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이, 안 가면 안 될까."

  그러나 지금 그 말을 해 보았자 무엇하리요.
  차는 떠났다. 비행기는 날아갔다. 아무리 힘이 장사라서 차를 집어던지고 비행기를 끌 수 있다고 해도, 떠난 차 뒤에서 손 벌린 채 가는 길을 막겠노라 한다면 서 있는 당사자만 바보가 될 뿐이다. 적어도 막으려면 한 발 앞서서 해야 하는 법.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가는 걸음을 멈추게 할 도리는 없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떠나보내는 일이라면 모르되 진행방향을 180도 돌리는 일을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초능력자 아니면 바보인 게다.
  하지만....후우우. 텅 빈 집안에 긴 한숨소리가 퍼져나갔다.

  "바바?"

  이크.

  "오, 하사웨이 미안. 아빠가 잠깐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자아 얼른 자야지? 어루루-"

  브라이트는 잠시 멈추고 있던 손에 다시 힘을 넣어 품에 안은 아기를 조용히 흔들기 시작했다. 막 들려던 잠이 깬 탓인지 제 어미를 닮은 눈을 접시만 하게 뜨고 골을 내려던 하사웨이도 부드러운 진동이 계속되자 금새 눈가에 힘을 풀었다(물론 아무리 크게 떠 봤자 오리엔탈의 눈은 결코 접시만 해 질 수 없다는 점을 브라이트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기를 어르며 거실을 천천히 돌고 있는 브라이트의 어깨는 세상 모든 짐을 다 짊어진 양 축 늘어져서 조금도 펴질 줄을 몰랐다.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저녁을 먹고 난 뒤에 어느새 식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더러운 접시들의 무게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깨끗하고 싶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 빨래들도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조금 무게가 나가기는 하지만 적당히 얼러 주기만 하면 순하게 잠드는 그의 어린 아들이 짐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하는 요즘 세상에 가사분담이야 당연한 일 아니런가. 그러나 꼭 있어야 할 누군가의 부재는 가사를 그가 돌보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넘어 그에게 엄청난 압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미라이...."

  그의 아내를 부르는 브라이트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누구 모르는 사람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불쌍하게도 아내가 일찍 죽었군 하며 눈물을 글썽일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조용히 지구 왕복선이나 운행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이 연방 장교의 집안에 이렇게 무거운 공기가 떠돌았던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밝힐 것은 밝히자. 그의 아내는 죽지도 않았고 곧 죽을 예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매년 하는 정기검진 결과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은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거니와 사고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건강하고 생기에 넘쳐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남편이 집에서 이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즐겁게 있으리라.
  그럼 바람이 나서 남편과 아이를 버려 두고 도망이라도 간 거냐고? 천만에 말씀 만만의 콩떡.
  미라이는 하사웨이를 낳은 이후 몸조리를 마치고 오래간만에 하이스쿨 동기 모임에 나갔다.
  ...단지 그뿐이었다.
  눈이 점이 되어도 할 수 없는 일. 그녀가 저지른 일이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지금, 지표면이 꺼져서 지구 맨틀이 보일 정도로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그녀의 남편은 차마 그녀를 말리지도 막지도 못한 것이다.
  바보 같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와의 결혼을 위해 연방의 여군이라는 안정적인 직장도 때려치운 그녀다. 동기들 좀 만나고 오겠다고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문제겠는가. 처음에는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하사웨이가 걱정이라며 나갈까 말까를 망설이던 그녀에게 오래간만에 바람 좀 쏘이고 들어오라고 종용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집에 일찍 들어와 산뜻한 봄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마치고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미라이의 동기들은 다들 잘 나가는 집안의 자녀들이다. 물론 그를 낳아준 노아 집안이 형편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그는 목숨을 걸고라도 그 사람하고 한 판 붙어 보겠지만, 미라이의 처녀 때 가문인 야시마 가문과는 아무래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이스쿨의 동기들이라면 하나같이 잘난 집안의 잘난 인간들 뿐 아니던가.
  게다가 동기들이라고 해서 여자들만 모이는 것도 아니었다. 소위 잘 나간다는 변호사나 의사, 정치인 같은 젊은 인재들이 그 자리에 득실거릴 것이다(예를 들면, 캄란 블룸 같은 사람들 말이다). 배경이나 연줄 같은 것이 하나도 없어 승진조차 어려운 일개 대위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돌아온 미라이가 다시 나와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도, 저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유부녀이건 뭐건 상관하지 않고 그녀를 홀리려는 녀석들이 생기지 않을까? 내가 해줄 수 없었던 멋있는 선물, 빛나는 보석, 아름다운 꽃...브라이트는 무심결에 어떤 장면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화려한 개나리 색 드레스를 입은 미라이 주변으로 젊은 늑대들이 득실거리며 그녀에게 선물을 바치고 있었고,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띄운 채 그 중에서 무얼 고를까 즐겁게 고민하는...;;;;;

