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러미를 건네는 엔키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이거, 받아. 소류가 전해주래.”
  “연왕께서...?”

  내밀어지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추었다.
  아무리 신수(神獸)인 기린이래도 연의 기(麒)인 엔키는 인간 모습일 때는 금발의 어린 소년 모습이다. 박사(薄紗)로 싼 기다란 보퉁이는 소년이 마냥 들고 서 있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워 보였다. 이마에 가볍게 맺힌 땀이 소년이 들고 선 짐의 무게를 말해주는 듯도 하였다.
  이쪽이 손님을 접대하는 입장임을 고려한다면 서둘러 받아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귀찮은 일은 질색하기로 이름 높은 엔키가 굳이 안국에서 경국까지 보따리 장수마냥 짐을 끌고 찾아와 주었다는 점을 참작하면 더더욱 그렇다. 뿐만 아니다. 전할 것이 있다면 평소처럼 슬쩍 찾아와 짐만 넘겨주어도 될 일을, 거창하게 안국의 기린이 경국의 왕께 문안을 여쭙고자 방문하나이다 하고 금파궁 전체를 들썩거리도록 만들면서 외전까지 납셔주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물건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음이 명백하였다. 이제 겨우 십년 치세를 갓 넘겨가는 현 경왕의 치세 가운데에서도 이미 수십 번이라는 말로 모자랄 만큼의 조언과 도움을 받은 처지. 공식적인 절차를 밟은 외교적인 선물을 특별한 사유 없이 거절해 버린다는 것은 개인으로서도 왕으로서도 무례한 일이 될 것이었다. 물론 삼백 년의 치세를 자랑하는 안국의 고귀하신 기린께서 경왕의 어전에 서자마자 반말로 인사말을 내뱉는 바람에 사관(史官)의 붓끝이 잠시 휘청거렸다는 점은 계산 외로 쳐야 하겠지만.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이 선뜻 나가지를 않았다.

  “어쩐 일로 이런 것을 다.”
  “내가 아나. 난 그 녀석이 하는 일에는 별로 상관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그럼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십니까.”
  “잘은 몰라. 안에서 풀내음이 나는 걸 보면, 식물인 것 같긴 하지만. 경왕에게 직접 전하라는 말만 들었어.”
  “그렇군요.”
  “그나저나 안 받을 거야? 이거, 보기보다 제법 무거워.”
  “아, 네.”

  망설이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안 받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자신 대신 사관에게 받게 할까를 잠시 고민하고 있던 경왕은 엔키의 다그침을 받고는 그만 얼결에 그 꾸러미를 넘겨받아 버렸다. 엔키의 출연 덕에 간만에 엎드려서 예를 취하고 일어나던 사관들은 물론, 경왕의 뒤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경국의 기린 케이키조차도 그런 경왕의 행동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자비의 생물인 기린이 생글생글 웃으며 전하는 물건인 이상, 함부로 넘겨받는다 해도 그것이 왕에게 위해가 될 거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연왕 소류는 일견 무사처럼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때때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깊이를 보이는 남자였다. 아마도 경왕의 손에 확실하게 들어가게 하기 위해 일부러 엔키에게 이 물건을 맡긴 것이리라.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괜히 힘드시게 해 드린 건 아닌지.”
  “괜찮아. 원래 그런걸. 귀찮은 일은 전-부 나한테 떠넘기니까, 그 멍청이는.”

