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던 방안에 눈앞에 흐릿한 불빛이 어른거렸다. 누군가가 움직이는 듯한 기척이 들리면서 옆자리에 느껴지던 따스한 온기가 사라졌다. 싫은 느낌.

  "응...."

  벨트치카는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기 위해 손으로 눈을 비벼댔다. 아무로가 속옷 바람으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고 있는 것이 가느다랗게 뜨여진 눈 사이로 보였지만 피곤한 나머지 그녀는 가냘픈 한숨과 함께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아무로는 워낙 분주해서 그녀가 깬 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싶다. 어쩌면 눈치채고는 있지만 아무 말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건지도. 벨트치카는 칼칼한 목을 몇 번 가다듬고는 눈을 감을 채 말을 건넸다.

  "몇 시에요...?"
  "아, 더 자. 아직 일러."

  그녀는 그의 가벼운 대답이 불만스러웠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어. 몇 시인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으면 이른 시간인지 뭔지 알게 뭐람. 하지만 그는 늘 그런 식이다. 그녀가 나갈 시간에서 십 분만 빨라도 그건 다시 잠들어도 상관없는 이른 시간이었고, 오 분만 늦어도 세상이 무너질 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그나마 그 일어나야 하는 시간도 매일 출근 시간대가 오락가락하는 그녀의 사정을 별로 고려하지도 않은 채 그가 대충 정해놓은 시간인지라 그의 시간관념은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억지로 눈을 다시 열어 옆에 있는 시계를 보니 오전 다섯 시 삼십 분이었다. 과연 이른 시간이라 할 만 했다.

  "...벌써 나가는 거에요?"
  "응. 아마 저녁도 먹고 들어올 거야."
  "일이 많네..."
  "조금. 내가 늦으면 기다리지 말고 자. 회사에서 저녁 먹고 와도 되고."
  "난 오늘 출근 안해요."
  "휴가야?"
  "아니. 저번 주 일요일에 특근하고 쉬는 거야. 어제 얘기했잖아요?"

  벨트치카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이 남자는! 얘기를 몇 번이나 했는데 그걸 잊고 있는 거야. 저녁 먹으면서도 얘기했고, TV를 보면서도, 잠자리에서도...오래간만에 노는 날이니까 뭔가 배려를 해 주리라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요즘 그가 지나칠 정도로 일이 많아지고 바빠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일도 사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었다. 군대에서 일이 바빠진다는 것은 인사이동이 있다거나, 새로운 물자-주로 병기-가 배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물며 한 달이 넘도록 이렇게 바쁘다는 건, 무언가 대규모의 '이동'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그런 일 사이로 사라져 가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기 있게 움직이는 건 좋지만 군대에 묻혀가는 것은 질색이야.

  "...아, 그랬나. 미안. 그럼 되도록 일찍 와보도록 할게. 늦으면 전화하고. 됐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뭔가 차가운 기운을 느끼기는 했는지 그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벨트치카는 흐응 하고 코웃음 소리를 낸 뒤 다시 시트를 끌어당겨 덮고 잠을 청하는 척 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틀림없이 연락도 않고 늦게 돌아올 것이 뻔하다. 그래놓고는 일이 바빠서 연락을 못 했다느니, 정신이 없었다느니 하고 변명을 하겠지. 남자들이란 정말 무신경하다니까. 기다리는 입장은 조금도 생각해 주질 않아.

  "그럼 오늘은 푹 쉬어. 다녀올게."

