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nition Point

from Fanfic/Hellsing 2009/02/10 16:03
  여자들만의 현상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혹 그런 언급이 불편하신 분은 미리 피해 주십시오.



  나른하게 늘어져야 할 여름날 밤. 진득한 안개처럼 묵직한 통증이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안으로부터 시작된 출혈은 칼이나 총에 당한 상처와는 전혀 달라서 손으로 복부를 감싸 쥐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얼룩말 뒷발굽에 허리를 채이면 이런 기분일까. 피비린내 나는 유혈현장으로 달려가기 위해 총과 칼로 무장하고 있던 열다섯 살 소녀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파도처럼 찾아왔다 다시 잦아드는 통증을 가만히 참아야 했다.

  “아가씨?”
  “아,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상황은?”
  “보육원 안에는 모체 및 좀비들이 약 열네 체로 추정됩니다. 대원들이 먼저 아동들을 구조하는 중입니다.”
  “아이들은 피를 빨리지 않았나?”
  “아무래도 흡혈귀가 되기 쉬우니까요. 동족을 늘리려고 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생사는?”
  “총 스물여섯 명의 아동들 중 열다섯 명만 구조된 상태이고, 안에는 아직 열한 명이 남아 있습니다.”
  “남은 아이들의 위치는?”
  “침실의 위치는 건물 2층의 동쪽 끝에 위치한 A와 B 두 개소입니다만, 아직 생사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모체가 일부를 이동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하필이면 바캉스 시즌에 보육원이라니, 고약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냐.”

  대영제국 왕립 제3교 기사단 국장이자 헬싱 가의 당주인 백작 인테그라 헬싱 경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맨체스터에서 약 30분정도 떨어진 이 보육원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이어지고 있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은 것은 일곱 시간 전인 오후 여섯시. 헬싱은 런던으로부터 네 시간 만에 출동을 완료했지만, 그냥 폭력사건일 뿐이라며 생떼를 쓰는 관할 서장으로부터 지휘권을 가져오는 데 추가로 두 시간이 더 지나갔다. 겨우 현장으로 접근해서 확인 작업을 마치자 시간은 이미 새벽 한시였다.
  경찰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살인 사건의 범인이 흡혈귀라면 일단 모든 일이 대외비로 처리되기 때문에 경찰 내부에서도 그 통제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복수를 요구하는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사건의 경과는 어떠하며 범인은 이렇게 체포했다고 당당하게 제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해결이 가능한 방향으로 사건을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데 그 오만한 인지상정이 화를 부를 때까지 미적거리면 어쩌라는 말인가. 헬싱 경은 알아서 해결하겠다며 현장으로 다가간 형사 세 명이 추가로 좀비가 되었을 때를 떠올리며 짜증이 치솟는 것을 꾹 참았다.

  “일단 진입하지. 레토와 엘리사를 부탁해.”
  “직접 가시겠습니까?”
  “응. 손이 딸리잖아. 안에 아이들도 있고, 그 녀석에게만 맡긴다는 건 좀 껄끄러워.”
  “하지만....”
  “지체할 시간 없어. 월터는 구조작업을 도와줘.”
  “알겠습니다.”

  집사는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으나 별로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숙인 뒤, 텐트 옆에 놓아둔 상자를 두 개 가져와 주인의 앞에 놓고 열었다. 상자 안에서는 각각 은색의 권총과 칼이 두 자루씩이 나왔다. 헬싱에서 운영하는 무기 제조사에서 특별 제작한 국장 전용의 무기들이었다.

  “탄창의 여분은 있나? 레토는 탄속이 느리니까 두 자루를 다 사용할 거야.”
  “충분합니다. 뭐하시면 고용량으로 준비할까요.”
  “좀비 열 체 정도면 고용량까지는 필요 없겠지.”

