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from Fanfic/Hellsing 2009/02/10 16:06
  이게 현실일 리가 없어. 아마도 정녕 꿈인 것이겠지.
  인테그라는 침대 위에 누워 멀뚱멀뚱 눈을 굴렸다. 두 손은 얌전히 가슴 위에 깍지를 끼고 있었고, 호흡은 평화로웠다. 어디 한 구석 쑤시거나 아픈 곳도 없이 온 몸이 멀쩡했다. 베게는 보송보송하고 시트도 깔끔하다. 한 마디로 퍼펙트.

  “말도 안돼.”

  절대 이럴 이가 없는데.
  분명 어제, 다리에 총을 맞고 실려 와 침대에 들었을 텐데.
  그건 신입 직원 환영 파티에서 벌어진 실수였다. 총을 찬 채 파티장으로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 흥분했던지, 신참 국원 한 명이 안전장치를 풀어둔 것을 깜박 잊고는 술김에 이러 저리 만지작거리다 급기야 총알을 국장의 다리에 처박고 만 것이다. 워낙에 앗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집사도 보디가드들도 소용이 없었다.
  하루 저녁에 벌어진 일을 수습하느라 집사의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고, 그 신참 국원은 당장 모가지가 아닐까 싶게 눈물 쏟을 정도로 혼쭐이 났다. 사실 정말로 모가지를 잘라 버리겠노라고 망나니처럼 설치는 고참 부장들을 말리느라 국장인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던지. 피를 쏟아서 정신은 혼미했고 진통제 없이 치료하느라 이가 시릴 정도로 어금니를 깨물어 대야 했지만 그저 멀쩡한 듯, 괜찮은 듯 폼을 잡느라 침대에 들어갈 무렵에는 등에 땀이 한 바가지였다. 깨고 나면 시트고 베게고 죄 땀투성이일 거라 단단히 각오하고 침대 속으로 몸을 감춰 버렸었다. 단단히 묶어두긴 했지만 어쩌면 상처 때문에 시트에 피가 뭍을 지도 모르겠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 조화인고.

  “아가씨, 일어나셨네요?”
  “아아.”

  천장을 바라보면서 무심결에 대꾸를 하던 인테그라는, 갑자기 소름 끼치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홱 옆으로 꺾었다. 뭐시라? ‘일어나셨습니까’가 아니라 ‘일어나셨네요’라고? 게다가 저 높은 톤의 목소리는 또 뭐고? 설마 내가 모르는 새 월터가 성전환 수술이라도 받기로 결심한 건가!

  “월터?”

  그러나 돌아본 자리에 있는 것은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노년의 집사가 아니라, 적당히 나이가 든 중년의 하녀였다. 이중 커튼의 안쪽을 걷어 내 빛이 침실에 한가득 들어오게 하면서, 하녀는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인테그라의 말에 대답했다.

  “어머, 월터 님이시라면 당연히 주인님 시중을 들고 계시죠.”
  “주인님?”

  멍청한 목소리로 인테그라가 반문하자, 하녀는 테이블보를 정돈하다 말고 침대로 다가와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아직 잠이 덜 깨셨나 봐요. 늦게 주무셨어요?”
  “...조금.”
  “알겠다. 또 책 읽다 주무신 거죠? 눈에 안 좋다고 그렇게 말씀드려도 참.”

  그럴 리가 없잖아. 치료를 마치고 들어오니까 이미 새벽이었는데. 게다가 주인님? 이 헬싱 가에 나 말고 다른 주인이 누가 있다는 거야. 도대체 하루 밤 자고 일어나는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짜증이 확 치솟았지만 고작 일개 하녀에게 물어봐도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는 않을 터. 일단 정신부터 좀 차리고 집사를 찾아보는 편이 빠를 것이다. 집사가 침실로 다른 하녀를 보낼 정도였다면 모르긴 해도 퍽이나 중요한 일일 것임에 틀림없다.

  “먼저 차 좀 부탁해.”
  “어머, 내 정신. 금방 갖다 드릴게요. 하지만 조금 있으면 정오니까 서둘러 준비해 주세요. 백작님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세요.”

  이건 또 뭐야. 백작님이라니.

  “아일란즈 경이라도 오셨나?”
  “아뇨. 하지만 헬싱 경께서 아침부터 하나뿐인 따님 기다리시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호호호.”

