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上 (15금)

from Fanfic/Gundam 2009/02/10 15:44
  바의 공기는 무거웠다. 환기 팬이 자리자리마다 가득한 사람들의 눅눅한 호흡을 어쩌지 못한 채 나지막한 소리를 끼익끼익 보태고 있을 뿐, 침묵의 독기는 마치 독가스처럼 바 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어깨가 늘어지고 눈이 풀어지는...이것이 패배. 누군가 기운없는 팔을 억지로 들어 술을 따르는 소리가 급전 상황이 좋지 않아 금방이라도 꺼질 듯 푸륵거리는 노랑빛 할로겐 등 너머로 울려퍼졌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대령님?"

  그 목소리에 샤아는 바텐더의 느릿한 움직임을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낡아빠진 군복에 널찍한 어깨, 빛을 잃은 상사 계급장에 낯이 조금 익은 얼굴. 솔로몬 전투 때 도즐의 수하에 있던 병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어떻게 살아남아 이 배에까지 흘러들어와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다 방법이 있었겠거니 하고 샤아는 무심히 술잔을 올려 그가 들고 있던 병에서 따르는 술을 받았다.

  "이곳에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방에서 혼자 마시는 건 쓸쓸하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오간 후, 샤아는 잔을 들어 안에 담긴 술을 입안에 거뜬하게 털어넣었다. 뒷맛이 텁텁한 것이 그리 좋은 술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취할 수만 있다면 어떤 술이든 마실 생각으로 바에 나온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홀로 앉아 비운 잔의 수가 이미 꽤 되었음에도 취기는 쉽게 돌지 않았다.
  잔을 비우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상사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샤아는 자기도 한 잔 사겠다는 뜻으로 손을 휘휘 저어 그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샤아의 손짓을 눈치챈 바텐더가 느릿한 몸사위로도 충분히 제시간에 이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뭘로 드릴까요?"
  "제일 강한 걸로 두 잔."
  "알겠습니다."

  상사는 자기가 들고 있던 병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샤아가 주문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는 양 멍한 모습이었다. 하긴 이 바에 이렇듯 사람이 들어차기 시작한 이래 그렇지 않은 모습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미친 것이다. 아 바오아 쿠 전이 끝나자마자 종전협정이 체결되는 것을 채 보지도 않은 채 아크시즈로 뱃머리를 향한 이 배에서도 패전의 냄새는 조금도 사라지게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모두가 잔을 들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부상자들 뿐으로, 결국 이 배에는 몸이 아니면 마음이 다친 사람들만 모여 있는 셈이었다.
  바텐더가 술잔을 두 개 가져다 그들 앞에 하나씩 놓고 등을 돌리기가 무섭게 샤아는 그 잔을 비웠다. 빨리 취한 다음 멍한 상태로 방에 돌아가 침대로 쓰러지고 싶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일고 있음에도 말짱한 정신은 피로할 줄도 모르는 것이 구역질이 날 듯 답답했다.

  - 나는 패잔병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잃었으니까. 평범한 소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던 애송이 하나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는 고통을 수없이 되씹으며 그는 스스로가 패잔병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의 이름 앞에서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을 짓던 어린 꼬마, 어눌한 목소리로 도망치듯 감사를 말하던 소년 한 명이 내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던 그녀를 죽였다. 그 빌어먹을 놈의 자식이 감히 내 것이었던 그녀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웠다! 인류의 희망이라는 뉴타입으로서의 정당한 대접도 잊은 채 단지 그 생명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픈 욕구에만 미쳐 날뛰던 그는 이미 아 바오아 쿠 전 이전부터 패잔병이었다.