  옷을 대충 꿰어찬 아무로는 나가기 직전 벨트치카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하고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낮은 소리를 들으면서 벨트치카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켰던 스탠드를 다시 끄지도 않고 나간 것이 정말로 바쁘다고 변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왜 저렇게 오랫동안 바쁜 걸까. 전쟁 때도 아니고 이 기지에선 별로 그럴 만한 건수도 없는데.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도 않는 것이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언제나 그랬다. 그녀는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 하나하나에서 자신은 그에게 제일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몇 번이나 느껴야만 했다. 전쟁 때는 전투에 빠져들어가는 그가 보기 싫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강짜를 부리기도 했었고, 몇 번 그러다가 전쟁 때 폐인이 되어서 지금은 유럽 대륙 어딘가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카미유라는 꼬마에게 잔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일단은 그가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참자며 뭔가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면서도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러나 전쟁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일 다음의 의치에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일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거의 밤마다 때로는 비명을 지르고 때로는 울며불며 꿈에서 깨어나는 그에게서 악몽 하나를 쫓아내는 것조차도 해줄 수가 없었다. 안아 주고 달래어 보아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자신이 쫓아낼 수 없는 꿈에 시달리는 그를 보면서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 결국 자신은 그에게 그만큼의 안정도 줄 수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랐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도 몇 년이 되어 가는 지금은 그저 해줄 수 있는 것만 해 주자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한숨을 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그저 데리고 사는 여자일 뿐, 그의 아무 것도 아닐 테니까-.
  벨트치카는 한숨을 쉬며 다시 시트를 끌어당겼다. 차가운 옆자리가 마치 그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어. 어차피 그가 없는 휴일인데, 잠이나 더 자두는 게 좋겠지. 그녀는 아까까지만 해도 억지로 떠야 했던 눈이 어느새 말똥말똥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눈을 감아버렸다.

                                                  *                                   *

  그녀가 다시 눈을 뜬것은 아침이 한참 지나서 커튼을 친 방안으로 햇살이 가득할 무렵이었다.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방안을 울려는 바람에, 모처럼 푹 잠을 자던 그녀는 더 잘까 하는 생각을 가까스로 뿌리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저런, 죄송합니다! 아스토나지입니다."

  침실의 전화는 받으면 자동으로 소리만 나가도록 되어 있어서, 누구나 소리만 나오는 전화를 받으면 자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여보세요'소리가 나기 전부터 허둥지둥하는 아스토나지가 조금 우습기도 하고 안되기도 해서 벨트치카는 그냥 픽 웃어 버리고 말았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웬일이세요, 근무 시간에?"
  "아 네, 축하 전화 드린 겁니다. 오늘 배치가 완료되었거든요."

  그렇구나. 인사 이동이 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바빴던 거였구나. 벨트치카는 쓰게 웃었다.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어 봐도, 시큰둥한 대답뿐이겠지.

  "아, 네에. 그이는 그럼...."
  "사이드 7로 저와 같이 가시게 됐습니다. 저야 뭐 우주라면 아무 데나 상관없었지만, 대위님은 지망하신 곳에 되어서 다행이다 싶어서요."
  "...우주에요?"
  "네. 오래 기다리셨죠? 축하드립니다."
  "...네에."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대위님은 일찍 보내드릴 테니 좋은 시간 보내세요. 하하하."

  아스토나지의 웃음소리와 함께 끊어진 수화기를, 벨트치카는 한참 동안 내릴 수가 없었다.
  요즘 인사 이동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가 이동을 희망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그가 우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들은 적이 없었다.

  - 이렇게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
  물론 그런 얘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우주로 나가든 말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이다. 그녀가 참견할 이유도 없고, 또 그가 한번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녀가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로는 스스로의 준비를 마치면 언제든지 우주로 나갈 사람이었다. 지구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꿈과 희망은 그가 성장한 우주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의 미래는 우주에 속해 있었다. 벨트치카는 아무로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언제나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그 사실을 통고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그가 우주로 가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적어도 데리고 사는 여자로서의 자각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최소한 그 사실이 확정되기 전에 자신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내가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는 하지만 고작 이 정도의 가치밖에 없을 줄은....
  눈물이 코끝에 맺혔다.
  그녀에게도 일이 있었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것이 조금쯤 쉬운 사무직이라고는 해도 하루 이틀 사이에 여기저기로 옮긴다는 것은 몇 달이나 몇 년씩 일하게 되는 회사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생각만큼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런 말도 없이 혼자만 우주로 덜컥 가버린다면, 이것은 헤어지자는 의미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울고불고 붙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미리 알리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나쁜 사람. 어쩌면 내게, 이럴 수가 있을까.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며 벨트치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에게 부담만 주는 여자였던 거야. 그는 나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던 거야.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좀 열심히 일해보려고 하면 그게 보기 싫어서 매일 짜증이나 부리고, 매일 꿈에서 시달리는데도 그냥 혼자 이겨내라면서 지켜보기만 했으니까. 싫었을 거야. 기왕에 헤어지기로 했다면 구차하게 시간 끌어서 그 사람을 부담스럽게 할 이유는 없겠지. 일어나서 짐을 조금 챙겨두어야겠다. 오늘은 회사에 안 가도 되니까.
  ...하지만, 미리 말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정도는, 생각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흑...!"