  엔키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이 꽤나 자랑스러운 듯 환하게 웃으며 이마의 땀을 가볍게 훔쳤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으로는 확실히 제법 묵직한 물건이었다. 경왕은 넘겨받은 꾸러미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손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협탁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을 들고 한 나라의 거리를 내쳐 달려온 기린에게는 실례이지만, 아무래도 말을 주고받는 내내 들고 있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안국은 평안하겠지요?”
  “그냥 그대로지 뭐. 너무 풍년만 반복되는 듯해서, 앞으로는 아예 일부 토지의 용도를 변경해 버릴까 하고 머리 쓰는 듯하긴 하지만.”
  “부러운 일이로군요.”
  “경국은 얼마 전에 수해가 났다며?”
  “네에. 가을의 장마로 북부에 홍수가 나서, 작황도 작황이지만 물자의 수송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유민(流民)도 없고 있다 해도 경국 남부로만 향하고 있어서, 우리도 소식을 듣는 것이 늦었어.”
  “남부는 올해 풍작이었으니까요.”
  “그건 다행이네.”
  “네에. 덕분에 제방을 쌓는 일은 좀 수월합니다.”

  경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꾸러미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대략 세 척 정도의 높이에 길쭉하지만 윗부분은 다소 평평한 모양이었다. 어떤 식물일까. 색색의 끈으로 장식된 매듭을 풀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여 향기를 맡아 보았지만, 그다지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풀내음이 나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경왕은 원래 인간이니까 그런 냄새까지 맡을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나는 반수잖아? 흐음. 어쩌면 그냥 풀 종류가 아니라 꽃 같기도 하고.”
  “꽃, 입니까.”

  비단 매듭을 끄르는 손길이, 조금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걱정할 것은 없어. 안국은 평안하다고 했다.
  경왕은 다른 이들이 눈치 채지 않도록 작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입을 꾹 다물고 비단을 걷어 내 안에 든 물건을 드러내보였다.

  “헤에.”
  “이건....”

  옆에 서서 선물이 펼쳐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엔키 쪽이 먼저 감탄하는 듯 작게 탄성을 질렀고, 경왕은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안에 든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탁자에 둘러선 두 사람 각자가 이 다음에 뭐라 말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동안, 눈에 보이는 물체를 깔끔하게 정의해 준 것은 이를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 있던 케이키였다.

  “아름다운 분재로군요. 무슨 나무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안에서 나온 것은 키운 지 몇 년이나 됨직한 한 그루의 분재였다. 짙은 흙빛의 화분 위에는 화분과 비슷한 색깔의 가느다란 가지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서너 줄기로 갈라진 가지 끝에는 엷은 연두빛을 띤 자그마한 꽃이 송이송이 피어나고 있었다. 꽃송이 주변에는 짙푸른 빛의 잎이 마치 꽃을 장식이라도 하듯 돋아나 있어 화분 위로는 단순히 한 그루의 분재뿐임에도 꽃꽂이라도 한 양 화려하고도 정갈한 모양새였다.

  “그러게. 그 바보가 이런 걸 보는 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게 무언지 아십니까?”
  “현영궁에서 두어 번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종류는 모르겠어.”
  “저는 처음 봅니다.”
  “그래? 혹시 경왕은 이게 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침착한 목소리로 엔키의 질문에 대답한 경왕이었지만, 목소리의 끝이 다소간 떨리는 것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마치 보자기 안에서 튀어나온 것이 징그럽거나 이상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번 눈길을 돌린 다음부터는 시선을 쉽게 그쪽으로 던지지도 않았다. 엔키와 케이키, 그리고 몇몇 제관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 한 쪽 손가락으로 옷깃을 계속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주상, 그럼 이것을 어디에 두시겠습니까.”
  “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지시받기 위해 시종이 다가왔을 때에야 경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이대로, 외전에 두어 주시게.”
  “알겠습니다.”

  시종이 경왕의 앞으로 다가와 화분을 좀 더 보기 좋은 곳으로 옮겨 갈 때까지도, 그녀는 시선을 탁자에서 뗀 채 무언가를 줄곧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경왕, 왜 그래?”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저는 수해의 처분 때문에 짬이 좀 없습니다. 먼저 나가 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렇게 해, 나도 금방 갈 테니까.”
  “그러지 마시고 케이키와 좀 함께 계시다 가시지요. 대접이 소홀해서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십시오. 현영궁만은 못합니다만, 최근 금파궁도 단정하게 정리를 해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어, 그럼 그러지 뭐. 걱정 말고 일 봐, 경왕.”

