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風梅花'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그곳은 인적이 무척 드문 곳이라고 했다. 제일 가까운 인가에서 들어가도 최소한 이틀거리가 된다던가. 길을 물었던 주막의 아주머니는 혼자서 가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적호를 타고 가니 평범한 이들보다는 훨씬 빨리 갈 수 있다고 말을 붙여 보아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혼자서 어찌 야숙을 하시려 그러시우? 그것도 아가씨가.”
  “야목을 찾아 들어가면 안 될까요.”
  “내 알기로 그 근방에 그곳 이외엔 야목이 잘 없수. 보아하니 양가댁 규수인 모양인데, 경치 곱다는 말만 듣고 섣불리 길을 나설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아요.”

  바람이 잦아지는 봄가을이 되면 만월에 맞추어 그곳을 찾아드는 사람들이 꽤 있기는 하단다. 그러나 간다 해서 그곳을 꼭 찾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운이 나빠 길을 헤매기라도 하면 한밤중에 요수를 만나게 되기 십상이라 한두 명으로 출발하는 법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육축에 요마를 더해 칠축으로 삼고 있는 안국에서도 길들여지지 않은 요마는 여전히 위험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그럼 일행을 구해야 되겠군요.”
  “그러시구려. 보고 싶다면 그냥 사람들이 열 두엇 될 때까지 죽치고 기다려요. 헌데 요즘이 농번기라 가는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안국 광주는 경의 북부보다도 기후가 다소 한랭한 지역이었다. 그래서인지 경에서는 겨우 두어 주 전에야 가을걷이가 지나갔지만, 이곳은 이미 추수를 마무리한 뒤 이모작을 위한 겨울보리 등의 파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바쁜 와중에 꽃놀이를 나서는 이는 잘 없게 마련인지라 이태 밤을 기다려 보았음에도 열명은커녕 단 한 명도 나타나는 이가 없었다. 산봉우리 위로 떠오른 달을 향해 아무리 동행을 빌어 보아도 주막은 내내 빈 채였다. 가든 말든 내버려두지 않고 애써 이런저런 말을 붙여 준 주막 아주머니의 배려를 쫓을 겸 조금쯤 더 기다려 볼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더랬다. 하지만 거의 보름이 다 되자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답답함이 마음을 온통 뒤덮고 말았다.
  그라면, 아마 흐드러진 꽃내음을 즐기기 위해 홀로라도 밤을 도와 달릴 것인데.
  씨뿌리기가 곧 끝나니 다음 만월에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아쉬워하는 아주머니를 뒤로 한 채 새벽에 주막을 떠났다. 얼마간은 마치 돌아가는 것처럼 오던 길로 나서다가 이내 사람이 없는 길로 적호를 들여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일찍 떠나 길을 달리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몇 개쯤의 시내를 넘고 또 몇 개쯤의 고개를 건너 그곳을 찾아 나섰지만 어째서인지 날이 어둑해지도록 길을 가늠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물론 쉬이 찾아질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더 이 깊은 산중을 오가야 하는 것일까.
경왕은 적호를 잠시 멈추게 한 뒤 노을이 번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흘렸다. 잠행을 나올 때면 으레 몸에 붙이고 나오는 힌만 조유유조차도 이번에는 떼어 두고 나왔다. 물론 이제는 그녀의 검 솜씨도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니 비교적 요마의 출현이 적은 안에서라면 하룻밤 정도의 야숙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리라. 허나 그 무엇보다 일신의 안녕을 먼저 도모하시라는 케이키의 말조차도 무시한 채 너무 무모하게 일을 벌였는가 하는 자책감이 가슴을 때렸다. 행여나 일국의 왕답지 못한 길을 걸을 양이면 그 발길은 필경 거두어 들여야 할 터. 어쩌면 이 마음이란 늘 그러하듯 접었어야 하는 것이었던가. 경왕이 무심코 가슴께로 손을 올려 옷깃을 부여잡았을 때였다.

  “여어.”

  놀라 뒤를 돌아보니, 수풀이 조금 흔들리다가 이내 덩치가 큰 젊은 남자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허리에는 태도를 차고 있는 모습이 눈에 익다는 것을 경왕이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왕이십니까.”
  “때 아닌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누군가 하고 와 봤더니만.”