  대화를 나누면서도 헬싱 경은 전투복으로 바쁘게 갈아입으며 준비를 마쳤다.
  지금 현장에 투입되어 있는 인원은 좀비의 숫자만도 못한 다섯 명에 불과했다. 급하게 런던을 출발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해가 긴 여름에는 잘 활동하지 않는 흡혈귀의 특성 탓에 여름에는 상당수의 국원들이 휴가를 떠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니만치 비상연락망이 돌아가기는 했다. 하지만 연락을 받고 국원들이 귀환한 뒤 맨체스터로 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꼼짝없이 밤을 넘기고 말 것이다. 안 그래도 경찰과의 쓸데없는 실랑이 때문에 얼마나 시간을 날려먹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국장으로서의 소임 때문에라도 섣불리 현장에 들어가지는 않았겠지만 생존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이때에는 지금 당장, 현장에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집사는 당주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엘리사는 가능한 쓰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응.”

  접근전을 허용하면 안 되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헬싱 경은 검을 허리에 찼다. 엘리사는 80cm의 장검이지만 이미 170cm를 넘는 그녀의 키 덕에 전혀 부담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일각이 급한 상황마저도 그것을 바라보는 집사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곧 아스카론도 실전에 쓰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아직 그건 양손으로 사용해야 해서 좀 부담스러워. 갔다 오겠다.”
  “다녀오십시오. 현장에는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부탁하지.”

  헬싱 경은 집사의 전송을 뒤로 하고 이제는 아비규환이 현장이 되어 있는 보육원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건물 출구는 이미 모두 대원들에 의해 봉쇄된 상태이고 남은 곳은 목표가 되는 방 아래족의 동쪽 출구 뿐. 잘만 하면 10분 이내로 다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입구로 들어갈 무렵, 또다시 뱃속에서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후우.”

  이것은 한 달에 한 번, 달이면 달마다 빠지지도 않고 찾아드는 불청객. 건강하고 성숙한 여자라면 누구든 거의 매달 겪는 일이다. 그리고 헬싱 경은 누구보다도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열다섯 살의 소녀였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하필이면, 오늘이 시작이라니.

  하지만 불청객 못지않게 곤란한 것은 달거리가 시작할 때마다 몸 안으로부터 통증이 밀려온다는 점이었다. 출혈이 있다는 건 상처가 생겼다는 의미이니 아프지 않은 게 더 이상하기는 하겠지만 매달 이렇게 꼬박꼬박 몸이 시달리면 기사단 국장으로서의 업무에 차질이 생기게 마련. 괴물과 싸우는 헬싱 가의 당주라 해서 생리통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 헬싱 경의 작은 고민이었다.
  물론 몸이 건강하면 생리통 따위는 거의 없다지만, 헬싱의 업무라는 것이 주로 밤에 이루어지는 일인데다 업무 처리상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아무리 몸이 단단하다 자부해도 이 통증은 매달 어김없이 나타나서 최소 여섯 시간에서 최대 열 시간 가량 헬싱 경의 집중력을 방해하곤 했다. 머리를 둔하게 만들기 싫어서 진통제를 먹지 않고 버티고는 있으나 그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 어떤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보니, 집사가 멀리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치잇.”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월터라면 분명 눈치 채고 있을 테지. 현장 연락을 미루고 따라와 볼 정도로 미덥지 못했나. 헬싱 경은 속으로 혀를 차며 귀에 무전기를 꽂은 뒤 보육원 안에 바로 돌입했다. 좀비들이 내부의 전기를 끊어 놓기는 했지만, 창문 쪽으로 비추이는 할로겐 등의 강한 빛 덕분에 복도는 별로 어둡지 않았다. 이 정도의 광량이라면 평범한 좀비 정도는 쉽게 공격오지도 못할 것이다.
  헬싱 경은 베레타 M92fs를 기반으로 제작한 레토의 익숙한 감촉을 느끼면서 아련한 총성이 들리는 복도를 따라 계속 걸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어두운 계단을 제외한다면 아이들의 침실을 확인할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주의를 게을리 할 생각은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모체가 된 흡혈귀는 한여름에, 그것도 한낮부터 피의 축제를 함부로 벌인 녀석이니까. 하긴 밤이 늦도록 바깥으로 나오지 않은 채 건물 안에서 농성만 벌이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체는 강한 녀석이라기보다 단순히 미친놈이라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방심할 수는 없다.

  “2층으로 올라간다. 상황을 말하라.”
  “목표는 A에 모여 있는 것으로 확인됨. 현재 셋이 문 앞에서 사수 중. 둘은 창문에서 구출 대기 중.”
  “적은?”
  “모체는 불명. 좀비 두 체 사살. 현재 다섯과 대치 중.”
  “오케이. 올라가겠다.”

