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회

from Fanfic/Gundam 2009/02/10 15:52
보낸사람 : 리처드 B. 초이 [사이드 3, 48반치]
받은날짜 : 0080년 02월 13일 13시 45분
편지제목 : [Re] 잘 지내시는가?


  이거 정말 오래간만이군! 엊그저께 메일함 열어보고 반가워서 깜짝 놀랬지 뭔가.

  답장이 반년이나 늦었다고 사과할 것은 없어. 전쟁통이라 상황이야 다들 뻔한데 뭘. 콜로니 간 통신도 힘들었는데 달과 사이드 3이면 두말할 나위도 없지. 그쪽도 사이드끼리의 사적 전화는 아직 안 되지?

  여기도 아직 엉망이야. 통신만 말썽이겠나. 두어 달 전에는 생필품이 동나는 바람에 마트 주인들이 대박이라며 좋아라 물건값을 올려 팔다가, 결국 그 물건마저 떨어지고 난 뒤로 한 달 넘게 납품이 안 되는 바람에 가게세를 못 내 쪽박 차게 생겼다고 울먹였던 적도 있었어. 종전되고도 한 달 정도는 장비며 물건이 잘 돌지를 않더구먼. 그 바람에 로이네 정비소는 문을 아예 닫아버렸고. 근 40년이나 한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가게를 치우는 걸 보니 좀 섭섭하대. 인사나 할 겸 들렀더니, 돈이 없어서 문을 닫는 주제에도 단골이었다고 공구 세트를 그냥 넘기더라고. 그 할아범 정말로 올곧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지.

  지금은 그래도 사정이 많이 좋아졌어. 유통기한이 다 되어 가는 폭빈 통조림밖에 먹을 게 없다고 징징대던 우리 마누라도 요즘은 곧잘 장을 봐 와서 요리를 하곤 해. 아직도 물가는 여전히 높지만, 두 달 전에 비하면 식료품 값이 절반이나 떨어졌으니까 말야. 특히 야채 값은 많이 내렸어. 40반치의 그린하우스 기억하지? 거기가 9월부터 수출을 중단했다가 두 달쯤 전부터 다시 출하를 시작했거든.

  뭐니뭐니해도 먹는 문제가 좀 해결이 되고 나니까 종전이 되었다는 실감이 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더라니까. 자네 빼고 남은 4총사가 한 번 모이려 해도 먹을 게 없으니 어디 그게 되어야지. 근 석 달인가를 다들 집에 틀어박힌 채 한 번도 못 모였어. 며칠 전에야 겨우 다시 만나서 한 잔 했다네.

  자네 식구들은 다들 별 탈없이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이구먼. 특히 애들이 안 다쳤다니 정말로 큰 복 받은 줄 알아. 우리야 나이든 노인네 둘뿐이니 다치고 할 일도 별로 없었지만...다른 녀석들 집은 그렇지도 않아. 아직 다른 녀석들에게는 메일 안 보냈지? 자식들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안부 묻기가 어려운 요즘이니 말야. 나도 사촌들한테는 함부로 메일 쓰기가 어려워 통신이 힘들다는 핑계 대고 아직 제대로 연락을 못 해봤어. 우리 마누라가 아무 생각 없이 오촌 조카 안부를 물었다가 죽었다고 답장 오는 바람에 미안해 죽을 뻔한 적이 있었거든. 그러니 내 자네한테는 이런저런 사정을 미리 얘기해 둠세.

  그러니까...커크네 둘째 펠릭스 기억하나? 자네가 그곳으로 이민 가기 직전에 결혼식 했던 애. 그 녀석이랑, 마누엘네 아들 루카가 죽었어. 죽었다는 소식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참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더라고. 왜 고 녀석들은 둘이서 동갑이라 엄청 친했잖나. 고등학교까지는 같이 학교 다니기도 했고 말야.

