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장기투자

from Fanfic/Hellsing 2009/02/10 16:05
  그것은 동이 틀 무렵의 일이었다.

  “너는 모든 것을 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해가 뜨면 나는 이대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온몸이 사슬에 매이고 심장에 말뚝이 박힌 남자로서도,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아, 그렇군.”

  성과 영지와 영민을 버리고 흙과 관만을 가진 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얻으려던 그녀는 그의 손을 떠났고 그는 싸움에서 졌다. 매인 몸으로는 더 이상 흙이 담긴 관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죽은 존재인 그가 더 이상 목숨을 잃을 리는 없겠지만.

  “400여 년을 존재했던 너도, 사라지는 것은 두려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뭐라 말할 수 없군.”

  콜록.
  가슴에 박힌 말뚝은 끊임없는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말을 한 마디 마치기가 무섭게 구멍 뚫린 폐에서 피가 치밀어 올라 남자는 끊임없이 기침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웃어 보려고 했지만 산산이 부서진 몸은 아주 약간의 공기를 들였다 내놓는 것마저도 힘겨워했다. 몸에 붙어 있는 기관 중 그나마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는 소리를 듣는 귀뿐. 팔다리에 힘이 빠진 것은 물론이요 눈도 흐려진 지 이미 오래였다. 쿨럭거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인간 남자의 표정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한 걸음 뒤에는 아무 것도 없는 망각이 기다릴 것이다.
  어쩌면 그렇지는 않을는지도 모른다. 죄를 받아 영원한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믿는 것은 조금도 이뤄지지 않는 악몽 속에서만 길을 걸었다. 영혼이 남아 지옥으로 가는 것은 최악이 아니다. 이대로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그저 사라지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생각해내기 힘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왜 패배한 괴물의 생각을 궁금해 하지. Dr. Hellsing.”

  나는 괴물이다. 나는 짐승이다. 나는 수없는 인간들을 잡아먹고 내 생존을 부풀려왔다. 나는 인간이라는 종족의 삶에 오랫동안 기생해서 살아온 자다. 그러나 나의 행위가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줘야 할 의무를 가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콜록콜록.
  다시 한 번 피를 토하는 흡혈귀의 얼굴 위로, 인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어째서, 내 목을 베서 끝내지 않는 거냐.”
  “그렇게 쉽게 죽게는 안 해. 계약을 하자.”
  “내가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한 것은 너다. 내게서 뭘 얻을 수 있다고.”

  얼굴이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끝없이 흐르는 피 때문에 인간의 표정은 여전히 잘 보이지 않았다.

  “너의 힘과 자유를 내 피에 구속하면, 기회를 주지.”
  “무슨 기회?”
  “너의 소유를 가질 수 있는 기회.”
  “나의, 소유.”

  얼굴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어느새 여명의 빛이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흡혈귀는 잘 뜨이지 않는 눈을 애써 깜박여, 이제는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된 피바다 위에 서 있는 사람의 표정을 읽으려 애를 썼다. 그의 몸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아마도 자신의 피는 얼마 되지 않으리라. 그의 하인과 부하를 모두 제거하고, 그의 여자를 그의 손에서 강탈해 간 인간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어쩌면 아주 조금, 슬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감히 나를 동정하나, 인간.”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닐 텐데.”

  남자는 그 말과 함께 거친 동작으로 흡혈귀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그 서슬에 심장에 박힌 말뚝이 흔들리자, 으르렁대는 듯한 나직한 신음소리가 괴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는 비명을 지를 기운도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목이 잘리거나 해가 뜨기도 전에 소멸할지도. 입으로 코로 계속 피를 쏟아내는 흡혈귀를 틀어쥐고 있는 인간의 손이 조금 느슨해지는 대신,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피만 있다면 살 수 있겠지. 너에게 인간의 피를 주겠다.”
  “제물을 바치겠다는 거냐.”
  “헛소리. 피를 조금 뽑는다고 해서 사람이 죽는 건 아니야. 피를 조금씩 모아 네가 살아있도록 해 주마.”
  “대신에, 힘과 자유를 속박당하라는 건가.”
  “어차피 너는 사라질 몸이다. 어떤 조건이든 나쁘지는 않겠지.”
  “더 이상 존재해서 내가 얻을 게 뭐라 생각하나.”
  “나는 모른다. 하지만 네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조건을 받아들여.”

