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는 두 눈을 부볐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 거라 감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확인 차 눈을 부릅떠도 보고 세게 뺨을 꼬집기도 해 봤지만 이는 틀림없는 사실. 이럴 수가, 내 살아 생전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니! 이것은 분명 하늘의 축복이 가득한 장면임에 틀림없도다. 저 높은 곳에 계신 이에게 감사와 영광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감추지 못하며 지금의 장면을 눈에 새겼다.
  자고 있지도 않은 아이들이 저렇게 조용할 수가 있다니.
  지금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꼬마들은 그들이 타고 있는 강습 순양함 화이트 베이스를 절대 정숙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원흉이었다. 평소에 웃고 떠들고 실내를 더럽히는 바람에 일거리를 늘려놓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전투 중에도 울고 소리치는 바람에 함장 대행인 브라이트의 작전 명령 전달에 지대한 폐해를 끼칠 뻔한 적도 있었다. 이 영악한 세 꼬마들이 얼마나 용의주도한지 함교로 숨어드는 것을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이들을 조용하게 만드는 방법은 오로지 재우는 것 뿐. 하지만 그 방법도 결코 완전치는 않았다. 꼬마들은 자면서도 넉넉히 코를 골고 이를 갈았으며, 한참 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고 싶다며 울어제낄 수 있는 능력을 너끈히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은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몇 마디 말이 낮고 빠르게 지나가고는 있었지만, 평소처럼 그 목소리가 높은 톤으로 훌쩍 올라간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되레 셋 중 제일 어린 키카가 흥분한 나머지 큰 소리를 칠라 치면 황급히 다른 두 명의 아이들이 키카의 입을 틀어막으며 경고를 주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키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흐응...장난칠 계획을 짜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데...."

  세 꼬마만 모여 앉아 뭔가를 저렇게 궁리하고 있었다면 세일러는 당장에 저 녀석들 또 어디 사고를 칠 생각이로군, 그럼 그렇지 하고 미련 없이 돌아섰을 것이다. 애들은 배식에서 케이크와 캬라멜을 빼돌리는 방법이라든지, 초콜릿 시럽을 아이스크림에 더 많이 뿌릴 수 있는 방법 같은 걸 의논할 때만 저렇게 진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종국에는 주방과 배식구를 온통 더럽히게 되더라도, 그들에게는 약간의 시럽과 케이크가 인구 백만의 콜로니가 날아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니까.
  하지만 세 꼬마 사이에는 웬일인지 하야토가 있었다. 애보기를 하면서 그 애들을 저토록 진지하게 만들 수 있는 청소년이란 세상에 잘 없기 마련. 성질 폭발하면 그 즉시 매일 연습하는 들어치기나 메치기로 상대를 엎어버리려 돌진하는 하야토가 그런 범주의 청소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 시간이면...아무로가 보고 있던 애들을 일부러 여기로 데려왔다는 건데...."

  세일러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분명 그가 올곧게 바라보고 있는 소녀 후라우는 소꿉친구인 아무로를 더 좋아하는 듯 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야토가 연적 뻘쯤 되는 아무로에게 여유를 준다는 건가? 이 화이트 베이스에 진실로 용서와 화해의 기적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그들은 분명 뭔가를 열심히 궁리하는 중이었다. 거의 소곤거리듯 이어지는 대화에는 세 꼬마들뿐만 아니라 하야토도 확실하게 한 몫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꼬마들과의 대화가 잠시 끊어질 때마다 식탁 위에서 하야토가 짧은 펜을 들어 자그마한 종이 위에 표시를....
  에잇. 궁금증을 해소하는 제일 손쉬운 방법이야 뻔한 것을.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악----!"

  순간, 힘차게 울려 퍼지는 사중주가 식당을 쩌렁하게 울렸다. 그렇게나 고요하던 정적의 화이트 베이스는 일순간에 조각조각 분쇄되어 우주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호 통재라.

  "세, 세일러씨!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요!"
  "무슨 소리야? 난 오 분 전부터 여기 있었는데. 도대체 뭘 하는데 사람이 옆에 왔는데도 눈치를 못 채?"
  "와악! 아무 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거야!"
  "보면 안돼!"
  "별거 아냐!"

