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날지 못하는 스트레스는 새장의 새를 죽게 만든다. 돼지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부색이 변하고 근육세포가 용해되어 고기가 흐물흐물해진다. 그뿐이랴. 어미 토끼를 놀라게 하면 새끼들을 잡아먹어 버리기도 하는데, 위험에 스스로 대처하는 보호본능과는 다른 양상을 보일 때도 많다. 식물에게 스트레스를 주면 잘 자라질 못하고 아무리 물을 주어도 결국은 누렇게 말라죽는다.
  세포 하나하나에도 스트레스는 존재한다. 혼도 없는 작은 세포라고 무시하지 말자. 만일 도를 넘는 스트레스가 주어지면, 세포는 스트레스의 해소를 포기한 채 자기사멸과정에 들어간다. 세포 단위의 자살시도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세포 단위로 삶을 포기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더 큰 단위체인 동물이라고 해서 그런 시도가 불가능할 리 없다.
  가령 인간이라 하더라도.

  "으-윽...."

  가이 시덴은 다시 한 번 찾아오는 통증에 배를 움켜잡고 몸을 웅크렸다.
  병원에 인간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기다린 지도 어언 두 시간이 넘었건만 이름이 불리기는커녕 아직 대기실 문턱에도 못 들어갔다. 번호표랍시고 딸랑 숫자 하나 적어 대충 나눠준 종이만 붙들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다. 적이든 아군이든 아무나 치료가 가능한 중립 콜로니의 종합 병원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

  "차라리 그냥 응급실로 들어갈 걸."

  사실 복통이 어제 밤 정도만 되었으면 당장 응급실로 가야겠다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도 없이 우주공간에 둥실 떠 있는 배 안에서 아프다고 꽥꽥 고함쳐 가며 밤을 새고 보니, 의외로 고통의 강도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상습적인 꾀병 환자를 벌하러 왔다가 허여멀건한 얼굴을 보고는 냅다 의무실로 던져 넣었던 브라이트 함장도, 다음 날 의외로 멀쩡히 걸어 다니는 그를 보면서 역시나 꾀병이었던 걸까 하고 의심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함장은 의심을 하면서도, 전날 밤의 상태도 있고 출항 이후에 또 아프면 곤란하니 기왕에 중립 콜로니로 들어온 김에 검사나 해보라며 의외로 선선히 외출 시간을 내 주었다. 그리하야 진단을 핑계로 좀 놀아 보고자 가벼운 마음으로 룰루랄라 외출증을 들고 나왔던 그였으나, 문제는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 터졌다. 병원에는 대기자만 이백 명 가까이 되는 데다 놀다 오려고 번호표를 받자마자 다시 복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죽겠다...."

  위장을 찌르던 바늘같은 통증이 거세지자 가이는 내뱉듯이 중얼거리며 온 몸을 달팽이처럼 돌돌 말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냐.
  식중독 같은 거라면 혼자 이렇게 앓고 있을 리가 없었다(최소한 호시탐탐 자신의 밥을 노리는 세 꼬마 놈들이라도 같이 아파야 했다). 식당 뒤로 몰래 들어가 배식 전의 반찬을 따로 훔쳐먹거나 한 적도 없었다(적어도 최근에는).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젠장! 배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이거 혹시 죽을 병 아냐?
  아예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그는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어 주던 큰누이 같은 아가씨를 떠올렸다. 의무실에서 땀을 닦아주면서 그렇게 말했었지.

  - 전장의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요.

  하기사. 여태껏 죽여 온 사람의 수를 생각해보면 지금이 죽을 때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역시,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란 사람의 모든 것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래서 뱃속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일까?

  "후우...."

  꽤 아팠지만 가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억지로 몸을 폈다.
  의연하게 있자. 죽을 때 죽더라도 무슨 병인지는 알아봐야지.

                                                  *                                   *

  거의 세 시간을 기다려서 의사 앞에 눕자, 의사는 무심한 태도로 아픈 곳을 확인하며 배를 꾹꾹 눌러댔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픈데 확인사살까지 하다니!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괜히 수술하겠다며 칼이라도 들고 나올까 겁이 난 가이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약을 처방할 테니 약을 타신 다음 이틀동안 복용하세요."

  어라?
  무슨 병이라던가, 몸조심 하라던가, 입원이 필요하다던가, 유언장을 장만하는 편이 좋겠다던가 그런 얘기는 전혀 없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충 본 거 아닐까, 저놈의 의사.

  "저기...."
  "네?"
  "약만 먹으면 되나요?"
  "네. 식후에 드세요. 간호사, 다음."
  "어, 그러니까...저기."

  무심하던 의사의 표정에 약간 짜증이 섞이는 것을 보면서도 가이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어디가 아픈 건가요?"
  "...."

  의사는 차트를 읽다 말고 한 순간 망설이는 것 같았다. 답답하게 왜 저러는 거지. 나는 진실을 원한단 말야.

  "최근에 식사를 제대로 안하셨죠?"
  "네...네. 먹기도 귀찮고 해서 영양제 같은 걸로 대충...."
  "역시."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가이를 바라보던 의사는 드디어 결심한 듯 가벼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변비가 너무 심하시네요. 군인들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긴 하지만, 이 지경이 된 건 처음 봐요. 일단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까 드시고, 앞으로는 운동 좀 하시면서 야채와 물을 많이 드십시오."

  가이는 앉아 있던 동작 그대로 돌이 되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만병의 근원은 게으름이다. 부지런 떨며 살면 의사가 필요없다.
  우리 모두 이룩하자. 웰빙 라이프.

2009/02/10 15:55 2009/02/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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