  경왕이 몇 번이나 양해를 구하고 제관들과 함께 외전을 뜨자, 엔키는 기운이 다한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시종이 두고 간 복숭아를 한 개 덥석 집어 들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씹어 먹기 시작했다. 케이키는 엔키의 맞은편에 앉아 있다가, 엔키가 복숭아 반개쯤을 먹어치우고 한숨 돌릴 때를 기다려 말을 걸었다.

  “아까는 왜 그리 굳어 계셨습니까.”
  “경왕이 그걸 안 받을까봐 걱정했거든. 소류 그 녀석, 경왕 손에 전해주라고 하도 신신당부를 해서 말이야.”
  “그러면 연왕께서 전하러 오셔도 되었을 텐데요.”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꼭 직접 주고 싶었다면 와서 주면 되잖아. 나도 그렇게 얘기했지. 그런데 내가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된다나? 실수라도 하면 어떡할 거냐고 물어보니까, 그럼 실수하지 않게 금파궁 정문으로 들어가라는 거야. 어휴!”

  엔키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도리질을 했다.

  “번거로운 건 질색이지만 명령이라도 내릴 기세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구. 하여간 웃겼어. 전해주기 전에는 돌아올 꿈도 꾸지 말라고 어찌나 못을 박아대던지.”
  “그러셨군요.”

  케이키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엔키는 다 먹은 복숭아씨를 접시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버린 다음, 허세를 담아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 때 소류의 얼굴이 정말 희한했어. 그래서 고민했다구.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경왕이 소류의 물건은 안 받으려고 할 거라는 뜻이잖아.”
  “그럴 리가. 주상께서 그러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연왕께서 저 나무를 꼭 보여 주시고 싶으셨던 거겠지요.”
  “그럴까나. 하지만 그 자식은 바보라도 그렇게 단순한 녀석은 또 아니라서 속을 알 수가 없어.”
  “최근 주상께서 분주하셔서 쉽게 잠행을 하지 못하시니, 용안을 뵙기가 힘들어 그러셨겠지요.”
  “그러니까-그럼 자기가 오면 되잖아.”
  “연왕께서도 정무에 바쁘신 탓일 것입니다.”
  “그 날라리가?”

  엔키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는 접시 위의 복숭아를 하나 더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뭔가 경왕한테 미움 살 짓이라도 한 거 아닐까? 그 자식이 어디서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 내가 알아야 말이지.”
  “말도 안 됩니다.”

  케이키는 농담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얼굴에 드물게 웃음기마저 띄우고 고개를 저었다.

                                             *                                          *

  잠시 안았던 향기인데도 쉬이 덜어지지 않는다.
  홍수가 난 북부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물론 각 곳에서 들어오는 상소를 해결하느라 담당 관원들이 고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 길이 잠겨 소통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신고가 이중 삼중으로 겹쳐 이를 밝혀내는 과정이 복잡해진 것일 뿐 농지나 집이 잠긴 곳은 거의 없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인명이나 재산에 큰 피해가 생기지 않았으므로 유민도 거의 생기지 않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남쪽에 있는 친척집으로 대피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경왕이 코우칸들과 논의하는 문제도 구제보다는 사후대책 쪽에 무게추가 기우는 중이었다.

  “상류에 오는 비를 가두면 될 테니, 이쪽에 제방을 쌓으면 되겠습니다.”
  “민가를 피해 이쪽으로 지으면 안 될까?”
  “너무 상류에 제방을 두면 효과가 낮아지겠지요. 물에 잠기게 되는 부분까지 고려해도 총 1리 정도의 마을이니 보상을 해서 다른 지역으로 철수시키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만.”
  “음, 그렇겠군. 이번 수해에 피해를 입었다면 이주를 반길 수도 있으니 물이 빠지는 대로 의향을 물어야겠어.”
  “알겠습니다.”
  “앞으로 2, 3일이면 물은 전부 빠질 거라고 했지?”
  “네. 화주로부터 병력을 추가로 지원받아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는 중입니다.”
  “사이보우(柴望)인가. 추수철에 무리를 하게 해서 면목 없다고 전해주게.”
  “안 그래도 추수는 대부분 이레 전에 끝났으니 심려치 마시라고 하시더군요.”