  "맞아. 그녀는 안개꽃과 에메랄드를 좋아...아냐!"

  브라이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니까! 의심할 사람을 의심해, 머저리 같은 브라이트 노아!
  절망적인 환상은 그를 계속 괴롭혔다. 우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는 데만도 한 시간 족히 넘어 걸리는 하사웨이를 붙들고 애를 먹으면서, 브라이트는 차라리 은근히 그녀를 말려서 보내지 말았으면 하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몰랐다. 그러나 처음에 갈까 말까를 망설일 때 큰소리 펑펑 쳐 놓은 주제에 막상 그녀가 나가겠다고 준비를 마친 뒤에 붙든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게다가 '다녀올게요'하고 인사할 때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즐거워 보이던지! 말은 안 했지만 미라이도 집안에만 있으면서 맺힌 것이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떠올려 보았을 정도였다.
  브라이트는 어느새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하사웨이를 높이 안아올리며 생각했다. 그래. 요즘 돈을 아낀다는 이유로 내가 신경을 좀 덜 쓰고 있었지. 다음 주말에는 하사웨이를 아기방에 맡기고 어디 근사한 데로 가서 식사라도 해야겠어.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안개꽃 꽃다발에 모조 에메랄드 귀걸이라도 한 쌍 사주면 기뻐할 거야. 생각해보면 그녀가 웃을 때 볼에 패인 보조개가 몇 개인지 말해주는 것을 잊은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으니, 원 참.
  돌아오면 우선 잘 다녀왔다고 꼭 안아 줘야겠다.
  하사웨이를 방으로 데려가 요람에 누인 뒤 스스로의 생각에 만족하여 싱긋 웃으며 거실로 나온 브라이트는, 무심코 시계를 보며 TV를 틀었다가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시계가 가리킨 시간은 오후 열 한 시였던 것이다.