  펠릭스는 결혼하고 사이드 2로 이사를 갔었는데, 전쟁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서 살던 콜로니가 통째로 날아갔다고 하더군. 루카는 그 소식 듣자마자 가출 비슷하게 해가지고서는 군에 입대했다가 얼마 안 있어 사망 통지서가 날아왔더라네. 지구 상륙 부대에 투입되었다가 정작 지구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대기권에서 공격을 받았던 모양이야. 객사를 했으니 제대로 묘를 잡을 수도 없고, 구청에 사망 확인하느라 커크랑 마누엘은 구청 문지방이 닳도록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했다네. 안 그래도 자식이 죽어 가슴에 대못이 박힐 판인데 몇 번이고 확인을 해 보자고 나오니 정말 속 터질 노릇이지. 나랑 보리스가 몇 번이나 같이 따라가서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는 법이 어딨냐고 수없이 하소연을 했는데도, 공무원들이 유전자 감식 확인을 하기 전까지는 꿈쩍도 안하더라고. 정말 독한 사람들이야.

  그렇게 근 열댓 번을 오락가락 하는 게 안 되어 보여서 10월 말쯤에 보리스랑 내가 거하게 한 번 쏘겠다고 B&J 바에 데리고 갔었는데, 그 자리에서 마누엘이랑 커크가 크게 싸웠어.

  자네도 알다시피 마누엘은 자브로에서 살다가 건너온 지 얼마 안 되잖나. 그리고 커크는 아버지가 북유럽에서 살다 이민 온 사이드 3 토박이고 말야. 진지하게 얘기한 적은 별로 없지만 아무래도 정치 성향이 달라도 많이 다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이 동네야 워낙에 지온 분위기가 팽배한 곳이고, 전쟁 전만 해도 루카가 지 애비인 마누엘이랑은 영 딴판으로 지온당 지역구 홍보부장을 쪽 해온 탓에 정치적인 문제로 부딪칠 일은 별로 없었어. 어차피 사느라 바쁜 우리들이야 투표 같은 건 잘 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펠릭스랑 그애 신부 둘 다 시체고 뭐고 하나도 건지지 못했으니 등록된 유전자로 감식을 하자는 통보가 온 다음이 일어났다네. 루카 말로는 펠릭스가 죽은 게 지온 군의 공격 때문이었다는 거야. 사람들 사는 콜로니에다가 독가스를 집어넣어서 지구로 투하했다는 거지. 그래서 시체는커녕 옷자락이나 물건 하나도 안 남은 거라나.

  그게 사실인지 어떤지는 나도 뭐라 말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거나 루카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네. 지온당 홍보부장 씩이나 했던 녀석이 그렇게 믿는 걸 보면 정말인지도 모르지. 하여간 그렇게 몇 날 지내다가 루카가 말도 없이 연방군에 덜컥 입대를 해 버렸어. 사실 마누엘이야 아들이 지온군에 입대하는 것보다는 연방군에 입대를 하는 쪽이 더 마음이 편했을 거고, 또 스무 살도 넘은 녀석이 제 맘대로 입대를 했으니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잘 했다 해 주었던 모양이지. 그런데 커크는 그게 내내 불만이었던 게야. 어제까지만 해도 지온에 충성하던 녀석이 손바닥 뒤집듯 연방군에 입대해 버렸던 건 배신이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다네.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마누엘은 시비 붙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어. 어차피 아들이 죽어서 힘든 녀석하고 괜히 싸우는 것도 친구로서 할 짓이 못되니까.

  그러다가 루카도 사망 통지가 날아오고, 그 녀석도 시체 한 자락 못 찾았다 소리 들려오고, 마누엘도 신경이 엄청 날카로웠지. 그 때 커크가 바에서 또 그 얘기를 꺼낸 거야. '우리 아들은 배신 같은 건 안 했다. 연방 같은 골통들 따위를 위해 죽은 것도 아니다.'라고.

