  “그냥 소꿉친구에요. 어릴 때부터 같은 콜로니에 살았는데, 전쟁 통에 저희 둘 다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저런, 그랬구먼. 아가씨가 청년 얼굴 닦아주는 품이 너무 익숙해 보여 내 실수를 했어요. 미안하네요.”
  “아니에요.”

  화는 인사치레로 빛바랜 미소를 띤 채 물수건을 접어 약간 거리가 있는 일반수거용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나이가 한참 젊어 보이니 의사는 아닌 것 같고, 간호사인가 봐요?”
  “아뇨, 사실 대학 문턱에도 못 갔는걸요. 그냥 조무사에요. 사실 조무사 자격 딴 지도 얼마 안 되고요.”
  “그런 것치고는 아주 능숙한데 그래요. 요즘은 경력만 좀 있으면 간호사 자격증 주지 않나? 사람이 달린다던데?”
  “네에, 그래도 이 년은 되어야 하는가 봐요. 전 아직 반년도 안 되거든요.”
  “어이구, 이제 반년도 채 안 된 아가씨가 그리 손이 야무진 거 보니 재능이 있는가 봐요.”
  “안 그래요. 잘 못한다고 얼마나 혼나는데요.”
  “아닐 걸. 아가씨 맨날 바쁘지요? 간호사가 아니라 못 받아 그렇지, 환자들한테 전담 요청 들어오고 그러죠?”
  “여기 와서 서너 번 정도는 있었지만....”
  “거 봐요. 내 눈은 틀림없다니까.”

  화는 노부인의 칭찬에 그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어설프게 웃음을 참기만 했다. 부인의 말은 사실이어서 달리 사양의 말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곳 병원에서 일한 지 몇 주도 안 되어서 그녀는 병원의 간호조무사 중 가장 유망주가 되어 있었다. 물론 어설픈 사무 처리로는 혼날 때가 많았지만 간호 업무에서 그녀의 처치를 트집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병원에 열 명 안짝으로 있는 수간호사들뿐이었다. 덕분에 대개의 조무사는 구경조차 못 하는 큰 수술에도 이미 몇 번이나 들어갔고, 내과 병동 과장이 필요경력의 절반인 일 년만 채우면 특별 추천 채용으로 간호사 자격증을 줄 테니 자기 병동으로 꼭 와야 한다는 흰소리를 한 적도 있었다. 모두가 잘 한다 애쓴다 말은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작전에서는 후방으로만 돌리던 MS파일럿 시절과는 천양지차였다. 그동안은 살아남기 위해 허덕이던 와중이라 전혀 모르고 살았는데, 적성과 재능이란 게 과연 있기는 한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건 타고나는 거더라고요. 우리 막내딸도 아가씨 같았다우. 사람을 잘 돌봤지.”
  “자제분이 많으셨어요?”
  “딸만 넷이에요. 아들이 없어서 남편이 좀 섭섭해 했지만 뭐, 요즘 아들 키워봤자 뭐하겠어요.”
  “네 분이라니 힘드셨겠네요. 무슨 일을 하셨어요?”
  “나야 그냥 집에서 애들 키우며 살림했죠. 남편 직업이 떠돌이라 뭐 일을 할 겨를이 없었거든.”
  “어머.”

  자식을 낳고 키운다는 것이 부의 상징이 된 오늘날에 아이가 넷씩이나! 맞벌이 공무원이라도 가사도우미에 육아도우미까지 쓰는 돈을 생각하면 둘 이상 낳아 기르는 건 모험이라고들 했다. 생전의 아버지는 꽤 높은 지위의 군무원이었는데도 동생 하나만 낳아 달라는 그녀의 투정에는 항상 고개를 가로저었지 않았던가. 부부가 둘 다 대위급인 카미유네 집안 정도가 되지 않으면 둘째는 안 된다고 어머니와 수군거리는 것도 들었다. 외벌이로 아이 넷을 키우다니 어쩌면 생각보다 대단한 집안의 사람인가 하고 화는 노부인을 다시 보았다.
  얼굴로만 보면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뚜렷한 얼굴선이며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데도 선명한 분홍빛 입술을 보면 젊었을 적에는 분명 꽤나 아름다웠을 얼굴이었다. 기껏해야 60을 넘기지 않는 정도? 사고나 전쟁으로 죽는 게 아니라면 대개 100년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요즘의 사정으로 볼 때 겨우 중년을 넘긴 수준이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동양인의 풍모가 좀 느껴지는 것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혼혈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오리엔트의 피는 사람의 나이를 속이기 쉽게 만드니까.