  코우칸은 자신의 말에 눈을 크게 뜨는 경왕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슬슬 주상께서도 조금 몸을 추스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몸? 내가?”
  “그동안 식사도 잘 안하시고 정무에만 몰두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별로 그렇지는 않아.”
  “북부의 수해는 예전부터 흔한 일이었습니다. 주상의 즉위로 십년 가까이 범람이 없었던 데다, 이번에도 그 피해가 크지 않아 오히려 백성들은 주상의 덕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총재, 나는.”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지 마셨으면 합니다.”

  아직도 소매에는 아까 닿았던 꽃의 옅은 향기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마주하고 선 신하의 얼굴에 드리운 부드러운 미소 앞에서, 감히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을 입 밖에 내어 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곧 저녁입니다. 이만 물러가겠으니 식사도 하시고 몸을 편케 하십시오.”
  “고맙네.”

  코우칸은 나지막한 한숨을 쉬는 경왕을 향해 진심을 담아 허리를 깊이 숙인 뒤 물러갔다.
  그러나 총재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경왕은 쉽게 얼굴을 펴지 못하였다. 저녁에도 여전히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시중드는 여관들의 속을 잔뜩 상하게 한 뒤, 밤이 되어도 침소에 들지 않고 산책을 한다며 멍하니 발걸음을 옮기다 자신의 몸이 내전에서 외전으로 움직이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내전과 외전 사이를 경계하고 있던 병사가 때 아닌 주상의 방문에 놀라 텅 하고 갑주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경례를 붙였음에도 그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양 짧은 응답도 없이 허위허위 걸음을 걸었다.
  생각에 잠긴 채 아무렇게나 걷던 경왕이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아까 엔키를 맞았던 방에 들어와 연왕이 선물한 분재 앞에 섰을 때였다.

  - 아아. 이 향기였지.

  낮부터 소맷자락에 남아 무던히도 마음을 어지럽히던 것은.
  아까 보았을 때는 그저 막 피어오르고 있던 꽃봉오리에 불과했던 엷은 빛의 꽃들은, 어느새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본디 모습을 자랑하며 나무 전체를 수놓고 있었다. 꽃을 둘러쌌던 녹색의 이파리들은 마치 화려한 꽃다발의 마무리로 장식되는 꽃받침인 듯 했다. 이전의 모습이 단정한 숙녀라면 지금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자태. 옷자락에 담박한 자국만을 남기던 향기도 이제는 사방으로 향수를 뿌린 것처럼 방 안에 가득했다.
  경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송이송이 피어있는 꽃을 어루만졌다.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이 다시 한 번 가슴에서 솟아올랐다.

  - 어째서, 이런 선물을 나에게?