  이미 얼굴 본 지도 반년이 훌쩍 넘었지만, 서글서글한 눈매며 거침없는 미소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물론 천명을 따라 기린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한 왕이란 얼굴이 변하거나 성장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다. 경왕 자신도 경을 다스린 지 이미 십 년이 지났음에도 봉래에서 이곳으로 갓 왔을 무렵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서 익숙한 낯빛이 찾아지는 것이 기뻐 가슴이 뛰었다.

  “오랜만이로군.”
  “네. 반 년 만이던가요.”
  “조금 더 되었지. 경왕께서 안의 이런 시골구석까지 홀로 행차를 다 하시다니, 웬일이신가.”
  “잠행을 나온 길에, 하룻밤 정도 들러 풍매화를 즐겨 볼까 생각한 것입니다.”

  한 달여 전, 안왕은 엔키에게 제법 묵직한 화분을 들려 경왕에게 보냈다. 끌러 보니 자못 아름다운 꽃나무 분재였는데, 이름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가 오츠 노사의 눈에 뜨이고서야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안국에서도 광주 깊숙한 골짜기에만 드물게 모여 피는 리목인 풍매화라고 했다. 만월의 밤에 그 나무가 야목으로 옹기종기 모인 군락에서 꽃이 흐드러지면, 꽃잎이 날리는 모양새가 아름답기 그지없어 감탄을 절로 자아낸다고도 하였다.
워낙에는 밤이면 더욱 아름다움을 더하는 그 품새와 향기에 취해 바로 잠행을 나오고자 하였었다. 허나 가을에 있었던 수해의 마무리가 의외로 쉽지 않아 경왕은 겨우 다음 만월에 맞추어서야 궁을 비울 수 있었다. 금파궁에서 하계로 내려오자마자 바로 발길을 안국 광주로 향하여, 풍매화가 지천이라는 마을을 찾아낸 뒤 주막에서 일행을 기다리며 체제한 시간만도 제법이었다. 이만하면 단지 하룻밤의 즐거움만을 위하여 했다고 하기에는 이미 꽤나 지나친 일. 가볍게 들르려 했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궁을 떠나 올곧게 이곳만을 향하여 왔다고 선뜻 말하기에는 부끄러움이 앞서고 말아, 경왕은 그저 말을 아끼며 손짓으로 길을 안내하는 연왕의 뒤를 따랐다.

  “용케도 이곳을 찾았는걸.”
  “주막의 아낙에게서 들으니, 이 골짜기에 제일 나무가 많다 하더군요.”
  “맞아. 나도 마침 엊그제 도착한 참이지. 이쪽으로.”

  있는 듯 없는 듯한 산길을 따라 이리저리로 한참을 간 끝에, 두 사람이 골짜기 아래로 파르스름한 풍매화 가지가 잔뜩 보이는 자그마한 초장에 도착하자 산중은 이미 꽤나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꼭 붙들고 있던 적호의 고삐를 풀어 안쪽 나무에 묶고 나온 경왕은 풀밭에 대충 놓인 짐 옆에 누워 여유롭게 쉬고 있는 타마의 모습을 보았다. 이니 주인에게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지라 굳이 끈을 묶거나 하지 않더라도 도망가지 않는 것이다.

  “마을을 들르시지 않고 바로 오신 모양이군요.”
  “어차피 야목 근방에서는 어떤 동물도 싸움을 걸어오지 않아. 장소를 알고 있다면 굳이 마을에 들러 동행을 찾을 이유가 없지.”

  게다가 우연찮게 지방의 관리가 타마를 보기라도 하면 들통이 나버리니까, 하며 연왕은 예의 시원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장작을 한아름이나 집어들었다. 몇 백 년이나 이골이 나도록 해 온 터라 잘 마른 나뭇가지를 성기게 쌓고 불을 놓는 동작에 어설픈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름을 먹인 천을 불쏘시개로 해서 장작에 불을 올리며 알 수 없는 콧노래까지 흥얼대던 그는 문득 그녀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경왕께서 용상을 버려두고 잠행을 나오신 것을 보니 슬슬 수해의 마무리는 다 된 모양이지.”
  “처분의 방향은 모두 결정되었습니다. 뒤처리는 기린과 유능한 신하들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고요.”
  “호오. 그것은 마치 일이 다 끝나기 전에 도망쳤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일일이 챙길 수 없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넘겨라. 제가 자주 뵙는 이웃 나라의 왕께 배운 방법입니다만?”
  “이거, 경국의 대신들에게 욕 좀 들어먹겠군.”