  콜록콜록콜록.
  이어지는 밭은기침 탓에 흡혈귀의 반응이 금방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피를 한 바가지나 토해내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과연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다스릴 영지?
  내가 보호할 영민?
  나를 따르는 부하?
  나를 시중드는 하인?
  아냐. 그런 것이 아니야.
  내가 내 존재의 파국을 맞닥뜨리기 전, 진정으로 원했던 건 단 하나다.
  흡혈귀는 굳이 대답을 서두르지 않는 인간의 얼굴을 향해 물어뜯을 듯 독설을 내뱉었다.

  “네 딸을 소유하고자 할는지도 모른다.”
  “각오하겠다.”

  인간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쩌면 다소 얼굴이 창백해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이 괴물에게 그런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어라 해도 저 인간은 이성의 대리자. 흡혈귀가 그의 광기로 모든 인간을 미치게 만들려고 했을 때에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괴물을 처치하는 데 성공한 자다.

  “하지만 내가 네 주인이 된다면, 내 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명령할 수는 있겠지.”
  “네 딸이 나의 주인이 된다면 어쩔 거냐.”
  “나의 이름은 가능한 한 아들에게 물려주겠다.”

  피로한 가운데서도 아주 약간의 미소가, 인간의 입가에 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식 교육에 신경을 좀 써야 되긴 하겠지만.”

  그 대답에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는 흡혈위의 입이, 옆으로 길게 비뚤어졌다.

  “크...하하...하하하핫. 재미있군.”
  “어쩌겠나. 곧 해가 뜬다.”
  “좋다, 인간이여. 거래하지. 나의 자유와 힘을 너에게 빌려주마.”
  “알겠다, 백작. 대신 나는 너에게 시간을 지불하겠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흡혈귀는 심장에 박힌 말뚝 위로 내밀어진 인간의 손 위에 자신의 것을 얹었다.

  “그렇다면 그 시간에 나의 것을 찾아 보이겠다.”

  여명의 동이 영국의 산야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던 그때, 피범벅이 된 인간과 괴물의 계약은 이루어졌다.

                                                          *                                   *

  인간의 종이 된 괴물은 아직도 가끔, 관 속에 누워 그날의 꿈을 꾸곤 한다.
  정녕 그 계약을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과연 잃었던 것을 찾기 위함이었던지, 아니면 차마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없었을 뿐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인지는 아직도 잘 알 수 없다.
  계약의 날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후, 사라졌던 이전의 그녀는 스스로의 손으로 지워 버렸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마지막 영지 이외에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될 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는데.

  “아카드?”
  “...너인가. 인테그라.”
  “뭘 하고 있었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어?”
  “낮이니까. 자고 있었다.”
  “느긋하군 그래.”

  최근 들어 아주 가끔, 무언가를 손에 넣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어쩌면 인간. 혹은 여자.
  그의 딸은 아닐지언정 그의 이름과 피를 이은 그의 직계, 저 백작가의 당주를.

  “헬싱 경께서 이 지하실까지 친히 납시다니, 웬일이신가.”
  “뭐긴. 일이다.”

  초대의 헬싱은 그 피를 담보로 내 일체의 권리를 대출해갔다.
  그 혈족을 대가로 지불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일이라는 데 뭘 멍청히 웃고 있어?”
  “기쁘군.”

  이것을 100년만의 원리금 상환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2009/02/10 16:05 2009/02/10 16:05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