  연왕의 얼굴을 본 지도 어언 반 년.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얼굴을 보지 않은 것도 퍽 오랜만이었다.
  경왕의 자리에 오른 후 십 년의 기간 동안, 연왕으로부터 참으로 수많은 도움을 얻어 왔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즉위부터가 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몰론 연왕은 경왕 자신을 위해 경을 도운 것이 아니라, 경의 유민들이 안에 미치는 피해를 막기 위해 기린이 선택한 진정한 왕인 그녀를 도왔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사실일 터. 같은 상황이었다면 경왕도 그러한 도움을 안에 내주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안의 이득을 위해서였다손 치더라도 도움을 받은 처지로서 무언가 빚을 지고 있는 듯한 마음을 완전히 떨치기란 어려운 법. 즉위 때의 일 뿐만이 아니라 초칙이나 국정의 운영 같은 여러 일로 또다시 도움을 받고 나서는 연왕 앞에 당당히 서기가 더더욱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더더욱 훌륭한 왕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박차를 가했다. 안만큼 좋은 나라를 금방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안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경이 되고자 했다. 그때가 되면 당당히 그를 마주하고 받았던 도움을 돌려주자고 굳게 다짐했다. 비록 나아가는 방향이 다를 수는 있겠으나, 그녀에게 안이 이룩한 안정은 좋은 목표였고 연왕은 훌륭한 선생이었다. 그래서 연왕이 여러 나라를 돌며 밀행을 할 때는 그녀도 종종 동행이 되어 온 대륙을 돌아다니곤 했다.
  자주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는 접선의 기회가 생겼다. 사가에서 놀기 좋아하는 왕과 함께 다니다 보면 온갖 일이 다 일어나게 마련인지라 때로는 같이 술을 마시기도 했고, 마을 주변에서 가축이나 사람을 노리는 요마를 해치우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둘 다 취한 채 요마와 싸우게 되는 일도 일어났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감히 경왕의 팔에 상처를 입히고 심장을 노리던 마지막 요마를 한 칼에 베어버린 연왕이, 한 손에 태도를 쥔 그대로 그녀를 품에 그러안고 깊게 입을 맞추었던 것은.

  “위험했잖아. 이런 정도는 그냥 내게 맡겨.”
  “무, 무슨.”

  겹친 입술에서는 비릿한 요마의 피내음이 났더랬다. 무섭도록 진지한 얼굴에 차마 화를 내지도 못했다.

  “무슨, 이라니. 남자가 왜 여자를 안고 입을 맞추는가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줄 알았는데.”
  “저기, 그렇지만.”
  “그렇게 버둥대지 마. 원한다면 말해주지.”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사랑하고 있다. 요우시.”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그대로 경직해 버려서, 그녀는 그의 얼굴이 두 번째로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축축하고 비릿한 맛이 입안 가득히 느껴졌다. 단단한 팔이 몸을 감는 감촉을 느끼면서 그녀는 자신의 호흡이 격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한 나머지 미처 눈을 감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숨결이 그녀의 입술을 떠나서 귀를 지나 목덜미로 움직여갈 때쯤, 번쩍 정신이 든 경왕은 정신없이 그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리고는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금파궁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계속 적호를 달리게 했다. 얼큰할 정도로 마셨던 술기운도 요마와 싸우면서 입은 상처의 통증도 모두 잊은 채였다.
  찰나의 포옹이었다. 잠시간의 입맞춤이었다. 그도 그녀도 취해 있었고 요마와 겨루느라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었다. 잊으려면 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래야만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다음 날 여관들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상처를 싸매고 피로 얼룩진 옷을 용포로 갈아입으면서, 경왕은 한순간 흔들렸던 여자로서의 심장을 단단히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사나흘 후 엔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찾아와 딱 한 마디가 적힌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넸을 때도 경왕은 당황하는 낯빛을 조금도 얼굴에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 길을 잃는 것이 두려운가.

  길을 잃는다는 것은 굳이 다른 이에게 묻지 않아도 실도(失道)를 말하는 것이리라. 왕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로 하늘에 빌어 선적에 오른다. 왕으로서의 생명을 가지게 된 이후로는 더 이상 인간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왕이 스스로가 다스리는 나라 이외의 다른 것을 마음에 두는 일 따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왕으로서의 자신을 잃으면 하늘을 거역한 왕을 대신해 나라가 황폐해지고, 왕의 반신인 기린이 실도의 병에 걸린다. 왕위에 오른 지 고작 십 년. 사랑에 미친 왕 탓에 황폐하고 비참해진 경과 케이키에게 다시 그런 경험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되는 것을 그녀는 원치 않았다.
  하여 그날의 감촉이 문득 되살아났음에도, 그녀는 왼손으로 한숨이 터져 나오는 입을 막은 채 오른손으로 답신을 적어 보냈다.