  세일러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무슨 말을 외치는 지도 모른 채 그저 불긋불긋한 종이 조각을 가리기에 급급한 네 개의 입은 싹 무시했다. 입이 네 개이면 말도 네 마디. 비밀을 지키기에는 말의 개수가 턱없이 많았다. 그녀는 하야토가 등뒤로 완전히 숨기기 전에 잽싸게 문제의 종이를 집어 잡아당겼다.

  "안 돼요!"
  "안돼!"
  "보지마!"
  "우아앙-!"

  ...역시나 네 개의 입에는 신경을 끄도록 하자.
  잡아당기는 손에 힘없이 종이가 딸려오는 걸 보면 분명하지 않은가.

  "찢어지면 안 될 만큼 중요한 건가 보네? 어디...."

  세일러는 종이를 다시 빼앗으려 드는 네 명의 손이 닿지 않도록 높이 종이를 올려서 그 위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콜로니 로또??"

  꼬마들은 비밀이 들키면 야단맞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는지, 세일러가 또박또박 글자를 읽는 틈을 타서 순식간에 우 도망가 버렸다. 그녀의 앞에 남아있는 건 쑥스러운 듯 애써 음료수 자판기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하야토 뿐이었다.

  "이게 뭐야?"
  "모르세요? 에...그러니까, 일종의 복권 같은 거에요."
  "복권?"

  세일러는 손을 내려서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콜로니 로또'라는 큼직한 글씨 아래로는 다섯 개의 칸이 있었고, 칸칸마다 1부터 80까지의 숫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몇 개의 검은 자국은 아마도 숫자를 검은 펜으로 칠한 것인 듯 했다.

  "이게 요즘 유행하는 복권이야?"
  "에, 이 중에서 숫자 아홉 개를 찍어서 맞추는 개수에 따라 상금을 주는 식이에요."

  세일러는 복권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첨 확률도 확률이거니와, 그녀에게 있어서 복권 같은 것에 희망을 거는 행위는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그녀의 삶에 돈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생부와 생모는 갑작스럽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상당한 재산을 마련해 두고 있었고, 양부와 양모도 그 돈에 탐을 낼 정도로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덕이었다.

  "신기하네."
  "이걸 구하느라 얼마나 애먹었는데요. 사병은 복권을 사는 게 금지되어 있거든요. 원래 용지는 돈을 내고 파는 게 아닌데, 의외로 비싸게 주고 샀어요."

  처음의 쑥스러움은 어디로 갔는지, 의외로 하야토는 싱긋 웃기까지 하면서 시시콜콜한 설명을 다 해주었다. 아무래도 세일러가 복권에 비웃음을 날리기보다 호기심을 나타냈기 때문인 듯 했다.

  "당첨금이 커?"
  "삼 개월에 한 번씩 추첨한대요. 여러 명이 일 등이 되면 액수가 작지만, 한 명이 일등에 당첨되면 최소한 지구 뉴홍콩 달러로 40억 달러는 된다던데요."
  "...흐응...."

  지구권의 경제는 한없이 인플레이션이 지속되어 왔다. 100년 전이라면 40억 뉴홍콩 달러로 도시라도 하나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40억 달러라면 그저 한 사람이 어느 정도 아껴 가며 평생을 살만큼의 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지구의 넓은 집에 최고급 자가용 비행기, 최고급 차, 집사와 가정부를 두고 가족과 함께 쓴다면 50년 정도에 떨어지기 딱 알맞은 정도였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인플레를 감안한다면 그보다 약간 빨리 떨어질지도.
  아주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세일러 자신이 가진 것에도 조금 못 미쳤다. 그러나 일반 월급쟁이가 쉽게 만져볼 수 있는 액수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이거 당첨되면 뭘 하려고?"
  "아, 저요?"

  하야토는 약간 쑥스러운 듯 다시 한번 싱긋 웃었다.

  "1등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2등이나 3등 정도 걸리면...중고로 호라이즌 선 디럭스 500이나 사려고요."
  "어?"
  "그리고 꼬마들이랑 벤 앤 피터 가게에 가서 초콜릿 케이크 한 판이랑 아이스크림을 하프 갤론으로 열 통 사 주고...후라우한테 사이드 6의 작은 맨션을 사 주고...."

