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下 (15금)

from Fanfic/Gundam 2009/02/10 15:50
  "술, 더 줘?"

  잔을 들고 있는 것은 물에 젖은 양 매끈한 검은 머리칼을 가진 여자였다. 여자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가 취한 나머지 머리를 거의 처박다시피 하고 있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양 그득히 차 있는 술잔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응, 응. 그래애."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도 남자는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버쩍 들고 손을 뻗어 잔을 받아 두려고 했다. 하지만 술에 잔뜩 취한 손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잔은 담겨 있던 술을 반 이상 테이블 위에 흘리고 난 뒤에야 남자의 옆에 겨우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여자는 덤덤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아무렇지 않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취했잖아, 너."
  "흐응...그럼 좀 어때? 어차피 떠나는 주제에 뭘."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하는 그의 대꾸에 여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냉정한 눈으로 남자에게 술을 퍼먹이는 여자와 그 술에 잔뜩 취해서도 정신을 놓지 않는 남자. 언뜻 보기에도 애걸복걸 매달리는 남자와 그 남자를 차버리려는 여자의 형상이었다.
  그럼 이제는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지 말아달라며 여자에게 매달려 붙들 차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관계는 지금 연출하고 있는 장면에 어울릴 만큼 살갑고 끈끈한 관계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리 너그럽게 봐 준다고 해도 며칠간 잠자리를 같이 한 업계 여성과 손님의 사이 이상은 절대 될 수 없었다. 함께 지내는 며칠 동안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째서 떠난다는 말에 이렇게 상처받은 것처럼 술을 넙죽넙죽 마셔대고 있는 것일까. 여자는 무의식중에 손톱 자국이 날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손을 펴서 다시 술병을 집었다. 여차하면 약을 타서라도 완전히 뻗게 만든 다음에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다. 지저분한 일은 이제 늙어서 매력이 시들어가기 시작한 업계 여자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치명적이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일이 시끄럽게 되어서 신용이라도 잃게 되면 큰일이었다.

  "더 줄까?"
  "와인은 질렸어. 이제...응...보드카 어떨까, 응? 같이 마시자."
  "조금 있다가 차가 올 거야. 더 취하고 싶지 않아."
  "체엣."

  왠지 어린애처럼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모습이 귀여워져서 그녀는 표정 없던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띄웠다. 함께 지내는 것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도도 군인답지 않게 상냥하고 예의범절도 그만하면 꽤 갖춘 편이고, 무슨 일로 그렇게 꿈자리가 사나운지 몰라도 잠자다 말고 비명을 지르며 벌떡벌떡 일어나는 버릇이 있는 것만 빼면 침실 매너도 나쁘지 않았다.
  집에는 풀장과 골프장이 있고 차에다 손수 만든 자가용 비행기까지 있다. 사실 이 정도 남자와 살림을 차린다면 영계에 봉을 잡았다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살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다른 남자였다면 먼저 여자 쪽에서 어떻게 한번 물어보려고 발버둥을 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남자는...섣불리 같이 살았다간 목숨이 위태롭다. 연방에서 매력이 다하기 시작한 여자를 최고 시세의 스무 배도 넘게 사들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른 조건은 아무 것도 없이 단지 아무리 오래 있고 싶어도 일주일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하나에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한다는 건 더 이상 있으면 뭔가 조치를 취하겠다는 협박도 함께 그 돈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여자는 그것을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에 일면 이 남자가 불쌍해진 것도 사실은 사실이다. 이 남자가 그의 곁을 스쳐지나간 여자들이 모두 그런 조건을 꼬리표처럼 붙인 채 그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나 여자는 기가 죽은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어쩌면 이 남자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취했으면 그만 자."
  "아냐, 싫어...더 마시겠어. 한 잔 더 줘."

  남자는 다시 텅 빈 잔을 여자에게 건넸다. 술 몇 병을 비웠건만 몸은 테이블에 처박은 채 움직이지도 못하면서도 끝끝내 정신을 놓지 않을 모양이다. 여자는 술병에 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치마 속으로 손을 슬쩍 집어넣어 단 아래 숨겨두었던 약을 남자에게 눈치채이지 않도록 몰래 꺼냈다. 와인과 비슷한 색의 액체가 투명한 비닐 안에서 잔으로 옮겨지면서 칙칙한 빛을 띠었다. 여자는 거기에 남은 술을 마저 부어 약내를 지운 뒤 남자에게 건넸다.

  "자. 이게 마지막이야."
  "흐응."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 잔을 반쯤 입안에 들이부었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은 아무 말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일 분, 이 분, 삼 분.
  슬슬 약 기운이 돌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 여자가 미리 싸 둔 가방을 챙겨 들고 문 쪽을 향했을 때,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가는 거야?"
  "응? 아, 아냐. 차, 응, 아직 차도, 안 왔잖아?"