  연왕은 자못 당돌한 경왕의 말에 하하 하고 웃음을 웃었다. 그 웃음을 다시 보게 된 것이 기쁘고 기쁜 나머지 마치 고통과도 흡사한 감정이 가슴을 훑어내려가, 그녀는 짐짓 거만한 듯 말을 꺼내어 놓고서도 되레 몸을 수그리며 마치 불티에서 튄 재라도 들어간 양 눈가를 몇 번이고 훔쳐야 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다스리는 나라 이외의 것을 가슴에 담는다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연왕이 본인의 마음을 먼저 내비쳤음에도 근 반 년 동안이나 그와의 접촉을 피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마음에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향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도 쉬이 접거나 묻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감정에 소스라쳐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해결의 방향을 알지 못했다. 왕이 나라 밖의 것에 마음을 내주다니. 감히 보듬어 안아버릴 수 없는 것을 탐하다니. 스스로가 부끄러워 잠조차 이루지 못했던 날도 여러 밤이었다. 허나 그 밤에 묻어나는 쓰라림의 정체가 수치심이 아닌 그리움이라는 사실은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더 확연해지기만 하지 않았던가. 가슴치며 스스로를 좀먹어가던 나날이 겨우 돌파구를 찾은 것은 어쩌면 이 마음을 담은 채 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였다. 떨치지 않아도 버리지 않아도 될는지 모르겠다는 희망 하나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감동하였다. 가슴을 후비던 통증에 찌들어 퀭해진 눈가로 반 년 만에 비로소 눈물이 돌았더랬다.

  “음? 눈에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닙니다. 피곤해서 그런지 좀 뻑뻑해서요.”
  “하긴 종일토록 산중에 있었다고 했겠다. 참도 안 먹었겠지? 우선 식사부터 해야겠군.”
  “그렇게 배가 고픈 것은 아닙니다만....”
  “꽃이 지는 것은 한참 후야. 지쳐 곯아떨어지면 구경할래야 할 수도 없을 테니 미리 든든하게 먹어 두는 편이 좋을 걸.”

  연왕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타마 쪽으로 다가가 짐에서 이런저런 먹거리며 식기를 꺼내 재빠른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불 위에서 굽기 시작했다. 고소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질 무렵이 되자 주변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갓 떠오른 보름의 달빛만이 골짜기를 가득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런저런 양념 때문에 조금쯤 정체가 불분명한 재료로 만들어진 꼬치가 다 없어질 때까지는 많은 말을 건네지 않던 연왕이었으나, 식사가 끝난 뒤 따끈한 차를 받으면서도 멍하니 불꽃이 춤을 추는 모닥불만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는 경왕의 모습에는 더 참을 수 없었던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몇 명이나 처벌한 거야.”
  “네?”
  “분명 관리상의 문제가 발견된 것이겠지. 파면이 있었는가.”
  “...어찌, 아셨습니까.”
  “수해를 마무리하는 데 처리가 아니고 처분이라는 말을 쓰니 그렇지.”
  “제가 말을 섣불리 한 모양입니다.”
  “괜찮잖아. 어차피 여긴 나밖에 없으니.”

  한결 더 다정해진 연왕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경왕은 시선을 더욱 내리깔았다.
  나라 이외의 누군가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때, 밤을 도와 베게를 적시고 일어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부터 발길을 안으로 향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도장 하나만 찍으리라 하고 들어간 내전에는 전날부터 문제가 되었던 침수 지역 관리에 대한 조사 결과가 올라와 있었다.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길이 험하고 사정은 급박하니 단지 가벼운 연락 중복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니 신고가 이중 삼중으로 들어왔던 것은 지원을 두세 배로 받아 남은 돈을 자기 주머니에 넣게 위한 지방 관리의 술책이었다. 게다가 그가 사정을 알게 된 다른 백성 둘을 수해로 위장해 죽이려 했다는 증거까지 드러나 있었다. 가벼운 경고로 마무리하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 문책을 위한 인사회의를 소집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말할 것도 없이 파면. 신적에 든 관리의 파면은 죽음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악이었다.

  “힘들었나?”
  “...네.”

