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ortrait

from Fanfic/Gundam 2009/02/10 15:53
MS ERA 0099
095 page
72) A PORTRAIT 참조

이 글은 '망년회'와 간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선임병은 단단히 겁을 주고 갔다. 여기서는 한낮에도 해를 볼 수 없다고.
  이곳은 늪지대가 다 되어 가는 질척한 강가를 둘러싼 갈대밭이라, 물안개가 항상 연기처럼 자욱하게 피어올라온단다. 맑은 날 정오에 머리 위를 쳐다봐 봤자 해가 젖빛 유리를 거쳐 보는 것처럼 뿌옇게 보일 뿐이니 자라는 것도 죄다 음지 식물들 뿐이라나. 초소 주변을 흐르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탓에 한낮에도 목덜미가 선뜻한 것은 기본이요, 바로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온 다른 보초병조차 희미한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아 깜짝깜짝 놀라는 일도 종종 생긴다 했다.
  거대한 자연환경에 익숙한 지구 출신은 그나마 좀 낫다. 하지만 무거운 대기에 짓눌려 본 적 없는 콜로니 출신 병사들 중에는 이곳 보초를 일주일도 채 서지 못하고 헛소리를 지껄이며 돌아버려서, 정신병원에 들어간 병사들도 제법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어쩌긴. 저걸 절대로 끄지 말라는 거지."

  그러면서 선임이 가리킨 것은 초소 꼭대기에 달려 있는 작은 할로겐 등이었다. 납작하게 생긴 등에서는 샛노란 빛이 줄기차게 튀어나와 등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음침한 물안개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정전이 되지 않는 한, 최소 한 자락의 공간만큼은 안개에 양보하지 않고 확보할 수 있을 듯 하긴 하지만...그는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저럴 거면 뭐 하러 여기서 보초를 섭니까? 아예 여기 부대 있다고 광고판 세우죠?"
  "뭐어, 상부 입장으로는 여기가 지도상 중요지점이라 보초서는 걸 포기할 수는 없는가봐. 일단은 저쪽에 차단 스위치가 있긴 있지만, 절대로 건드리지 마. 알았지?"

  콜로니 출신의 신병에게, 그것도 야간에 이 자리를 넘기는 것이 못내 미덥지 못한 듯 선임은 다시 한번 신신당부를 했다.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게 말이야...."

  선임은 그의 질문에 마치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몇 번 살핀 뒤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자리는 귀신이 나오는 자리거든."
  "귀신요?"
  "쉿!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마."

  신병은 다시 한번 헤에 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우주로 인류가 생존지역을 넓혀 가는 초과학 시대에 귀신이라니. 이 무슨 태고적의 원시적인 발상이라더냐. 신병이라고 얕잡아 보고 놀리는 건가? 그러나 선임의 얼굴은 그저 가볍게 여길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 부대에선 그 일이 전부 자리 탓이라고 생각해. 물론 공식적으로야 원래 미친놈들이 자리 지키다가 제풀에 발작을 일으켜 실려간 걸로 되어 있지만, 그 녀석들 모두 정신건강 테스트에 다들 멀쩡히 통과한 놈들이었단 말이야."
  "테스트가 언제나 맞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적과 싸우다가 돌아버린 것도 아니고 멀쩡히 보초 서다 미칠 놈들이 대여섯이나 이 부대에 한꺼번에 모여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꼭 귀신이 아니라고 해도, 뭔가 있긴 있는 거야. 이 지방 출신 병사들도 여기는 가능한 보초를 서지 않으려고 한다구.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대로 해. 조심해서 나쁠 거 없어."

