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己嫌惡

from Fanfic/Gundam 2009/02/10 16:07
  바닷바람에는 소금기가 들어 있다 한다. 만일 해변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면, 설령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능한 빨리 세차를 해 주는 편이 좋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야금야금 쇠를 먹어 들어가면 언제 어떻게 차가 삭아 버릴지 아무도 모르니까. 해변 도로를 매일매일 달려야 하는 섬 지방 사람들은 아무리 새 차일지라도 5년 이상 쓸 생각은 접고 산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아예 살 때부터 육지에서 온 중고차만 찾는 사람들도 있다던가.
  염분이 쇠만 삭게 하는 것은 아닐 터. 아무리 코팅된 강화 금속이라지만 이 바람을 오래 쏘이고 있다 보면 설령 우주 전용의 도다이라 하더라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 돌아가자. 몸도 안 좋잖아.”
  “더 있다 갈래.”
  “도다이가 썩어버릴지도 몰라.”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였다. 그러나 소녀는 의외로 그냥 피식 웃어버릴 뿐 별다른 반응이 없어, 괜스레 소년의 오기를 샘솟게 만들었다.

  “어? 농담 아니다? 조금 있다 해 지면 추워질 거야. 가자.”
  “싫어.”

  소녀는 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서슬에 소녀를 안고 있던 소년의 뺨에 소녀의 짧은 머리칼이 스쳐지나갔다. 소녀는 피곤한 머리를 애써 다시 가누며, 어느새 쌀쌀해진 바람이 불어드는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대지의 무거운 걸음은 여기에서 휴식을 얻는 모양이다. 푸른 물빛은 육지를 달래는 듯 모래사장을 뒤덮고, 파도는 망설이는 마음처럼 끝없이 하얀 거품을 뱉어냈다 삼켰다. 아무리 보아도 질릴 것 같지 않은 거대한 광경.

  - 위험해.

  빙글빙글 도는 머리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냐.
  소녀는 소리 없이 그 목소리에 대답하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끊임없이 발끝으로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는 소녀를 하냥 주저앉고프게 만들었다. 해변에서 소년의 품에 가득 안겨 있는 소녀. 그녀의 발을 훑고 사라지는 파도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녀의 머리카락. 어지간하면 부드럽고 향기로운 소녀의 감촉에 얼굴을 붉힐 법도 하건만, 소년은 얼굴에 홍조는커녕 미소조차 떠올리지를 않았다. 오히려 열한 살짜리 계집애 주제에 뭔 강단이 이리도 거세담, 하고 작게 투덜거리기나 했다.
  워낙에 둔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다. 연구소에서 도망쳐 나와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놀아 주겠다며 다가오고선 정작은 여동생을 찾는 일에만 골몰하던 일도, 적이든 뭐든 상관없이 너는 너이기만 하면 된다며 일촉즉발의 대기권에서 목숨을 구해주던 일도 너무나 소년다웠다. 그렇지 않은 성격의 소년을 모르는 소녀로서는 마음 상할 필요조차 없었다. 소녀는 처음부터 그런 소년이 좋았던 것이니까.

  “다들 돌아갔잖아. 하여간 고집은.”
  “음, 그래도.”
  “더 있자고?”
  “응.”