  - 그것은 그저 한 줄기 바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주하는 것을 피한지 석 달이 넘어갈 무렵의 가을에 수해가 일어났다. 그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한순간 올곧은 마음을 놓은 것이, 이제 겨우 삶의 터전을 가꿔가는 자신의 백성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게 될 줄이야. 탄식하며 다시 석 달을 정무에만 힘을 쏟았다. 신하들이 위로하며 몸을 돌보시라 간언해도 듣지 않았다. 다른 일은 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였다. 안에는 이러한 일이 있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엔키로부터 들기로는 안이 평안하다 하였으니, 연왕도 아마 그 일을 덮기로 했으리라 여겼는데.
  잠시 품었던 향기는 종일토록 옷자락을 감돌기나 하였다.
  찰나에 닿았던 감촉이 흐드러진 꽃의 향기로부터 묻어나왔다.

  “...아아.”

  경왕은 꽃을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며 통증과도 같은 고통을 가슴에서 느꼈다. 이 이상 가까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도, 시선이 향하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저것은 그저 꽃일 뿐인데. 어째서 그날 그 순간에 나를 붙들어 매는 것일까. 왜 이러한 집착이 나를 갉아먹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게 만드는 것일까.
  어쩌면 저것마저도 버려야 할까. 아니면, 차라리 눈에 닿지 않는 곳에 치우라고 말해 둘까?

  “여기에 계셨습니까.”
  “일찍 주무시지 않으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주상.”
  “아, 케이키...오츠 노사까지?”
  “방해를 했다면 사죄드립니다.”
  “야심한 시각인데도 침소에 들지 않으셨다 하기에 걱정이 되어서 그만.”

  경의 기린과 태사는 함께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냥 거닐어 본 것뿐이야. 찾으러 오게 해서 미안.”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저야말로 작은 일에 부화뇌동하여 쓸데없이 재보까지 동원한 것은 아닌지.”
  “노사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내가 더 부끄럽네. 케이키, 엔키는 돌아가셨나?”
  “네. 주상께서 정무를 마치시기 전에 가셨습니다.”
  “확실히, 안은 평안하다 했지?”
  “그렇습니다.”

  케이키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경왕의 말에 대답했다. 인간의 모습을 취할 때는 머리칼처럼 보이는 금빛의 갈기가, 방에 켜 둔 등의 불빛을 받아 그의 어깨에서 찰랑거렸다.

  “안국의 안위에 무슨 문제가 될 만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그런 것이 아니야. 그저...저 나무를 보니 생각이 나서.”

  경왕은 당황해서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내 바라보고 있던 분재를 가리켰다. 낮에 자리에 없어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던 태사는, 묘한 감탄성을 입에서 내더니 화분으로 가까이 다가가 나무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이것은 풍매화로군요. 상당히 드문 것인데 선물로까지 하시다니, 연왕님의 취미가 이런 것이셨을 줄은.”
  “풍매화? 어떻게 쓰는 거지?”

  노사는 웃으면서 손으로 공중에 글씨를 써 보였다.

  “바람 풍 자에 매화 매 자를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렇군.”
  “공부하시려는 자세는 여전하십니다.”
  “엔키도 알지 못하는 종류라기에, 이름이 궁금했어.”

  이곳은 봉래와 한자를 사용하고 읽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경왕이 처음 여기 왔을 때는 의외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래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아무리 봉래와 비슷하다 해도 우선 사용하는 한자를 확인해 보는 것이 버릇이었다. 풍매화라는 단어는 봉래에서도 쓰이고 있지만, 역시나 이곳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한자와 의미가 다르다.

  “이건 굉장히 드문 리목입니다. 안국의 광주에서는 제법 많이 볼 수 있다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지요.”
  “리목? 이것이?”
  “네. 바람이 강한 골짜기에서만 자라는 것입니다. 꽃이 바람이 날려서 땅에 떨어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나무가 생겨나는 방식으로 번식하지요. 만월의 밤에 가장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에 흩날리는데, 장소를 잘 찾아내면 그것이 또 제법 장관이라 합니다.”