                                                  *                                   *

  모든 접시는 식기세척기 안에서 번쩍번쩍 광을 내며 대기하고 있었다.
  식탁은 몇 번이나 닦았는지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정도로 윤기가 흘렀다.
  빨래는 탈수에 다림질까지 모두 끝난 상태로 세탁기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사웨이는 그동안 한번도 깨지 않았다.
  시계는 오전 영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째깍째깍. 아날로그 효과를 위한 태엽 풀리는 소리만이 적막이 흐르는 집안을 줄달음질치며 흘러갔다. 브라이트는 소파에 앉은 채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이 깊게 두 줄 잡힌 지도 무려 한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미라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화내고 성질부리는 단계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 '절약을 위해' 집안에 딱 한 대만 두었던 휴대폰은 그가 가지고 있었으므로 연락도 되지 않았다. 왜 버릇처럼 내 몸에 휴대폰을 지니고 있었을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한 것도 수백 번.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경찰에 신고를 해야 되는 것 아닐까 하며 전전긍긍하던 그의 기분은 어느 순간 착 가라앉아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 속으로 끝없이 파고들었다.
  미라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브라이트는 미라이가 나가던 순간을 계속 반복해서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그녀의 모습이었으므로. 나가면서 분명히 미라이는 말했다. 늦어도 열시 반에는 도착할 거라고. 그런데 왜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그는 너그러운 척 애써 그녀를 향해 웃어주면서 말했다. 걱정 말고 천천히 놀다 오라고.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길 때, 미라이는 브라이트가 언짢은 기분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생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걱정 말아요. 여자에게는 남자 말고도 중요한 게 있으니까.' 브라이트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곰곰 생각했다. 미라이도 이제는 자기 생활을 갖고 싶다는 의미였을까. 그녀를 전업 주부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건 나만의 욕심이었나? 그녀는 뭔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지금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은 것일까? 이 시간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도대체 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라이는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머, 브라이트! 이 시간까지 문을 안 잠그고 있었어요?!"
  "미라이?"

  브라이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껌벅거렸다.
  진짜 그녀였다. 나갈 때 입고 나갔던 새초롬한 개나리색 드레스와 작고 하얀 조화. 분명 그녀가 맞았다. 브라이트는 엉거주춤하게 소파에서 일어선 채 멍하니 그녀를 마주보았다. 들고 나간 하얀 백은 어디론가 없어졌지만 그녀는 두 손 가득히 종이 봉투를 안고 있었다. 아마도 작은 백의 행방을 그 봉투들 중 하나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했다.

  "늦었죠? 미안해요. 안그래도 긴레이 집에 들렀다가 늦게 출발했는데, 차를 몰던 택시 운전사가 사고를 냈지 뭐에요. 경찰서까지 따라갔다가 다시 택시를 타고 오는 바람에 전화도 못했어요. 아무 일 없었지요?"
  "으...응. 아무 일 없어."
  "하사웨이는요?"
  "어...자고 있어. 열 한 시쯤 잠들었거든...안 깨고 자더군."

  미라이는 그동안의 안부를 속사포처럼 쉴새없이 떠들면서 그를 향해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보조개는 두 개. 그 미소를 보고서야 브라이트는 정말로 그녀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이다. 정말로 그녀가 돌아왔어.
  그는 묘한 감동에 휩싸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 가방은 다 뭐야?"

  "긴레이 친정 댁이 의사 집안이잖아요. 요즘 새로 나온 영양제가 하도 몸에 좋다고 떠들기에, 그렇게 좋으면 좀 나눠달라고 했더니 정말로 준다고 따라오라고 하던 걸요. 간 김에 이것저것 챙겨왔어요."
  "그래?"
  "이쪽 건 다 당신 거에요. 이건 아침마다 먹는 거고...자요, 이건 일주일에 한 번씩 먹는 거래요. 저쪽 건 유아용이니 하사웨이 거고."
  "당신 건?"
  "나야 건강하잖아요. 당신 요새 너무 말랐어요."

  미라이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보조개 세 개짜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개꽃 같은 부드러운 미소에 브라이트는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던 처녀 적의 미라이를 떠올리며 정신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그런 것도 모르고."
  "뭐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아참. 미라이."
  "네?"
  "아까 나갈 때...여자에게 중요한 게 있다고 얘기했던 건, 무슨 뜻이야?"
  "아아...당신도 참. 걱정하고 있었군요?"

  미라이는 가방을 들고 있던 팔을 끌어올려 그의 허리에 두르며 말했다.

  "여자한테 중요한 건 가정이잖아요."

  세상은 천국. 가정은 낙원.
  브라이트는 미라이를 안은 손에 힘이 팍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바보처럼 어벙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에메랄드 귀걸이는 모조가 아닌 진짜가 되어야 할 모양이어라. 힘내라, 무궁화 브라이트.

2009/02/10 15:48 2009/02/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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