  소녀는 머리 속의 생각은 따라잡지도 못하면서 오로지 감각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소년이 좋았다.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소년이 너무나 좋아서 어찌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눈도 코도 입도 팔도 다리도 손도 발도 모두 좋아...도무지 걷잡을 수 없는 마음으로. 그가 있는 곳으로라면 아무 이유라도 붙여서 달려오고 싶었을 정도로. 소녀는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고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그저 무심히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맞는다고 해서 그것이 서로 좋아하게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연속극이든 주변에서든 숱하게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 것일까. 어째서 서로 맞는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기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어느 한 쪽에서 서로 맞는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 아닐까. 소녀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정말 서로의 마음이 맞춰놓았던 것처럼 잘 들어맞는다면,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깨닫고 있다면 그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끌려서 서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지구로 올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녀는 소년에게 진짜 동생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그로 채워져 있듯 소년을 자신만의 진정한 가족으로 삼을 수 있을 거라는 데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누이는 자신이 아니었다.
  짜증이 날 정도로 외골수에다 오빠에게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소년의 누이는 지극히도 사랑스러워 그녀의 오라비에게 있어 부동의 제1순위였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사랑받고 있는 동생’으로서의 자각이 있어 그 누구도 그녀의 당당함을 꺾을 수가 없었다. 아무 사심 없이 자신의 응석을 받아주고 달래는 그녀는 누구보다도 예뻐 보여서 소녀는 당연히 느껴지던 질투심에게마저도 상처를 입어야 했다. 어쩌면 셋이서 가족이 되자는 소년의 말을 얼른 받아들였다면 일이 쉬웠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자신이 소년의 전부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 싫어 화를 내고 떼를 쓰던 와중, 소년의 누이가 죽은 듯 사라져버렸다. 소년은 가슴에서 피를 흘렸고 부드러운 눈매에는 영원이라도 갈 듯한 흉터가 길고 날카롭게 새겨졌다. 이제 소녀는 나만의 오빠가 되어 달라는 말을 감히 입 밖에 꺼낼 수도 없었다.

  “바다가 그렇게 좋아?”
  “응. 무지 예뻐.”
  - 그러지 마.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는 아까보다도 조금 커진 듯 했다.
  어째서? 나는 괜찮은데.
  머리에 열이 올라 눈앞이 흐릿해져도, 소녀는 잠자코 파도가 밀려드는 해변을 응시하는 척 했다.
  최소한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소년의 첫 번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의 기대는 자줏빛 머리칼의 군인 출신 아가씨가 느닷없이 함 내에서 사라지면서 산산이 깨져 버렸다. 더 이상 소년의 마음은 소녀를 위해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가씨의 안위, 행동, 그리고 마음을 따라 소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온 이후에도 소년의 마음에는 그 아가씨가 그대로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투정을 부려도 섧게 울어도 그 마음은 흔들릴 줄 몰랐다. 소년의 심장은 아가씨를 깊게 품은 채 고정되었다. 누이가 사라진 다음에도 소녀는 소년의 첫 번째가 될 수 없었다.

  “물에 발 담그지 말고 양말이라도 신어.”
  “괜찮다니까.”

  아가씨를 품은 소년의 마음을 알게 된 무렵부터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세탁을 다 하고 나서도 무심코 세제 주입 버튼을 다시 누르고 있기도 했다. 청소기를 돌리다 말고 전원이 뽑힌 것도 잊은 채 바닥을 밀고 다니기도 여러 번이었다. 설거지를 하다 잘 깨지지도 않는 강화 플라스틱 식판을 몇 개나 못 쓰게 만드는 바람에 눈총을 받은 적도 있었다. 구역질이 나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밤에도 자다 말고 몇 번이나 시트를 걷어차며 일어났다.
  연구소에서 실험대상으로 이용되던 시절에 주입받은 약물의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했다. 하지만 운동을 하고 야채와 물을 많이 먹고, 때로는 진통제와 안정제를 처방에 따라 복용해 보아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사소한 실수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몸은 점점 지쳐갔다. 도면이 훤히 보일 정도의 간단한 MS를 조종하다 말고도 불쑥불쑥 손이 잘못 나갔다.
  어째서 이 모양일까. 소녀의 질문에 대답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길을 잃고 헤매던, 소녀가 찾아낸 바로 그 사람이었다. 텅 빈 눈 안에서 소녀와 접촉한 것은 잔혹함에 상처입고 찢어진 그의 마음이었다.
  아아.
  마음이란, 마치 잠자리 날개인양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찢어질 수 있을 만큼 엷은 것이었던가.

  - 그만둬.

  머리를 왕왕 울리는 목소리는 마음이 찢어진 그 사람의 속삭임이었다.

  “카미유가 그랬어.”
  “뭐랬는데?”
  “자기는 지금, 마음이 찢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행방불명되었던 그 사람을 겨우 찾아낸 이곳은 청량한 북구의 바닷가. 그가 왜 머물던 병원을 떠나 환자복을 입은 채 이런 곳까지 달려왔는지는 자신도 아마 잘 모를 것이다. 어쩌면 단순히 격한 전투의 흐름을 가장 읽기 편한 곳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고, 땅이 끝나는 이곳에 도착하자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그냥 여기에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물게 정결한 해안을 보고 있노라면, 일부러 그가 이곳을 찾아 온 건 아닐까 싶은 의심마저 들었다.