  “그럼 지금 남편분께선....”
  “지금이야 이미 퇴직했지. 오늘은 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주사 맞으러 가있어요.”
  “많이 아프신가요?”
  “우리 남편은 항상 골골 하거든. 매번 보면 그것도 스트레스성이에요. 자질구레하게 앓는 거지 큰 병은 아냐.”
  “다행이네요.”
  “건강이 복이지.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열심히 챙겨야 해요. 그나저나 청년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유?”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이유를 묻는 것으로 보건대 노부인은 화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카미유의 상태를 대충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쟁 때문이라고 하긴 하는데...험한 일을 많이 겪으면 이럴 수도 있대요.”

  화는 흐려진 얼굴로 대답을 웅얼거렸다.
  멜슈트롬이 문제였다. 에우고 수뇌부가 소수의 전력으로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무모한 작전을 세우고 실행한 것부터가 파국의 시작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물며 그들의 적이었던 특수부대 티탄즈가 연방군 연간 예산의 10퍼센트 가까이를 투입해 가며 건조한 콜로니 레이저의 발포권을 빼앗겠다는 계획을 세운 건 정말 지휘부가 미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티탄즈가 연방 내부의 신뢰를 잃고 자멸하는 중이었다고는 해도 그들이 최후의 보루마저 그렇게 쉽게 내줄 리는 없지 않은가.
  반발이 적지는 않았으나 때를 놓칠 수 없다는 명령에 의해 작전은 속행되었고 놀랍게도 작전 자체의 목적을 이루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주적인 티탄즈를 괴멸시키는 데는 성공했을지언정 연방의 전력 공백을 틈탄 네오지온 세력의 지구권 침탈로 이후 에우고 조직은 적대 세력으로 정의하던 연방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에우고 지도부는 핵심 멤버였던 크와트로 대위를 잃었고, 기함 아가마는 늘 함께 다니던 동반함 라디쉬와 그 탑승자들을 모두 잃었다. 그리고 무모한 작전인 것을 알면서도 전쟁을 끝내야 한다며 전력으로 전투를 치러나가던 카미유는 작전의 종료와 함께 그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전투 중에도 그녀는 카미유의 기체가 있는 곳으로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나, 그녀의 MS 역시 대파되어 있었던지라 겨우겨우 통신이 끊어진 그의 기체를 찾았을 때는 이미 정신을 놓고 난 다음이었다. 브리지를 독촉하여 당시의 교전 상황을 수십 번 들어 보아도 사정을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문가인 의사도 특별히 답을 내놓지 못해 첫날에는 콕핏과 노말 슈트의 기압 탓에 산소부족이 생긴 거라 했다가 이튿날에는 혈행 부족으로 국소 부위의 뇌출혈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해버리는 식이었다. 그 어떤 치료에도 적절한 반응이 없자 겨우 나온 결론이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록된 차트를 들고 가도 이 병으로 이런 예후를 보이는 것은 처음이라며 번번이 치료를 거부당하곤 했다. 연방 금지 약물로 한 번 치료를 해보자며 다가오는 돌팔이들도 몇이나 마주쳤다.
  워낙 솔직하지 못해 무섭고 싫어도 입 밖으로 차마 못 내던 성격이었다. 슬프고 괴롭다고 누구에게든 털어놓느니 차라리 제 입을 꿰매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안식을 모르던, 아이 같던 그의 마음이 지금은 또 어디를 헤매고 있을는지. 화는 고개를 돌려 카미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미유는 화의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멍하니 허공을 향해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을 따름이었다.

  “남편이 군인 출신인데, 전쟁통엔 워낙 별별 일이 다 많아 청년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얘기를 해 줍디다. 그래도 금세 낫지 않겠어요? 아직 젊으니.”
  “네에, 점점 낫고 있는 중이에요. 처음에는 그냥 누워만 있었거든요.”
  “아가씨 고생이 말도 못했겠네. 난 남편 다리 부러진 거 시중드는 것만도 진이 다 빠지던데.”
  “어머, 어쩌다 그러셨어요?”
  “몇 달 전 일이에요. 그냥 씻다가 욕조에서 자빠진 것뿐인데도 똑 부러지니 원. 둘 다 일흔이 넘어가니까 병원 신세 질 일이 많이 생긴다우.”
  “네에? 전혀 그렇게 안 보이세요. 예순쯤이신 줄 알고 남편분께서 조기 퇴직이라도 하셨나 했는데.”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노부인은 활짝 웃으며 화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녀의 손등을 부드럽게 톡톡 두드렸다.