  허둥지둥 변명하느라 거짓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젠장! 그 약을 먹고도 멀쩡한 인간이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생활을 꽤 해본 여자였지만 저렇게 괴물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망했다. 지금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으니 커다란 가방을 든 모습이 보이지 않겠지만, 얼굴만 들어도 이 모습이 보일 터다. 난장판이라도 부리게 되면 이제는 정말 방법이 없는데.
  여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약 기운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던지 남자는 뭔가 주정하듯 중얼중얼거리다가 미동도 않은 채 입만 벙긋거렸다.

  "...술 가지러 가는 거면...보드카로 가져와...."
  "휴우, 아, 그래. 보드카 가져올게. 기다려. 꼭 여기서 기다려야 돼, 알았지?"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여자는 정신없이 신신당부를 하는 동시에 문을 조용히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남은 남자의 중얼거림은 문 닫히는 소리에 묻혀 결국 여자에게 전달되지는 못했다.

  "...독한 것."

  남자는 아까까지의 행동이 무색할 정도로 멀쩡히 고개를 들어 잠시 문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들었던 고개를 다시 천천히 테이블에 처박으며 처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독한 것. 나쁜 것. 못된 것...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남자의 눈에 언뜻 고통과 비슷한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연방에서 그에게 여자를 비공식적으로 대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여자들이 하나같이 일주일 이상 묵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그 중 단 한 사람도 그를 위해 단 일 초라도 더 있어주지 않았다. 애걸복걸하며 애원해도 그들은 한결같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기 일쑤였다. 약을 쓰는 것도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몰랐다.
  마치 앞을 향해서만 한없이 달려가던 그녀처럼.
  그녀를 잊기 위해 몰래 처방전을 사서 입안에 던져 넣었던 약이 어찌나 많았던지, 이제 엔간한 정도의 최면제 정도로는 꼼짝도 안 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그 여자들 중 어느 누구도 모를 것이다. 물론 얘기하니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그는 여자들이 올 때마다 그들을 즐기면서도 또한 상처받았다.
  그래서 그는 스쳐가는 수많은 여자들에게서도 단지 한 사람밖에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결코 그의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어떻게 부정할 수가 있겠는가.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주인 있는 사랑을 얻으려 뛰어들었던 고로 처절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잡고 싶었는데, 내 것으로 하고 싶었는데...나쁜 것.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남김없이 소유하고 있는 그의 가장 강력한 적 앞에서 그는 감히 한 조각의 마음도 허락해달라 말할 수 없었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탄식하면서도,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거냐 울부짖으면서도, 그녀에게 도저히 그를 버리라 말 할 수가 없었다.
  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나에게 그런 웃음을 보였느냐고 따져 볼 수조차 없었다. 그저 눈여겨보아 준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웠기 때문에. 어쩌면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마저 사랑해버렸기 때문에.
  지독할 정도의 애정, 끔찍할 정도의 사랑.
  그러나 결국 보답을 받을 수 있을 리 없었던...뒤늦게 약 기운이 도는지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 나쁜 것, 못된 것.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도 모질 수가 있나.

  차라리 꼴도 보기 싫다며 고개를 돌려 버렸더라면 훨씬 쉽게 돌아설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그를 향해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웃어주면서도 그녀를 달라고 떼를 쓰는 그의 어린애 같은 열정을 조금도 받아주지 않았다.
  허긴 원래부터 어머니란, 감히 손 뻗어 잡을 수 없는 존재이지 않던가. 어린애의 특권으로 도저히 놓아줄 수 없노라며 떼쓰는 그를 그녀는 단지 노리개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미칠 듯 사랑스럽던, 누구보다도 그의 마음에 근접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 하지만 영혼의 반쪽은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존재를 위해 그녀의 생명을 바칠 정도로, 그녀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뛰어든 자신 앞을 가로막을 수 있을 정도로.
  결국 나는 그녀의 장난감...아무 것도 아니었던 존재...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 독한 것.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나.

  흐릿한 눈에 비치는 그녀의 투명한 영혼...그러나 그런 것쯤이야 아무러면 어떠랴. 아무로는 약 기운을 빌어 잠을 자 볼 요량으로 반 남은 술잔을 집어 훌쩍 마시고는 휘적휘적 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아무로는 칠흑 같은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다. 주변에 반짝이는 별들이 마치 빛 덩어리를 조각 내 놓은 양 반짝거리며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아무로는 외롭지 않았다.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빛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는 법이라고...그리하여 그는 살아 있었다. 빛을 머금은 채 그의 눈앞을 흘러가는 별들은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그의 혼을 쏙 빼놓을 것 같았다.