  하녀가 높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나가고 난 뒤에는 완전히 멍해진 채 침대에 못 박힌 인테그라만이 남았다.
  헬싱 경?
  따님?
  인테그라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아마도 내가 정말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보다.
  가위에 눌렸을 때는 몸을 움직이면 금방 풀어진다고 한다. 시험 삼아 손가락을 하나 까딱거렸다. 옳지. 제대로 움직인다. 그 다음에는 발가락을 꾸물거렸다. 된다. 그럼 그 다음에는 손. 그 다음에는 발. 무리 없이 성공한 뒤에는 팔과 다리를 동시에 움직여 보았다. 덕분에 시트가 심하게 출렁거렸지만 움직이는 동작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럼 이제부터가 진짜.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일어나자. 영차.
  전부 다 마음먹은 대로 되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펴보아도 눈에 보이는 상황은 그대로였다. 아침의 밝은 빛. 깔끔한 침실.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려 보니 분명 붕대가 칭칭 감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다리는 대일밴드 하나 붙은 데 없이 멀쩡하였다. 아프지도 않았다.

  “하나님 맙소사...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조심조심 팔을 뻗어 다리를 만져보아도 상처를 입었던 부위에는 아무런 통증이 없었다. 내가 재생자도 아닐진대 이 어인 사태인가 싶어 황당한 마음 지울 길이 없었으나, 인테그라는 곧이어 마음을 고쳐먹기로 하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요즘은 체세포에서 핵을 뽑아 복제 양도 만드는 세상이다. 의학계의 발달 속도가 빨라진 것이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고, 어쩌면 집사가 상처를 빨리 낫게 하는 비방이라도 알고 있었을지 모르는 일.
  무엇보다 다리에 총알구멍이 나 있는 것보다는 흉터 없이 매끈한 편이 훨씬 좋지 않은가.
  돌아온 하녀의 손에서 차와 크림을 받아 밀크 티를 홀짝거린 뒤, 인테그라는 산뜻해진 기분으로 씻고 나왔다. 몸이 편하니 마음도 한결 즐거웠다. 그러나 갈아입으라며 하녀가 갖다 놓은 옷을 보기 무섭게 그녀의 얼굴은 다시 한번 멍해졌다.

  “이게 다 뭐야?”
  “마음에 안 드세요? 오늘 날씨가 조금 더워서 짧은 옷으로 준비했는데.”
  “아니, 그 문제가 아니라.”

  물론 그녀에게도 파티 참석을 위해 레이스나 비즈 등이 달린 여성용 의상이 있었다. 하지만 열세 살 이후 당주 노릇을 하게 되면서는 그런 옷들을 입을 기회가 일 년에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 정도였다. 집무를 할 때도 회의에 갈 때도, 심지어는 여왕을 알현할 때도 그녀는 남성 정장을 기본으로 입었다. 취향이야 어떻든 간에 Sir의 작위가 부끄럽지 않으려면 남자 옷이어야 했다. 교복도 남자용과 여자용을 다 갖춰두고 남자용을 더 즐겨 입었다. 연중행사로 겨우겨우 참석하는 왕실의 파티나 지극히 사적인 행사를 갈 경우가 아니라면 여자 옷을 입을 기회는 잠자리에 들 때 정도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옷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정장이 아닌 반팔 옷인 건 그냥 봐주더라도, 아이들 옷처럼 나풀거리는 시폰의 치맛자락은 좀 심하다.

  “이거 말고, 늘 입던 걸로 줘.”
  “어머, 오래간만에 백작님을 뵙는 건데 그렇게 입으시면 제가 월터 님께 혼나요. 자! 입으세요. 어서.”
  “윽, 알았어. 알았다니까. 입을 테니까 당기지 마!”

  하녀는 능수능란한 동작으로 그녀에게서 잠옷을 벗겨 내고 재빨리 옷을 입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일사불란한 동작에는 더 이상 말을 붙이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어, 인테그라는 더 이상 그녀에게 반항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옷에도 무언가 심오한 의도가 있다고 믿는 수밖에.
  옷을 갈아입고 하녀가 인도하는 대로 저택 앞 잔디밭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까지 따라가 보니, 집사는 웬 남자의 시중을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름이 느껴지는 더운 바람 탓인지 청회색의 상의는 의자에 걸어놓은 채 흰 와이셔츠에 푸른 타이를 매고 있는 남자는 멀리 보이는 데도 왠지 낯이 익었다.

  “월터? 어째서....”

  손님과 주인의 우선순위를 혼동한 집사를 가볍게 질책하고자 더욱 가까이 다가가던 인테그라였지만,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두 손으로 입을 꼭 틀어막아야 했다.
  저 사람은.
  그렇게나 그리웠던 저 사람은.

  “오, 우리 딸. 이제 일어났니?”
  “아버님...?”