  “말을 예쁘게 할 줄 아는 게 정말 우리 막내딸 같네. 그 애가 또 아가씨처럼 얼굴이 딱 동양인이거든.”
  “네에....”
  “참 신기한 게, 제 아버지나 나나 그렇게 오리엔트 티가 나지 않는 편인데 그 애만 그래요. 증조할아버지를 쏙 빼닮았다고 그랬지. 아이코 내가 또 딸 얘기를 꺼냈네. 자랑하고 싶어 그런가 봐. 지겹죠?”

  어차피 나이 들어 할 이야기라고는 과거의 영광 아니면 현재의 자랑거리뿐이다. 알지도 못하는 딸의 이야기에 각별한 호기심이 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 볼을 살짝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노부인의 배려에 화는 일단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보았다.

  “그럴 리가요. 그럼 그분은 의사신가요? 간호사?”
  “아, 아니에요. 우리 막내딸은 군인이라우.”
  “네?”
  “놀랍죠? 우리도 당연히 그 애가 의대를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남들 도와주는 게 좋다고 노래를 불렀거든.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들어오더니 사관학교 지원서를 냈다는 거예요.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인류가 우주로 올라온 이후 대규모 사업의 대부분을 추진하는 군의 위상이 꾸준히 올라갔던 것은 사실이고 더욱이 일년전쟁 이후로는 일반 군인의 사회적 지위까지도 급상승했다. 남자아이들이 어렸을 때 장차 멋진 군인이 되겠다며 가슴을 펴는 일도 가정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폐쇄적인 군인 사회에서 여자의 지위는 여전히 높지 않았다. 그리고 정 군 관계의 일을 원한다면 일단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된 뒤에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굳이 힘이 배로 드는 사관학교 입학으로 군에 자리를 잡으려 한 것일까.

  “안정적인 일을 원하셨나보죠?”
  “여자는 사관학교를 나와도 안정적이지 않다는 거 제 아버지 일하는 거 보면서 빤했을 텐데도 그러더라고. 그래 말리기도 하고 화도 내고, 뭐 하러 적성에도 안 맞는 짓을 부러 하느냐고 심하게 야단을 쳤어요. 그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럽디다. 이제 남들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일에는 질렸다고. 앞으로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어머나....”
  “자기가 좋다는데 어쩌겠어요. 하는 수 없이 보냈지. 애가 그렇게 고집피우는 거 처음이기도 해서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딸내미 소원 하나 못 들어주랴 하고 넘겼다우. 의외로 거기 가서도 적응 잘 하고 성적도 좋아서 우리는 몰랐지만 그 쪽으로 숨겨진 적성이 있는가보다 했지. 졸업하고 몇 년도 안 되어서 남들 못 가는 부대로 조기 전입을 하게 됐다고 그러더라고. 난 몰랐어요.”

  노부인은 무릎에 얹힌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정말 난 몰랐어요. 그 애가 아버지 생각해서 아들 노릇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

  화는 조금씩 흐려지는 노부인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주 나중에야 그걸 알았어요. 아주 나중에...그 아이가 죽은 다음에.”
  “부인.”
  “왜 그걸 몰랐을까 모르겠어요. 진작 알았으면 제 아버지나 나나 그럴 필요 없다고 말을 제대로 했을 건데. 군인 시키게 아들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종종 얘기한 걸 그렇게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정말이지 우리가 왜 몰랐을까요?”
  “부인....”
  “부모가 돼 가지고서는 그 애가 괜히 그럴 애가 아니라는 것도 몰라주다니, 이렇게 형편없는 부모가 또 어디 있겠수. 남들 생각만 하고 살면 안 된다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제 때 하라고 진작 단단히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굵은 눈물 몇 방울이 주름진 눈가를 지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있는 손 위로 투둑 하고 떨어졌다.

  “군인만 안 됐으면 아가씨처럼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난 그냥, 그 애가 행복하게 사는 걸 보고 싶었는데....”