  선임병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짐하듯 두어 번씩이나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미 꽤 어둑어둑해진 안개 사이로 슬그머니 사라져갔다.
  혼자 남은 그는 부동자세로 서서 안개 사이로 먹물처럼 가라앉는 어둠을 한참 동안 마주보다가 이윽고 머리 위에 장치된 할로겐 등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제나 켜 두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지, 차단 스위치 위로는 뽀얀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초소 둘레의 낮은 땅에서는 이 주변의 다른 곳에서는 자랄 수 없을 양지 식물도 두어 종류 눈에 띄었다. 이유야 어떻든 등을 오랫동안 켜 두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던 듯. 그러나...

  "흥."

  그는 피식 웃으며 할로겐 등을 꺼버렸다. 마치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실낱같은 고뇌의 흔적도 없었다. 보초를 서면서 나 여기 있소 하고 불을 켜고 광고를 한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숭고한 군인정신에 위배되는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 같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는 등을 켜 두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듯 입을 비죽거리며 비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길로 가라면 샛길로 빠진다. 불을 켜라면 끄고 본다. 그리하여 그는 명령을 따르는 성실한 군인의 자세를 냅다 집어던져 볼품없는 쓰레기로 만들었다.

  "귀신이 이 따위 빛 정도에 도망갈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마이린?"
  "그러게."

  그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의 앞으로 작달막한 여자의 형상이 하나 떠올라서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하늘거리는 옷만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으며 그의 눈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어왔다.

  "오래간만이야 마이린. 그런데 그 옷, 야광 드레스 입은 거야?"
  "루카는 여전하구나."

  마이린이라 불린 여자는 그의 농담에 반응해서 쿡쿡 웃으며 그의 어깨를 익숙한 동작으로 툭 쳤다. 그 역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어 마구 헝클어뜨리면서 낄낄대며 웃었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군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여자가 군사 지역에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태도가 아니었다.

  "여기 진짜 안개가 지독하네. 춥지 않아? 옷 벗어 줄까?"
  "난 괜찮아. 너야말로 중무장하고 있는 게 더워 보인다."
  "아하하. 사실은 조금 그래."
  "그렇지? 겉옷은 벗어라."
  "응."

  루카는 마이린을 향해 싱겁게 한번 씩 웃고는 총을 옆으로 그냥 던진 다음 겉옷을 벗어 대충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거 깔고 앉아. 진흙 투성이라 지저분하니까."
  "오호. 이러니까 꼭 신사 같잖아?"
  "난 원래 신사야.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어."
  "농담도 잘하셔-."

  마이린은 입을 비죽거리며 그의 말을 비웃는 척하다 결국은 크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컴컴하고 진득한 안개를 따라 멀리 퍼져나갔다.
  청량하고 명랑한 소리...아주 오래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보고 싶었어."

  루카는 마음에 담아둔 채 한 번도 말한 적 없던 얘기를 불쑥 입 밖으로 꺼냈다.
  얘기를 꺼내자마자 입안으로 위액이 넘어오는 듯한 시큼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일생동안 한 번도 얘기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은 입도 벙긋 못 해보았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위산의 역류 따위가 다 무에랴.

  "정말로 보고 싶었어."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큰 소리로 외치지도 못하고 겁먹은 목소리로 부끄러운 고백을 했다.
  뱃속부터 친구였던 녀석의 아내를 넘본다는 것은 결코 당당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니까...설령 그녀를 더 먼저 알고 더 빨리 사랑했더라도 그것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 일찍 알았으면 일찍 고백했어야지. 앞서 사랑했다면 앞서 손에 넣었어야지. 그는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제일 크고 맛있는 사탕을 남겨둔 채 다른 군것질거리를 차근차근 해치우는 어린아이처럼, 여건을 먼저 만든 다음 그녀를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남는 사탕을 보고 있던 친구는 맛있겠는데 왜 안 먹고 있느냐면서 그것을 냉큼 집어가 버렸다. 놓친 뒤에 울어보아도 그 사탕을 다시 손에 넣을 수는 없는 법이라서 그는 그냥 울며 떼쓰기를 포기해 버렸다.
  남은 것은 학생시절의 어느 날엔가 찍었던 그녀의 사진 한 장 뿐.
  진작에 고백의 말이라도 건네 볼 것을. 차라리 거절당하더라도 그 편이 나았을 텐데.