  결국 벨트치카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큰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이 베개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벨트치카는 조금만 울고 일어나서 짐을 챙겨야지, 하고 결심했다. 조금만. 이 눈물이 그칠 때까지만.

                                                  *                                   *

  "뭐야, 아직 자고 있었던 거야?"

  벨트치카는 기운 없이 축 늘어진 채 멍한 눈을 들어 군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는 아무로를 바라보았다. 울다가 그만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커튼을 걷지도 않아서 빛으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방안은 이미 꽤 어두침침해 있었다. 아까 일이 낮잠을 자다가 꾼 한바탕 악몽처럼 느껴졌다.

  "...일찍 들어왔네요."
  "응. 이제 바쁜 일은 다 끝났어. ...어디 아파? 목소리가 이상한데."

  벨트치카 곁으로 다가온 아무로는 엎드려 있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도 조금 있는 것 같고. 요즘 무리한 거 아냐?"
  "아니에요."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벨트치카는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몸이 안 좋으면 조금 더 자. 저녁은 내가 하지."
  "왜...."
  "응?"

  시트를 끌어올려 잘 덮어 주고 스탠드를 끈 뒤 방을 나가려던 아무로는 그녀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왜 말 하지 않았어요?"
  "응?"
  "우주로 간다면서요."
  "아."

  아무로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는 갈 때가 된 것 같았어. 네오지온이 움직이고 있다고 들었거든. 샤아인지 다른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큰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뜻이 아니에요."

  벨트치카는 큰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목이 꽉 잠겨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로가 '응?'하는 듯한 표정으로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더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왜, 나한테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 나는...."

  눈앞이 흐려졌다. 아무로가 놀라 벨트치카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았지만 그녀는 도리질을 하며 그것을 뿌리친 뒤 이를 악물고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헤어질, 거면...빨리 말해 주는...편이...."

  하지만 애써 입을 열어도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결국 벨트치카는 그녀가 가장 원치 않던-아무로의 품에 안겨서 눈물만 펑펑 쏟아낸다, 라는-상황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아무로는 그녀가 우는 동안 내내 안아준다 머리를 쓰다듬는다 등을 쓸어준다 하며 말없이 있다가, 그녀가 조금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걸었다.

  "이제 괜찮아?"

  벨트치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내 말을 좀 들어봐. 어제까지만 해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정말 불확실했어. 알다시피 그동안 군에서 나를 거의 억류하다시피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힘을 써 줄 사람을 여기저기 알아보느라 바빴던 거야. 그리고...."

  아무로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이었다.

  "에, 또, 발령은 났지만 아직 가려면 서너 달 정도 더 있어야 해. 그러니까 그 정도면 당신도 여기 생활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흠,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가 줄지 걱정도 되고, 결정이 확실히 난 다음에 밀어붙이면 좀 부담은 되겠지만 그냥 따라와 주지 않을까 싶어서...얘기를 안 했어.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알고 있었던 줄은 몰랐어."
  "에...?"
  "일이 소중한 건 알지만...우주에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물론, 나와 같이 있으면 위험할지도 모르지만...음, 어차피 전시엔...."
  "바보 같기는."

  벨트치카는 느닷없이 아무로를 꼭 끌어안았다. 어두워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을 더듬거리고 있는 아무로의 얼굴이 목까지 붉어져 있는 듯도 했다. 여태까지 울었던 것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도날드 덕처럼 목쉰 소리를 이런 로맨틱한 순간에 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 아무 도움이 안 될 텐데. 군의 일도 잘 모르고, 당신이 나쁜 꿈을 꿔도 아무 것도 못 해주는데."
  "밤마다 옆에서 비명 지르는 걸 잔소리 없이 들어주는 여자를 내가 놓칠 거 같아?"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 가득히 아무로가 웃고 있다는 것이 벨트치카에게도 느껴졌다.

  "같이 가 주는 거지? 우주에."
  "그럼요."

  벨트치카 또한 아무로만큼이나 얼굴 가득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디든 따라갈 테니까 각오해요."

  악몽은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 기동전사 뉴건담-역습의 샤아 편과는 설정이 맞지 않습니다.
2009/02/10 15:41 2009/02/1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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