  그 때 떠오르는 해와 함께 시야가 밝아지면서 눈앞의 풍경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잠이 모자라 잠깐 빈혈이 온 것일까? 그러나 주먹으로 두 눈을 비벼보아도 아지랑이처럼 물결치는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화는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러 가며 재빨리 카미유 쪽을 돌아보고, 그가 여전히 거기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이번에는 노부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부인은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탓에 주변의 변화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이윽고 주변에 가득하던 빛이 조금 잦아들자, 이번에는 주변의 경치가 병원 전망대의 그것과는 영 달라졌다. 낡은 건물이 가득한 도시의 전망 대신 앞뒤로 펼쳐진 좁다란 오솔길은 우거진 수풀과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그들 셋이 앉아있는 벤치 주변 이외에는 온통 햇빛에 반짝이는 공원의 풍경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야 할 하늘이 마치 콜로니나 월면도시에서처럼 낮아져 있고, 하늘 너머로 어렴풋하게 구식의 기상 조절용 기구들이 띄워져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곳은 그라나다인 모양이었다. 멀쩡히 깨어 있다 말고 환상이라니, 혹시 내가 기절이라도 한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조바심으로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방망이질쳤다.

  “여기는...?”

  당황하던 화의 등 뒤로 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눈앞으로 젋은 부부가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의 옆에는 아담한 체격의 여성이 차분한 속도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비록 뒷모습밖에 볼 수 없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을 마주잡고 걷고 있는 걸음에는 행복이 묻어나왔다. 속도가 느린 것은 슬프거나 우울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인 뱃속에 있는 아이 때문.
  이윽고 길모퉁이를 돌기 직전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생긋 웃었을 때, 때마침 고개를 들었던 노부인은 그 모습을 보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이름을 읊조렸다.

  “에마....”
  “...중위...!”

  화가 숨을 멈추고 환상 속에 나타난 여성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썰물처럼 환상이 시야로부터 물러나갔다. 높은 하늘과 스모그로 가득 찬 도시의 풍광이 현실을 확인시켜 주는 동안 그녀는 옴짝달싹도 못한 채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호흡을 겨우 가다듬을 즈음 노부인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내며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런 모습이 얼마나 보고 싶었던지....”
  “부인...?”

  노부인은 아마도 그 환상을 당신 혼자 보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화가 황망한 마음으로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가늠하고 있을 때,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의 간호사 한 명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면서 제법 큰 소리로 외쳤다.

  “사모님! 장군님께서 찾으세요!”
  “아이쿠야, 벌써 끝났나? 알았어요!”

  노부인은 허둥지둥 일어나 손가방을 든 다음 그들을 향해 인사를 던졌다.

  “미안해요, 초면에 내가 너무 실례가 많았네요.”
  “아, 아뇨....”
  “얘기 잘 들어줘서 참 고마워요. 명찰에 쓰여 있는 이름이 맞아요? 유이리이 양인가요?”
  “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다고 내 꼭 의사양반에게 얘기해 둘게요.”

  노부인은 다가오는 간호사에게는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로 말을 마친 뒤 목례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길을 따라가는 노부인과 두런두런 몇 마디 얘기를 나눈 다음 화가 있는 벤치까지 온 간호사는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얼굴을 확 폈다.

  “오, 찾았네?”
  “네, 쭉 여기 있었나 보더라고요. 언니는 아침 근무세요?”
  “오늘은 열한 시까지야. 간만에 외과병동에 오니까 정신이 한 개도 없네. 나가서 사람 찾아오라기에 얼른 제가 가겠습니다 했지.”
  “저분은...누구세요?”
  “아, 장군 사모님이셔. 로렌츠 A. 신 준장님이라고, 남편분이 전에 연방군 재료연구소 소장이셨대.”
  “신 장군님이요?”
  “응, 사모님이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어?”
  “별로요. 전 그냥 듣기만 했는데....”
  “그런데 무지 고맙다고 그러시던데. 좋겠다. 저분 부원장님하고 아는 사이라던가 해서 VIP야. 잘 하면 너 반년 만에 특채될지도 몰라.”
  “에? 설마 그럴 리가요.”
  “두고 보면 알겠지 뭐. 그럼 난 근무니까 들어간다. 아, 로라한테는 네 환자 찾았다고 전해줄 테니 신경 쓰지 마.”
  “고맙습니다.”
  “이 정도로 뭘. 조무사 꼬리 떼고 나서 밥이나 거하게 쏘면 돼. 그럼 쉬어.”
  “네.”

  간호사가 자리를 뜬 뒤 화는 조금 전에 보았던 환영을 다시 떠올렸다. 얼핏 본 얼굴이었지만 잘못 보았을 리 없다. 그라나다의 오솔길을 함께 걷고 있었던 것은 분명 아가마의 형제함 라디쉬에 타고 있었던 이들이었다. 헨켄 베게나 함장과 에마 신 중위.
  헨켄 함장이 에마 중위에게 은근히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승무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에마 중위가 싫은 척 하면서도 그 마음을 곧잘 받아주고 있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그라나다를 한가로이 산책할 수 있었을 리는 없었고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더더군다나 어불성설이었다. 그들은 채 마음의 결실을 얻지도 못한 채 멜슈트롬 작전 때 그들의 기함 라디쉬와 함께 산화하고 말았으니까.
  신 부인은 그 장면을 본 것만으로도 적잖이 위안을 얻은 듯 했다. 아마도 그것은 환영이 너무나도 적확하게 바랐던 그대로의 모습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신 부인의 마음씨 고운 막내딸이라는 사람은.