  하야토가 생각에 잠긴 채 이런저런 것들을 주워섬기는 동안 세일러는 어안이 벙벙한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호라이즌 선 디럭스 500? 그 보급형 수륙양용 자가 비행기 말이야?"
  "아, 아시네요? 보급형치고는 참 잘빠졌잖아요? 수리는 제가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기왕 꿈꾸는 거라면 좀 큰 걸 바라는 게 어때? 1등에 당첨되어서 과이히르 맥시멈 뉴 AP를 새로 산다던가, 디스커버리 2 로얄 옵티마이저를 0079년으로 주문한다던가 해야 되는 거 아냐?!"
  "정말로 자가용 비행기를 참 잘 아시네요. 하지만요...."

  하야토는 다시 한 번 수줍게 웃었다.

  "그것보다는 중고 호라이즌 쪽이 저한테 더 잘 맞을 것 같아요."

  세일러는 할 말을 잊은 채 웃고 있는 하야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오빠는 그녀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생부와 생모가 차별을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오빠는 태어났을 때부터 생부의 뒤를 잇기 위한 사람으로 정해졌으며, 그 스스로 그 상황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갑작스레 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남의 이목을 피해 얼굴도 모르던 의붓 부모 밑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급박한 때에도 그는 그들의 몫을 챙겨두는 데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오빠가 챙겨 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돈을 가지고도 오빠는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가 지기로 되어 있던 책임과 의무의 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래 그의 것이었던 최고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욕구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상황이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때조차도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 신념 때문에, 그는 지금 생부와 생모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으로 죽여 가며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가 물려받은 그 많은 재산은 어디에 쓰였던가? 그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돈, 그의 존재를 지우기 위한 돈, 그의 과거를 새롭게 쓰기 위한 돈...그 모든 돈을 합하면 그녀의 눈앞에서 소박하게 웃고 있는 이 키 작은 소년이 꿈꾸는 금액의 천 배도 넘을 것이었다.
  그 많은 돈을 가지고도, 우리는 왜 그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나.

  "...적네."
  "아하하하."

  권력이 있는 곳에 돈이 있는 법. 정치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누리던 그녀의 생부가 남겨준 돈은 어쩌면 그렇게 깨끗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그 자리를 위해 이 소년 같은 소심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야 하는 걸까.

  "꼬마들이 찍은 번호가 되면 반은 주기로 했어요. 우습죠? 제 거까지 빼면 한 칸 남았는데...세일러씨도 번호 찍으실래요?"
  "아니."

  세일러는 거세게 도리질을 했다.

  "그냥 하야토가 마저 적어."
  "아, 네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번호를 쥐어짜느라 끙끙거리는 하야토 앞에서 세일러는 마치 기도라도 하듯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놈의 빌어먹을 돈 따위.
  오빠같은 사람에게 붙어 있지 말고 이 아이들에게나 와 줘.

                                                  *                                   *

  며칠 후에 세일러는 하야토만을 한쪽으로 몰래 불러내어 작은 선물을 건넸다.

  "에? 이걸 저한테 주신다고요?"
  "어. 광통신으로 바로 결제 가능한 콜로니 로또 용지야. 전에 가지고 있던 건 해당 은행에서 다시 결재해야 된다며? 언제 은행이 있는 곳에 내리게 될 지도 모르잖아. 이건 안 그래도 되니까 그냥 번호 칠해서 전송하기만 하면 돼."
  "그런데, 왜 이런 걸...? 이거야말로 제법 비쌀 텐데요."
  "...보답이 있어야 되지 않겠나 싶어서."
  "네?"
  "아, 아냐. 재미 삼아 내 걸 사는 김에 몇 장 더 산 것 뿐이야. 그냥 받아 넣어. 그럼!"
  "고, 고맙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축복 있기를.
  도대체 뭘 해주었기에 이렇게 비싼 용지를 선물로 열 장씩이나 받았느냐며 하야토가 후라우로부터 인정사정 없는 꼬집힘을 당한 것은 어쨌거나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2009/02/10 15:50 2009/02/1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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