  싱긋 웃고 있는 아서 헬싱 경의 얼굴은 그녀의 기억보다도 좀 더 젊었다. 돌아가실 때처럼 수수깡처럼 마르고 파리한 얼굴이 아니라, 그녀가 아직 어린 아기였을 무렵 안고 놀아주던 힘센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잔주름 몇 줄 외에는 흠잡을 데 없는 맑은 얼굴 위로 그녀의 것보다도 더 짙고 푸른 눈이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어제 또 늦게 잔 모양이더구나.”
  “책을 읽다가 늦게 주무시곤 하니까요.”
  “너무 공부만 하면 못 쓴다. 나도 한 때 그러긴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여기 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느긋한 목소리로 헬싱 경의 찻잔에 차를 따르는 집사도 기분 탓인지 왠지 젊어진 듯 했다. 외눈 안경에 집사다운 몸가짐은 변함없었지만, 가벼운 미소로 아버지의 말을 곧잘 받아치는 얼굴은 어제 새벽녘의 피로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무슨 소리! 그래도 옥스퍼드에선 꽤나 잘나가는 학생이었다고.”
  “천하의 작업남으로 잘 나가셨던 거겠죠.”
  “어허, 다 큰 딸아이 앞에서. 무례하다.”
  “아가씨도 동문이신데 그 소문 모르실 리 있겠습니까. 내년이면 이미 졸업이십니다.”
  “윽.”

  어깨를 수그리며 기가 꺾인 듯 찻잔을 드는 그 모습 역시 오래 전 기억 그대로다. 인테그라는 눈을 깜박거리며 눈에 보이는 것을 재차 받아들이려 애썼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아주 멀리로 업무상 출장을 가신 것뿐이라고 꿈꿔왔던 날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해 본 것도 벌써 몇 년이나 전의 일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형님!”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에 인테그라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오, 리처드냐! 어서 올라와. 같이 차 한 잔 하지.”
  “오래간만이십니다. 남미는 어떻던가요?”
  “아주 화려하더군. 해변이 온통 꽃밭이었다.”
  “여자들만 따라다니다 오신 거 보니 조용한 모양이군요. 인테그라, 안 그러냐?”

  느긋하게 잔디밭으로 발을 들이는 남자의 질문에도 그녀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분명 이 남자는 내가 죽였던 남자일 텐데. 핏줄도 정의도, 심지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몰랐던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은 더러운 권력욕 뿐. 팔이 떨어져도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해 추하게 발버둥치던 모습을 그녀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를 쏘아 버렸을 때 손에 느껴졌던 권총의 반동도.
  그런데 이 남자가 내 앞에서 이렇게 건강하게 웃고 있다니.
  세상이 돌다 못해 뒤집어져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인테그라, 우리 조카님이 왜 이러실까? 삼촌에게 인사도 안 해줄 거야?”
  “늦게 일어나서 그렇다. 수업은 잘 마치고 온 게냐?”
  “고대 마법서가 어찌나 고약하던지 알아먹질 못해서 고생했습니다. 형님의 뒤를 잇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으면 후계자 제의가 왔을 때 거절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건 안 되지. 철의 의지로 헬싱을 이을 자가 너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농담도 잘 하십니다. 인테그라가 이렇게나 훌륭하게 자라났지 않습니까?”
  “이 녀석은 아직 어려. 내 뒤로는 네가 적격이다.”
  “형님이 지금처럼만 건강하시면, 저는 뒤를 이을 필요도 없겠습니다.”
  “이 녀석 말하는 것 좀 보게!”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삼촌의 얼굴에 이전에 덕지덕지 눌어붙었던 욕심 같은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 남자가 헬싱의 후계자?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던 인테그라는, 문득 정신을 차라고 허둥지둥 소매를 들춰 올렸다. 분명 나는 저 남자에게 죽을 뻔 했던 적이 있다. 그 흔적이 남아 있다면 어느 것이 현실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어젯밤에 다쳤던 다리만큼이나 그녀의 오른 쪽 어깨는 매끈하였다.
  흉터는커녕 실핏줄 하나도 튀어나온 구석이 없다. 안 그래도 멍해져 있던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가씨,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아, 미안. 조금 어지러워서.”

  어느새 집사는 인테그라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의자를 권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더 이상 서 있기도 어려웠던지라 그녀는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여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이 더운 공기를 타고 가볍게 나부꼈다.

  “거 봐라. 아침만 부실해도 애가 저런데, 언제 당주 노릇을 하겠나.”
  “과보호십니다 형님. 이젠 금방 시집가도 될 나이인데.”
  “시집은 무슨, 서른까지는 데리고 있을 거다.”
  “욕심이 지나치십니다. 여왕폐하가 진노하실 걸요.”
  “내 딸이 늦게 결혼한다고 뭐라 할 분이 아니시다. 제대로 된 놈이 나서기 전까진 어림없어.”
  “딸 귀한 줄만 알고 남의 아들 귀한 줄은 모르나. 좀 참아주십쇼.”

  실없이 오가는 형제간의 대화를 들으며, 인테그라는 의자 한쪽으로 머리를 기대고 작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면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 손은 한 점의 티끌도 없이 깨끗하다.
  피로 얼룩진 것보다는 흠 없는 순백의 손이 좋지 않은가.
  하지만 기꺼이 오감(五感)에 취해 버리려던 그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자각이 그녀의 가슴을 쳤다.