  물론 지난 십년간 파면을 내린 관리의 수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각박한 나라와 고달픈 백성. 고의로 타인의 목숨을 해하려 하는 관리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케이키가 내켜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경왕은 아직 죄가 중한 관리를 그대로 두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였다. 죄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패악하게 만드는지, 분명 증거를 들이대고 문초를 하여도 저지른 일을 인정하고 얌전히 죽으러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형이 떨어지는 순간에는 누구든지 날카로운 악다구니를 날리며 죽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파면의 책임을 친히 지기 위해 그들 앞에 자리하고 있는 경왕조차 조금도 괘념치 않는 모습이었다. 혹 개전의 정이 있다면 특사라도 내려주겠건만.
  옳은 일이었으므로 돌아볼 수 없다. 이미 지난 일이므로 돌이킬 수도 없다. 하여 죄인을 흔적도 남지 않도록 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는 나라 안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한밤에 깨어 가쁜 숨에 힘이 겨워 손을 허우적대며 도움을 구하는 일이 일어난다고는, 중신들에게는 물론 케이키에게조차 말할 수 없었다. 홀로는 위로받을 수 없는 일이 있다. 하여 그녀의 양심이며 반신인 그녀의 기린으로부터는 위안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소류는 요우시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옆으로 끌어당겼다. 가느다랗게 떨고 있던 그녀의 어깨가 아주 천천히 그에게로 중심을 옮겨갔다.

  “...가르쳐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그녀의 희망이 그에게는 이미 까마득한 과거. 초록의 산야와 풍요로운 백성, 무슨 일이 생기게 되면 왕이며 기린에게 달려가서 해결하면 된다고 하는 절대적인 믿음, 보통의 백성이라면 이미 몇 대에 걸쳐 계속 이어져 왔을 안정감. 그녀가 소망하는 나라를 지금 그가 다스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 나무는 내가 빌어서 받은 거야.”
  “직접 비셨다고요?”
  “응. 안을 다스린 지 이백사십 년쯤 되었을 때던가.”

  풍매화의 군락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은 과연 그래서였던가. 왕은 나라에 새로운 작물이 필요해지면 하늘에 빌어 이를 얻을 수 있었다. 궁 안의 리목에 새 종자가 열리면, 이듬해에 왕의 이름으로 이를 각 지방에 나눠 나라 전체에 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풍매화라면 그닥 작물의 가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왕이 안을 다스린 지 이백사십 년이라면 안이 이미 안정을 구가하던 시절. 새로운 식물이 필요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저 산에 심을 만한 보기 좋은 꽃이라도 구했던 것일까.

  “무엇에 쓰고자 바라셨던 것입니까.”
  “아. 사실 쓸모가 있는 것을 원한 게 아니야. 안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동물을 주십사 하고 빌었지.”
  “동물?”
  “사실 바랐던 것은 궁에서 기를 수 있는 애완동물이었거든.”

  덩치 큰 남자는 어깨를 으쓱 하며 입가를 크게 들어올렸다.

  “그런데 열린 것은 식물이더군. 뭐 분재가 가능한 종류라서 궁 여기저기에 놓아두기는 했지만, 처음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그렇군요.”
  “지금으로서는 안은 나고 나는 곧 안이지. 하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이럴 거라고는 믿을 수 없으니 말이야.”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느닷없는 선언에 일순 호흡이 멎는 듯 했다. 그러나 한 가닥의 이유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살펴본 그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 이외에는 아무 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내가 이런 말을 한다 해서 안이 당장 멸망하지는 않으니까. 나는 천명을 받고 왕이 되었다. 소명을 거스를 생각은 없어.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지 않을까? 마음을 숨기는 것이 왕의 길은 아니겠지. 그래서 이 나무를 받은 거다.”
  “그럼, 이곳에는 어떻게?”
  “글쎄. 궁 안에만 두던 것인데 내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씨라도 뿌린 걸지도. 이곳에는 좀 넉넉히 자라더군.”

  다시 한번 어깨를 감싸오는 묵직한 손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이 땅 위에 내 자취를 남기려 했다면 이해가 될까.”