  “...에마 중위.”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그 환상을 펼쳐놓은 사람은.

  “설마, 카미유?”

  그는 여전히 투명한 눈으로 환영이 걸어간 오솔길 끝을 쫒고 있었다.

  “알고 있었던 거니?”

  카미유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언더 잡지에서나 보았음직한 이름으로 부르자면 뉴타입이라던가. 눈앞에 보이는 기계라면 무엇이든 조종할 수 있다고들 했다. 복잡하기로 이름난 전투 기계 MS도 도면 한 번 훑으면 금세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성에 어긋나지 않게 그는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주제에 그녀가 몇 달간 특수훈련을 받아도 겨우겨우 제어가 가능할까 말까한 MS들을 마치 자동차 운전하듯 며칠 만에 장악해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뉴타입의 능력은 단지 조종 능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뉴타입이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다른 이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읽어내는 이들이었다. 그런 일에 너무나 뛰어난 나머지 남의 의도를 읽고 미래를 점칠 수도 있었고, 때로는 다른 이가 원하는 것을 마치 현실처럼 보여주기도 했으며, 아주 가끔은 다른 이의 소망에 스스로를 묻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신 부인이 에마 중위의 어머니시라서, 부인이 원하는 걸 보여준 거야?”

  환영은 노부인에게 주는 선물이었을까, 아니면 딸의 목숨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사과였을까. 어쩌면 그것은 화를 부인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이제 그 정도의 사고가 가능할 정도로 회복해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부인에게 환영이 나타났던 것은 그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그저 그들은 그가 보고 있던 꿈속으로 끌려들어갔던 것뿐일까. 그는 마음을 닫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그대로, 조금도 회복되지 않은 걸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질문은 수백 가지였으나 제대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넌 왜 항상, 대답이 없니."

  외상성 스트레스 증후군 같은 명칭을 굳이 갖다 붙이지 않아도,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만을 쫒고 있는 소꿉친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전쟁이 그의 마음에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무슨 마음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한없이 어렵기만 했다. 그는 묻거나 묻지 않거나 그녀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한 번도 그에게서 답을 들을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사이였는데.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다른 이들에게는 저렇게나 다정한 주제에 남들의 마음속 소원까지 끄집어내어 보여 주는 주제에 어떻게 나에게만 이렇게 가혹해질 수 있을까. 이 바보 멍청이.

  - 늘 그랬지. 먼저 가버리기나 하고, 내 말 같은 건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

  가슴에 들어앉아 있는 돌덩이가 오늘따라 더욱 묵직하게만 느껴졌다. 화는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서라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억누르기 위해 바닥에 손톱자국이 남도록 손을 꽉 쥐었다.
  한때는 그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어디로 가든 무엇을 어떻게 하든 그녀의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상황은 두려울 만큼의 속도로 바뀌어갔다. 언제 어디서든 서로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떨어져 있더라도 대화가 없더라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그의 몸은 그의 시선은 그의 마음은 그의 영혼은 점점 더 그녀가 모르는 곳을 향하고.
  그와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려면 무엇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제어하여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통제할 수 없는 욕심이 있었고 매어 둘 수 없는 소원이 있었고, 언제나 반역을 꾀하는 마음이 있었다. 대답을 원하는 마음이 어째서 욕심이어야만 하는 것인지 왜 혼자만의 마음이어야 하는지 받아들이지 못한 채 숱한 질문의 무게를 바위처럼 달고 지내는 심장이 있었다.
  나는 이 처연한 마음을 언제까지나, 잡고, 붙들고, 다스릴 수 있을 것인지.

  “제발, 카미유...!”

  결국 화는 불러도 대답 없는 이의 이름을 부르며 양손에 그저 얼굴을 묻고 말았다.


       - Special Thanks to Minority Report(2002) by Steven Allan Spielberg.

2009/06/30 13:03 2009/06/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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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SU 2009/07/22 07:4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오랫만의 카미유사랑에다가... 화유리 선호라니...

    포우가 불쌍해에... T.T

  2. Amille 2009/07/23 08:3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포우는 이 시점에 이미 없어서....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