  경왕은 태사의 설명에 문득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연왕이 이것을 내게 보내온 것은 그 때문이었던가.

  - 그것은 그저 바람일 뿐.

  그렇다면 바람에 지는 꽃처럼 마음도 사라진다는 의미인 것인가. 그렇게 모든 것을 덮어버리겠다는 의지인가.
  분명 그리 생각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연왕은 안을 다스리는 300여 년 동안 술에 취해 많은 기녀를 안고 다녔다는 소문이었다. 본인은 주점에 흘러드는 소문을 좋아할 뿐이라 말하며 부정하고 있다지만, 안의 관리 중 왕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자는 그 수가 많지 않아 그 말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술에 취해 여자를 안는 것이 습성이라면 그 날의 일도 설명이 가능하였다.
  뒤늦게나마 그 뜻을 전하기 위해 이것을 보낸 거라면 다행일 것인데, 어쩐 일인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결국은 질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로군.”
  “태사께서 말씀하시니 저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바람과 풍매화는 만월의 밤에 서로 사랑을 나눈다고.”
  “그렇습니다. 보기에 참 좋다는데 저는 아직 본 적이 없군요. 이 나무가 질 때만이라도 기다려야겠습니다.”
  “지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경왕은 둘이 나누는 대화에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네. 꽃은 바람의 방향을 거스르지 않고, 바람은 꽃의 길을 막지 않으니까요.”
  “...아!”

  그날 밤 연왕 소류는 요우시가 넋을 놓고 밀어내는 서슬에도 그녀를 굳이 붙잡거나 하지 않았다. 당시의 그녀는 상처 입은 데다 취해 있었고 온 몸의 긴장이 풀려 떨고 있었으므로, 아마도 마음만 먹었다면 그녀를 못 가게 하는 일 정도는 간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그를 피하는 것을 굳이 만나자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오늘만 해도, 공식적으로 그가 금파궁을 찾았다면 만나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저 선물을 직접 전해 주라 엔키에게 말했을 뿐 본인이 오는 일을 삼갔다.
  꽃은 바람의 방향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는 그의 마음을 담아 그녀에게 충분한 의사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바람은 꽃의 길을 막지 않는다. 이 화분은 그날의 일을 그가 덮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녀가 덮으려 한다면 그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의미의 선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나에게 이것을 보낸 진정한 뜻이라는 것은.

  - 사랑하고 있다.

  남자의 마음씀이 너무도 고마워, 갑자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태사는 눈물이 어린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미소를 띠우며 말을 건넸다.

  “스스로를 좀 더 소중히 여겨 주십시오. 주상께서는 경의 민의(民意)를 받은 왕이십니다.”
  “노사.”
  “밤이 늦었으니 늙은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태사가 절을 한 뒤 사라지자 방 안에는 경왕과 그녀의 반신인 케이키만이 남았다.

  “케이키.”
  “네. 주상.”
  “어쩌면 왕은 규칙에 지나치게 얽매여선 안 되지도 몰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 이외의 다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쩌면 마음을 품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도 있지 않을까. 천제께서도 조리에 이르시기를, 왕은 결혼할 수 없다고만 하셨을 뿐 그 누구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지는 않았잖은가.

  “아마도 엿새 후가 만월이었지?”
  “그렇습니다만....”

  요우시는 케이키를 향해 여자의 얼굴로 활짝 웃었다.

  “글피쯤 잠행을 가겠다고 스즈에게 언질을 해 주어.”

  그녀의 마음을 훑고 내려간 그는 어쩌면 오늘 밤에도 안국 광주 어딘가의 마을에서, 한 줄기 바람에 피는 꽃이 흐드러진 골짜기를 찾아 미소짓고 있을 것인가.
  비록 오늘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달이 밝은 밤의 발걸음을 안으로 향하여 보자.
  돌아서며 깊이 들이쉰 공기 속에는 농밀한 향기가 가득이었다.

2009/02/10 16:09 2009/02/1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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