  - 이게 현실일 리가 없잖아.

  인테그라는 다시 눈을 떴다.
  눈앞에는 여전히 젊은 아버지와 다정한 삼촌이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이었고, 집사는 그 옆에 서서 삼촌의 잔에 차를 따르며 설탕을 권하고 있었다.
  열세 살 이후로 이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 없는 걸.

  역시나 무언가가 부족하다.
  인테그라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택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가씨?”
  “미안.”

  집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은 짧았다.

  “점심 같이 안 하련?”
  “이거 봐라. 네 아버지가 서운해 하신다.”

  아버지와 삼촌도 섭섭한 얼굴로 인테그라를 만류했지만 해 줄 수 있는 말이 달리 없어 그저 바쁜 걸음을 재촉하기만 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서 지하실로 달려갔다. 지하실은 드나드는 이가 없어 뭐가 있을지 모른다며 하녀가 붙들어도 그녀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지하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감옥의 입구에 다다르자 온 힘을 다해 철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은 좁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창문조차 없는 방의 구석구석에는 거미줄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 역시, 없어.

  인테그라는 텅 빈 지하 감옥을 보고 더욱 더 확신을 굳혔다.
  그러므로 여기는 현실이 아닌 것이다.

  “여기엔 아무 것도 없어요, 아가씨.”

  옆에서는 나이든 하녀가 높은 소리로 불평하고 있었다.

  “도대체 뭘 찾으세요? 나가요. 여긴 무섭다구요.”
  “뭐냐면....”

  그런데 무엇이 있었더라?
  인테그라는 다시 한번 어두운 감옥 안을 응시했다.

  “돌아가요, 아가씨.”
  “증거.”
  “네?”
  “그것이 내 삶의 증표야.”

  비록 그것이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없는 상황은 진실일 수가 없어.
  그래, 나를 시험하고 내게 복종하고 나를 유혹하고 내 죄를 대신 수행하는.
  나 자신이기를 치열하게 강요하는 그 남자가 없는 것은 현실이 아니야.
  인테그라는 일체의 다른 것에서 시선을 뗀 채 아무도 없는 어둠 속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의 존재가 곧 나의 긍지다.”

  눈앞이 흔들리면서 끝없이 추락하는 듯 주변이 아득해짐에도, 인테그라는 끝이 없어 보이는 암흑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찾는 건.

                                                          *                                   *

  “...아카드.”

  인테그라는 침대 위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었다. 두 손은 아무렇게나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다친 다리의 통증 탓인지 온 몸이 얼얼했다. 베게는 땀으로 푹 젖어 있고 시트도 난장판이다. 한 마디로 최악.

  “나를 불렀나, 주인.”

  내가 그랬던가.
  아득하게만 들려오는 목소리의 가닥을 잡던 인테그라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다 말고 과연 자신이 흡혈귀를 불렀던 적이 있었는지를 잠시 고민해야 했다.

  “아냐. 꿈을 꿨을 뿐이다.”
  “싱겁긴.”

  남자는 몸을 돌려 협탁에 놓인 물수건을 집은 뒤 그녀의 얼굴 옆에 내밀었다.

  “이건...?”
  “닦아. 얼굴이 땀투성이다.”
  “아.”

  집사가 놓아두고 간 것인가. 헬싱 경은 한숨을 푹 내쉬며 미지근한 수건을 받아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몸을 대충 문질렀다. 다리 부근의 시트에서 딱딱한 느낌이 나는 것을 보니 피가 배어나와 말라붙은 듯 했지만, 그것은 수건으로 닦아 낼 수가 없는 노릇이니 아침까지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다. 말라붙었다는 건 적어도 피가 계속 흐르지는 않았다는 의미이니 일단은 지혈이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자.

  “다시 좀 놔 줘.”
  “그러지."

  헬싱 경은 수건을 받아들며 자신을 굽어보는 흡혈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방안에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그의 눈은 변함없는 피의 색. 자신의 손이 저질렀던 죄의 무게만큼이나 깊은 색이었다.
  사태가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이곳만이 돌아설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나쁜 꿈이었나.”
  “글쎄....”

  어느 사이엔가 다시 안정을 찾은 그녀의 눈은 이미 반쯤은 잠에 취해 있었다.
  내가 무슨 꿈을 꾸었더라?
  아아.

  “...그래, 악몽이었어.”

  헬싱 경은 마치 한숨 같은 나직한 대답과 함께, 이번에야말로 달고 깊은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았다.



  네이버 Evergreen님의 아그라 31제 중 3. 악몽을 소재로 한 글입니다.
2009/02/10 16:06 2009/02/1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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