  “카미유는 정말 다정해.”
  “그래?”

  지금도 그 사람은 소녀를 향해 기를 쓰며 말을 거는 중이었다.

  - 이제 그만둬.

  아마도 그의 말은 맞을 것이다. 스스로를 다스리려면 먼저 제멋대로 날뛰는 이 격정부터 고삐를 채운 뒤 잠재워야 하리라.
  그러나 마음이란 것이 찢어질 수 있다면 언젠가는 접을 수도 버릴 수도 있을 터.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참아볼 생각이었다. 소년에게 부담을 지울 생각은 없었다. 소녀는 사실 소년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와 그녀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면 그 틈새에 끼어들어 훼방 놓는 짓을 두 번이나 할 생각은 없었다. 소녀는 소년이 그의 누이를 잃었던 사건에서 처절하리만큼 확고부동한 교훈을 얻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그가 아끼는 그 어떤 것도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바닷바람이 침식하는 것은 쇠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아마도 그 사람은 그 때문에 여기까지 아무 말도 없이 달려온 것이 아닐까.
  그래서 소녀는 금세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이 바다에 남았다.

  - 너, 그러다간 죽을 거야.
  “응. 그래.”

  소녀는 지금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음에 상처 입은 나머지 스스로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결국 자신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리라. 어쩌면 전투 중에 빤히 적을 보면서도 조종간을 놓쳐 죽게 될는지도 모른다.

  “플, 안되겠다. 돌아가자.”
  “싫어. 조금만 더.”
  “자식아. 너 몸이 불덩이인 거 알고는 있어?”

  소년은 소녀의 힘없는 앙탈을 무시한 채 작은 몸을 안아 올려 도다이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녀를 끌어안은 채 해변을 걸어가는 소년. 마치 연인이 된 것만 같다. 소녀는 고열로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소년의 어깨에 기대고 나직한 목소리로 소년을 불렀다.

  “쥬도.”
  “응?”
  “...아냐, 아무 것도.”

  지금 소년을 불러 세워도 무에 소용이 있겠는가. 설령 소녀의 마음을 지금 내보인다 해도 소년은 조금쯤 미안해한 뒤 결국 그의 연인에게로 떠나 버릴 것이다. 소년은 소녀를 그저 귀여운 어린 아이로만 볼 뿐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여겨줄 의사가 애초부터 없었다. 서로가 만났던 그 순간 동생 같은 어린 여자아이에게라면 누구에게나 다정하였을 그 마음을 자신에게만 배려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소녀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결국 두 마음은 맞았던 것이 아니었다. 맞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일방적인 오해였다. 그는 소녀의 가족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오빠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사실.

  “뭔가 말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바다, 더 보고 가면 안 돼?”
  - 어째서 그래야만 해?

  플은 두 눈을 꼭 감고 카미유의 구슬픈 목소리로부터 마음을 닫아걸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소년을 위해서라면 스스로가 없어지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소녀는 이미 멈출 수 없는 감정을 담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소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소년의 마음을 잡을 수 없는 것이 분하기 그지없었다. 사라진 후에도 소년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누이도, 명랑한 성격의 군인 아가씨도 미웠다. 자기가 찾아낸 멍청한 눈의 바보 같은 사람에게도 화딱지가 났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산산이 부서진 마음으로도 마치 소년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이 바보야. 네 몸을 보고 얘기를 해.”
  “난, 아무래도 괜찮은데....”

  그러나 누구보다도 소녀가 싫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욕심을 당당히 표현하지 못한 채 꽁꽁 숨기는 것도 얼척없지만, 십 년 남짓한 짧은 생애일망정 처음으로 팔딱거리는 심장을 두고도 그 마음을 부끄러워하는 스스로가 아주 질색인 것이다. 소녀는 마음먹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똑 자기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앙칼지게 소리쳐 주리라.
  너 따위는, 죽어버리라고.

  “플, 괜찮아? 어이, 플!”

  소녀는 먹먹해 오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소년의 품 안에서 정신을 놓기 직전 다시 한 번 이를 앙다물었다.

2009/02/10 16:07 2009/02/1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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