  그 말에 마누엘이 폭발해 버린 거야. 자기 잔에 있던 술을 커크 머리 위로 쏟아부어 버렸다네. 그때 보리스랑 내가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몰라. 둘 다 한 성깔 하는 놈들이니 바 한가운데서 주먹질 오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더라고. 사실 커크도 속은 끓고 자기 성질은 어떻게 못 이기겠고 하니 말이 그렇게 험히 나온 거 아니겠나? 아예 마음먹고 쌈질을 해 볼 요량이었던지 벌떡 일어나 마누엘을 노려보았는데...결국 때리지는 못 하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어.

  전쟁통에 자식을 군대에 보내 놓고도 얼굴 한 번 안 찌푸리던 마누엘 녀석이...울고 있었거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울었던 건 아니었는지도 몰라. 여자들처럼 통곡을 하며 울었던 건 아니니까. 하지만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쉴 새도 없이 줄줄 흘러 떨어지는데 마음이 어찌나 참담하던지. 어찌할 바를 몰라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냥 눈물 뚝뚝 흘리면서 바 밖으로 뛰쳐나가 버리더군. 커크는 술을 뒤집어 쓴 채 새로 한 잔 더 받아서 그냥 마시고만 있고.

  그 이후로 우리는 한 자리에 모이지를 못했다네. 물론 식료품이 부족해져서 집에서 먹을 것 살 돈도 모자란데 밖으로 나가서 뭘 먹거나 하는 건 꿈도 못 꿨던 이유도 있지. 부족하다 보니 한데 모여 분위기를 잡을 만한 여유도 없고. 하지만 우리가 한두 해 친구도 아니고, 얘기만 되었으면 스프 끊여 놓고 누구 집에 모일 수도 있었을 거야. 솔직히 보리스네 부부와는 두어 번 더 만났거든. 하지만 커크와 마누엘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게 그 이후로는 계속 마음에 걸렸어.

  뭐랄까,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을 건드렸던 것 같은 기분 있잖나.

  그러다 종전 되고, 며칠 전에야 겨우 조금 마음들이 풀어졌을 것 같아서 한번 모이기로 마음을 먹은 거야. 사실은 마누엘이 빼려고 하는 걸 보리스가 끌다시피 해서 데리고 왔지. 처음에는 한참을 서먹하게 얘기가 오갔어.

  하지만 우리가 괜히 삽십 년 오총사였나? 산전수전 다 겪고 싸우기도 수천 번이었는데. 결국은 커크가 미안했다고 마누엘에게 술 한 잔 따라 주더구먼. 마누엘도 알면 됐다 하고는 그냥 받아서 마셨어. 그 다음부터는 분위기 좋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얼큰하게 취할 때까지 마셔댔지. 30대 시절의 코스 기억하지? 그 코스 그대로 밤새도록 5차까지 갔었다구. 어때, 부럽지 않나?

  아비들이 살아 으르렁댄다고 해도 죽은 아이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전쟁이라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야. 우리 젊었을 때는 누군가 이 험한 세상을 한번 확 쓸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도 많았지. 하지만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적게 남았다고 여길 만한 나이가 되고 보니, 앞날 창창한 젊은 것들이 그렇게나 죽어버렸다는 게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어. 앞으로는 무슨 이유로든 간에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 작년 한 해가 아예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4차 끝날 때쯤, 날짜는 안 맞지만 우리끼리 그 날을 그냥 작년 망년회 날로 정했다네. 두어 주 있다가 주류수입이 다시 개방되면 신년회를 하기로 했지. 그때 통신회선이 많이 복구되면 얼굴이나 한번 보자구.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새로 연 햄버거 가게가 잘 되기를 비네.

                                                                                                                     0080년 02월 12일
                                                                                                                     친구 리처드가

PS. 자네 같은 덩치가 주방을 맡아도 정말 손님이 오나?


받는사람 : 스틸 A. 베게나 [월면, 그라나다]
첨부파일 : 없음

2009/02/10 15:52 2009/02/10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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