  요우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는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그를 대신해 안에 남아있을 무언가를 원했으리라. 물론 그가 다스리는 나라에 이 나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굳이 마음을 덮거나 접지 않는 것처럼, 더하거나 다른 색으로 칠하지 않는 것 또한 왕의 길이라 여기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녀도 두렵고 그도 두려운 것이다. 언젠가는 밑바닥을 드러낼 왕의 자질이라는 것도, 또한 길고 긴 이 세계의 역사가 증명하는 다스림의 종말도.
  그러나 지금은 그저 믿고 바라는 것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솨아 하고 바람이 불어오자, 사방으로 뻗은 풍매화 가지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몸을 눕히며 희고 향기로운 꽃을 눈처럼 사방에 흩뿌렸다. 작은 꽃잎이 만월의 달빛을 받으며 사방팔방으로 흐드러지는 모양은 과연 듣던 것 이상으로 아름다워 괜시리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봉래에서도 꽃놀이를 가 바람결에 꽃이 지는 것을 구경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봉래에서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오늘의 이 광경이 장관이었다. 바람의 방향을 거스르지 않고, 바람은 꽃의 길을 막지 않는다. 바람과 사랑은 나누는 작고 고운 꽃. 머리 속까지 차오르는 향기에 취해 할 말을 잊을 정도였다.

  “어쩌면, 천제께서는 오늘을 위해 동물 대신 이 나무를 주신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름답군요.”
  “그렇지?”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죽 펴는 모습에, 그녀는 그만 하릴없이 웃어버렸다.

  “하지만, 역시 그대에게 비할 바는 아니야.”

  그는 망설이듯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주막의 아주머니는 농번기에 바빠 구경을 오는 사람이 없을 때면 이 골짜기에는 인적이 드물어 위험하다 하였다. 그녀의 기린도 홀로 떠나는 것은 일신의 강녕을 생각지 않는 일이라며 말리기나 하였다. 이성조차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들먹이며 왕의 길에 나라 이외의 다른 것이 들어찰 여지는 조금도 없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만 홀로 마주하기를 원했다. 만월의 밤에 풍매화가 바람에 지는 정경을, 그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사람을, 그리고 원하고 바라는 길 위에 놓인 스스로의 마음을.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그의 눈에서 스스로의 것을 보고 이를 가늠해 보았다. 위안을 얻은 마음은 두려움이나 고통의 그늘 없이 수정처럼 정결하였다.

  “요우시.”

  하여 그녀는 확인하듯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느 날 밤엔가는 휘적거리던 그 양손을 들어 소류의 목을 어설프게 그러안았다.
2009/02/10 16:09 2009/02/1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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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아 2009/06/05 00:5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만담십이국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십이국기 팬픽에 굶주려서 구글 돌아다니다가 팬픽 사이트에서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어쩌다 보니 개인 블로그까지 흘러들게 되었네요. 정말 너무 좋아서 읽고 또 읽고 했던 팬픽입니다.요코는 움츠러들고 어느정도 회피하려던 성격에서 진지하게 자신과 싸우는 성격으로 변했는데, 그게 아쉬울 때도 가끔은 있었지만(너무 늠름해져서) 이렇게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지한 성격은, 책임지려는 성격은 진짜 사랑스럽습니다..ㅜㅜ..거기에 그걸 받아줄 수 있는 큰 남자인 쇼류가 상대라니 좋았습니다! 역시 그냥 지나가지 못해서 남깁니다..

  2. Amille 2009/06/05 08:3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만담에 올렸던 팬픽입니다. 이 깊은 곳까지 찾아와 주셨는데 업데가 없어 송구스럽네요. ^^;
    서둘러 다른 글 올리도록 애써보겠습니다. ...과연? 흑흑흑 OTL
    방문 감사드립니다. :D

  3. 레아 2009/06/13 01:5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앗 그야말로 흔적같이 남긴 글에 답신이라니..;ㅅ;
    거기에 앞으로도 이런 사는 재미가 물씬 느껴지는 글을 쓰실 생각이라니 감동입니다.
    오노주상이 신간을 쓰실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는 지금..orz..
    만담이 조용하기도 하고, 요즘 리뉴얼 앞두고 약간 사이트가 불안정해서..글 찾아 읽기가 조금 힘든데 실례가 안된다면 아예 즐겨찾기를 해서 종종 들르겠습니다.ㅜㅜ!(<-..)

  4. Amille 2009/06/15 18:0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업데가 없어 면구스럽습니다만; 자주 들러 주시면 제가 감사하지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