  - 봐요, 아름답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까르륵대는 웃음. 그것은 그녀였다. 아무로는 흘러가는 별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 정말로 아름다워.
  그는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는 것 마냥 몇 번이고 그 말을 입 속에서 되뇌었다. 하지만 주위를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들에게서 느껴지는 두려움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점점 그의 주변으로 가까이 다가오면서 품고 있던 원래의 모양새를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하고 날카로운 모빌 아머의 파편들이 그의 몸을 노리는 것처럼 다가오는 것은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손을 들어도 눈을 감아도 그에게는 다가오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왜 내게 이러는 거야, 다가오지 마!"
  - 왜 그러는 거죠?

  다시 한 번 그녀의 고운 웃음소리가 눈앞의 우주로 펼쳐지면서 놀랍게도 꼭 그만큼의 잔혹함이 번져나갔다. 배려도 용서도 없는, 날카로운 얼음장같은 웃음소리에 아무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외롭잖아요? 당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내가 있어줄게. 슬퍼하지 말아요.

  날카로운 조각들 사이에서 투명한 물결 하나가 일렁이면서 그의 앞에 다가와 하얗게 형상을 만들어냈다. 고운 그녀, 아름다운 라라아. 하지만 아무로는 한 발짝이라도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가며 뒷걸음질을 쳤다. 빛나는 그녀...그러나 그녀의 목 위로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녀가 걸친 옷의 널찍한 소매도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느다란 오른쪽 팔의 반 이상은 살이 완전히 날아가 피로 범벅이 된 하얀 뼈와 거기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살점이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거칠게 찢어지다시피 한 목 위에서 뿜어져나온 피는 마치 분수처럼 그녀의 주위로 흩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로는 히익 하고 새된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마셨다. 근육과 살과 뼈가 뒤엉키다 못해 늘어져 너덜거리는 두 팔이 그에게로 다가오는데도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싫어! 오지 마!"
  - 피하지 말아요. 도망가지 말아요...내가 아름답지 않아요?

  잘린 목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그가 갇혀있는 우주 전체를 왕왕 울리는 것 같았다. 아무로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간신히 그녀의 팔을 피해 주저앉았다. 눈앞의 광경에 질린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왜 내게 이러는 거야! 지독한 것, 나는 잘못한 게 아니야!"

  왜 내게, 왜 하필이면 내게! 아무로는 수도 없이 던졌던 질문을 눈앞의 비참한 시체를 향해 다시 한번 던졌다. 어째서 그녀는 내 곁에 있는 것인가, 어째서 살아서는 그렇게 모질게 대했으면서도 죽어서는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거지? 살아있는 그녀를 얻기 위해 그가 얼마나 몸부림치며 그녀를 갈망했던가. 그러나 그녀는 그가 그 자신의 것보다도 소중히 여기던 그녀의 목숨을 너무나 가볍게 스스로 날려버렸다. 그것도 자신이 아닌 그를 위해서.

  "난, 널 갖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서 그런 거야! 그게 뭐 잘못된 거야!"
  - 그래요. 그래서 당신은 나를 가지고 있어...이 몸을...이 나를.

  아무로는 자지러지듯 몸을 비틀며 그녀의 팔을 피해 몸을 굴렸다. 새된 비명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조각난 팔은 단호하게 그를 따랐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몸 전체로 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그에게 끝없이 벌을 주고 있었다.

  - 왜 당신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 왜 내가, 그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만들었나.

  아무로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피에 물든 뼈마디가 볼에 닿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땅이 꺼지고 하늘이 날아가도록 비명을 질렀다.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모빌 아머의 잔해가 사라지고 그녀의 영혼이 한 걸음 물러날 때까지, 그를 둘러싸던 우주가 넓어지고 넓어지고 또 넓어져서 그의 몸이 지구라는 작은 세계로 떨어질 때까지...그리하여 겨우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히엑! 꿈...? 꿈인가?"

  아무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깨지거나 조각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약 기운으로 자려고 했던 것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폭삭 젖어버린 베개에 척척하게 눌린 귀가 아팠다. 등이 눅눅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 베개에 털썩 기대어 숨을 조심조심 고르고 있던 그의 어깨가 어느 순간부턴가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했다.

  "...모진 것, 왜 내게 이러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 희망이란 단어는 그의 가슴에서 설자리를 잃었다. 눈앞의 동강난 시체와 조각난 잔해만큼이나 마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그 날 이후로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히는 것은 희망을 사라지게 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꿈속에까지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더라도 이미 그는 충분히 벌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매일 꿈속에 나타난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명제를 진실이라며 들이밀었다.
  어쩌면 한순간, 그는 그녀에게로 향하던 서벨을 거둘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는 것.
  영혼의 반쪽이던 그녀가 내 앞으로 끼여드는 것이 이미 보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닌 그녀...그래서, 나는 그녀를 죽였나.

  "...나쁜 년...!"

  조금씩 떨리던 어깨는 어느새 크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로는 침대 위에 주저앉은 채 엄마를 잃은 어린애 이상으로 서럽게 울었다.

2009/02/10 15:50 2009/02/1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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