  "이건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입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
  생수처럼 투명한 술을 마시는 것도 잊은 듯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상사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 말을 샤아는 그저 못 들은 척 했다. 흥, 내가 그녀의 존재를 생각한 탓에 그도 자신의 '그녀'를 떠올린 것인가. 그러나 가당치도 않은 일. 이미 일상이 된 아내라는 존재 따위를 차마 범접하기도 어려운 위엄을 가졌던 그녀에게 비할소냐. 귀하고, 우아하고, 손끝이라도 닿을 수 있을 성 싶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품안에 머무르던 사랑스러운 라라아...그녀는 진정 그의 것이었다.
  샤아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즐거울 때면 눈을 약간 치켜뜨고 짓던 싱그러운 미소며,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즐길 만큼은 알던 술을 마실 때 잔을 기울이고 안에 든 것을 넘기는 모습이나 소리라든지, 그에게 달려와서 안길 때의 감촉, 심지어는 그의 품안에서 흘리던 나지막한 한숨 소리까지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그가 아는 만큼 그녀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한 번 손에 넣은 이래 단 한 순간도 그녀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살아 있는 한은 결코 그녀가 자신과 떨어지게 될 것이라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샤아는 잔이 빈 것을 눈치채고 다가오는 바텐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했었던가? 모르고 있었다."
  "결혼을...했었지요. 네."

  탁한 눈에 흐트러진 마음...그것은 패배. 상사는 무언가 말하고 싶어했다. 샤아가 상사의 눈에서 그것을 읽어냈을 때 잔이 다시 채워졌다. 샤아는 마음 속의 오만가지 잡념 대신 손가락을 술잔 주위로 빙글빙글 돌리며 상사에게 말을 시켰다.

  "그래? 그럼 지금 아내에게 돌아가는 건가."
  "아닙니다, 대령님. ...아내는 죽었습니다."

  갑자기 샤아의 눈에 씌어 있던 무지라는 이름의 젖빛 셀로판이 상사의 말과 함께 사라졌다. 더 이상 상사는 살아있는 잘난 아내와 라라아를 비교하려고 드는 건방진 녀석이 아니라 누군가를 잃었다는 아픔을 공유하는 동료로 화했다. 느닷없이 그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하는 동질감에 샤아는 한편 반가우면서도 여태까지 그런 기운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에 알뜰한 절망을 느끼고 말았다.

  - 뉴타입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그 애송이 자식을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에 그녀는 그의 품안에서 그렇게 속삭였다. 물론 뉴타입이라도 자신의 편견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욕구를 조절할 수도 없고 배우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뉴타입은 만병통치가 아니다. 그것은 그 순간 그가 그녀의 말을 긍정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을 뿌리치지 못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 그래. 그 어떤 뉴타입이라 할지라도 그대와 나 사이는 어떻게 할 수 없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런 뜻이 아니라며 조용히 도리질하는 그녀조차도 놓아주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결국 샤아는 라라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받아들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녀의 온 몸을 입술로 찾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얽혀들던 어지러운 호흡과 열기. 부드럽게 몸을 감아오던 손길의 작은 떨림이나 가쁜 숨소리 사이로 슬쩍 묻어나는 작은 탄식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녀를 탐닉하며 그는 진정으로 자신이 그녀의 마음을 인정할 수 있기를 바랬으나...그러기에 그는 너무나 절실하게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의 것이면서도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군."
  "아닙니다. ...사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종군 간호사였거든요."

  탁한 눈에 물기가 어렸다. 상사는 눈물을 흘리는 일에도 익숙해진 양으로 소매를 들어 눈가를 슥 닦아내고 잔을 훌쩍 들이켰다. 그리고는 술기운을 토해내듯 줄줄줄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솔로몬 작전 때 연방군 놈들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본대가 묵사발이 되었더랬죠. 그때 죽었습니다. 시체도 찾질 못했어요. 아내 몸이 저 시커먼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 걸 생각하면 할수록 이가 갈립니다. 그 빌어먹을 새끼들을 그냥!"

  상사는 테이블의 술잔이 달그락거릴 정도로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어이, 조용히 해. 시끄럽다."

  그들 옆에 있던 나이든 중위 하나가 자신의 잔이 흔들리자 그들을 향해 투덜거렸다. 신경은 머리끝까지 곤두섰고 술기운은 오를 대로 오른 얼굴이었다. 이런 사람을 도발한다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다. 대개는 건드리지 않고 더러운 것을 피하듯 지나가게 마련. 그러나 이쪽의 상사 역시 술이 꽤 올라 있었다.

  "내가 연방 새끼들 욕하겠다는데 네가 왜 나서냐? 오호라 네 녀석, 연방의 개인가 보지?"
  "이 자식이 어디서!"