  "네가 너무 좋아."

  마이린은 미소지은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 날 그에게 찾아와서 몹시 울었다. 그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오 분만 더 울고 있었어도 그는 그 녀석이 그렇게 힘들게 하면 차라리 나한테 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그가 지온당 찬성 시위를 하면서 돌렸던 자원 입대 서류에 그 녀석이 서명했던 것 때문에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 마이린, 펠릭스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깟 서류 같은 건 내가 책임지고 회수해 줄게.

  지구당 홍보부장의 지위를 이용해 본 것은 그때가 처음. 펠릭스가 도대체 왜 입대 통보 서류가 안 오는지 모르겠다며 화를 내어도 그는 그녀를 안은 채 마냥 서 있었던 그날 밤처럼 침묵을 지켰다.

  "왜 내가 아니라 펠릭스야?"

  결국은 이렇게나 뻔뻔하게 물어 걸 거면서.

  "너도 그 이유를 알잖아, 루카."

  아아. 대답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렇게 망설이기만 했을까. 어차피 그녀가 그 녀석을 사랑하는 이유란,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었는데.

  "루카, 그렇게 가만있지 말고 날 좀 봐."
  "...싫어."

  그는 아직도 그녀의 얼굴은 마주보지 못 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그녀를 얻어보겠다고 나서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지온에만 미래가 있으니 지온군을 믿으라며 큰소리치던 자신이 어느새 연방의 군복을 입고 있는 것도 부끄러웠다.
  그는 홍보부장의 얄팍한 지위를 두 번째로 사용해서 그들의 신혼 보금자리를 가장 안전하겠다 싶은 지온계 콜로니에 잡아 주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그는 우쭐했고 그들 부부에게 가장 좋은 일을 해 주었노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 콜로니는 안에 독가스가 채워진 채 지구로 떨어졌고, 그들 부부는 당연히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사랑과 우정과 자부심과 신념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어차피 같은 짓을 반복할 거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념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
  그는 시체의 한 조각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사방을 헤맸다. 지구로 내려가는 부대에 자원할 수 있다기에 앞 뒤 재보지도 않고 연방군 지원 서류에 서명했다. 배신자라며 욕을 먹는 것도,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며 뒷소문이 오가는 것도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바라는 것은 다만 한 가지 뿐.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괜찮아. 우리는 항상 여기 있었으니까. 너야말로 힘들었지?"
  "응. 하지만...."

  그는 겨우 고개를 들어서 그녀의 얼굴을 향해 목이 메인 채 입을 열었다.

  "정말로 만나고 싶었어."

  루카의 두 눈에서 미처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비로소 흘러내렸다.
  마이린은 조용히 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를 달랬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그러니까...이제는 쉬자."
  "펠릭스도 같이?"
  "그래. 그이도 같이."
  "응...."

  이제는 누가 누구를 차지하는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아.
  지구로 강하하던 순간 대기의 마찰열을 이기지 못한 우주선이 불타오르던 기억이나, 같이 낙하하던 동료들의 비명, 온 몸에 화상인지 동상인지 구분도 안 되는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어 산산조각나던 순간에 들이쉬던 최후의 호흡 같은 것도 더 이상 아무렇지 않아.
  그러니까 셋이서 함께 별의 바다를 보러 가자.
  그는 그녀의 품에 안긴 채로 눈을 감았다.
  이내 할로겐 등이 다시 켜지고, 예의 노르스름한 빛은 다시 한 번 주위의 안개와 구분되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간 아래에는 아무도 없이, 차단 스위치 위로 뽀얀 먼지가 흔들림 없이 덮여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 교대시간이 되어 찾아온 선임병도 스위치 아래 놓인 사진 한 장 말고는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2009/02/10 15:53 2009/02/10 15:53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