  챙그랑. 잔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싸움이 붙었다. 요즘의  바에서 하루 한두 번씩은 일어나는 이벤트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샤아는 몰려드는 구경꾼들을 피해 슬쩍 일어나 문을 향했다. 그러나 싸우는 소리는 이미 바 안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마누라나 죽이고 다니는 녀석이 어디서 큰소리야!"
  "뭐라고? 이 연방군 스파이 같은 놈이!"
  "상사밖에 안 되는 새파랗게 어린 것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계급이나 처먹었으면 전쟁이나 잘 하시지 그랬냐!"
  "이 시건방진 놈!"

  주먹이 오가는 소리와 함께 응원하는 소리, 말리는 바텐더의 소리 등으로 시끌시끌해진 바를 등뒤로 하고 샤아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닫으면서 마지막으로 들려온 것은 중위의 노성이었다.

  "그녀는 네가 죽인 거야, 이 멍청한 놈!"
  ....
  샤아는 방에 돌아와 테이블 위에 놓아둔 술을 빈 잔에 따르며 훗 하고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패배한 자들의 어리석은 몸놀림.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의 치졸한 싸움박질이란 우스운 일이다.
  두툼한 유리로 되어 있던 싸구려 잔은 바닥에 떨어지자 금새 깨졌다. 그녀만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모빌 아머도 애송이의 빔 서벨 앞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부서지는 그녀와 그녀의 모빌 아머 앞에서 그는 눈물 한 방울도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대신 아무로 레이라는 어린 소년의 목숨만을 미친 듯이 찾아 헤멨다. 그 자식이 그녀의 생명을 끊었듯이 그 자식의 숨통을 끊어 버리려고 했다.
  그녀를 죽여버린 소년. 자신에게서 그녀를 영원히 데려가버린 그 얼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미웠다. 그 몸에서 심장이 아직도 뛰고 있는 것이 미치도록 증오스러웠다.

  - 그녀는 네가 죽인 거야.
  "후후...."

  샤아는 잔을 입에 대며 다시 한번 웃었다.
  정말로 그 애송이를 그리도 증오한 것은 단지 그녀를 죽였기 때문만이었을까?
  사실 그 자신 그녀가 이미 그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빗속에서 어린 소년에게 의미 있는 시선을 던질 때부터, 그리고 소년과 소녀가 서로 마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그러나 소녀는 자신만의 것이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그만의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이 그 꼬마보다 조금도 우월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했다. 가슴을 갈라 그 펄떡이는 심장의 움직임을 끊고 그 속의 그녀를 찾아오고 싶었다. 그 애송이 안의 그녀도 함께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녀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언제나 품안에 있으면서도 손에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존재했다. 심지어 그녀의 마음은 두 사람에게 나누어지고 있었다. 미칠 듯이 그녀를 숭배하고 원했으면서도 결국 보답을 얻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 때문에 그는 마음에 독을 품었다.
  소년과 소녀 사이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삶에 대한 집착이 다른 모든 감정을 순식간에 압도해 버리는 그때, 언뜻 자신을 대신해 죽을 이름으로 떠올렸던 것은 정말로 소년의 것이 아닌 소녀의 것이었을까? 그 때문에 그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신을 대신해 꼬마에게 심장을 바쳤던 것일까? 그래서 완전한 뉴타입용 병기 엘메즈는 건담의 서벨 한 칼에 너무나 어이없게 완파되었던 것일까?

  - 그녀는 네가 죽였어.

  애송이의 가슴에는 이제 평생이 가도 지워지지 않은 상처가 있을 것이다. 결코 당당하게는 그녀를 가지려 할 수도 없을 만큼 충분히 깊은 상처가.
  어쩌면 자신은, 그녀를 독점하기 위해 애송이에게 그녀를 죽이게 만들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녀를 죽인 것은, 나 자신일까? 그래서 그녀는 내 곁에 있어주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꼬마의 가슴에 있는 것 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상처.
  라라아는 여전히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잔에 담긴 붉은 빛의 와인은 피처럼 독했다. 소파에 앉아 잔에 담긴 술을 말끔하게 비우며, 샤아는 자신의 입에 피가 담기는 듯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처음 자리잡은 자세 그대로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나...마음은 상사의 아내가 떠도는 우주처럼 공허했다.
  텅 빈 마음과 흐르는 눈물...이것은, 패배.

2009/02/10 15:44 2009/02/1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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