  계단을 오르기 위해 어두운 그늘로 발을 들이자마자 핑 하는 약한 파공성이 귀를 울렸다. 헬싱 경은 재빨리 난간 쪽으로 몸을 낮춘 뒤 총을 들어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두어 발을 발사했다. 쿠억 하는 소리와 함께 진흙이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평소와는 달리 권총의 반동에 몸 전체가 삐걱대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신음 소리를 꾹 참았다.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야. 별 것 아니야.

  “큭...놓쳤나?”

  소리를 따라가며 뒤쪽을 확인했지만 뒤쪽에는 아무런 무기의 흔적이 없었다. 헬싱 경은 2층까지 한달음에 뛰어올라가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무언가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알고 있나?”
  “BB탄 발사 확인.”

  고작 아이들 용 장난감 총인가. 역시 좀비답다고 해야 하나. 2층으로 올라가자 총성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기운 없이 피식거리는 장난감 총의 가스 분출음과 베레타의 둔탁한 발사음을 구분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였다. 집사의 설명과 도면에 따르자면 여기서 목표로 하는 방은 저 앞의 모퉁이를 돌면 4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섣불리 진행하다가 아군의 탄환에 맞을 생각은 없었기에 헬싱 경은 다시 한 번 지시를 내렸다.

  “1분 후 사격 중지. A로 철수해 대기조와 함께 목표를 구출하라. 적은 내가 상대한다.”
  “라저.”

  헬싱 경은 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면서 빛이 들어오는 복도를 따라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몸 상태가 다소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는 엄연한 국장. 적어도 대원 세 사람 몫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모퉁이에 붙어서 적을 노리면 다섯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을 것이다. 육십을 다 세고 얼마 되지 않아 베레타의 사격 소리가 잦아들자, 그녀는 바로 몸을 날려 벽을 등지고 좀비들을 노려보다가 대원들이 달려 들어간 오른쪽 문이 탕 하고 닫히자마자 사격을 개시했다. 그녀가 쏜 총탄 두 발에 좀비 하나가 스르륵 하고 흙더미처럼 무너져 내렸다.

  - 좋아. 제대로 맞았어.

  헬싱 경은 괴성을 내지르며 다가오는 좀비들을 향해 연달아 탄창을 비워댔다. 레토의 반동이 계속해서 몸에 타격을 주고 있었지만, 좀비들의 찢어지는 목소리에 비하면 몸이 지르는 비명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좀비들이 하나 둘 쓰러져가는 와중에 저도 모르게 자세가 구부정해지는 바람에 그녀는 몇 번이고 벽에 거세게 등을 부딪쳐야 했다.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좀비들을 다 처리했을 무렵에는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후우.”

  가벼운 한숨과 함께 손등으로 땀을 닦은 뒤, 헬싱 경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상황을 점검했다.

  “구출은 끝났나, 월터.”
  “건물에서의 철수는 끝났고 다들 내려오는 중입니다. 그만 돌아오십시오.”
  “알겠다.”

  탄창을 새로 교체한 뒤 헬싱 경은 왔던 길로 다시 돌아왔다. 올라왔던 계단도 무사히 내려와 들어왔던 입구가 눈앞에 보일 무렵, 그녀는 안도한 나머지 무심코 손에서 힘을 빼고 쥐고 있던 레토의 총구를 반쯤 내렸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느닷없이 천장에서 떨어진 장난감 총이 그녀의 오른손을 강타해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놓치고 말았다.
  타앙.
  무의식적으로 왼손에 쥔 총의 방아쇠를 당겼지만 양손 사격을 준비하고 있던 상태라 자세를 추스를 틈이 없어, 안 그래도 힘이 부족한 상태이던 헬싱 경은 발사와 함께 레토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져야 했다. 넘어진 채 발사된 곳을 보니 천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피투성이가 된 웬 남자의 상체가 보였다. 좀비가 저런 재주를 부릴 수는 없으니 저것은 분명 모체인 흡혈귀일 터. 웃고 있는 표정에 아무 변화가 없는 걸 보면 방금 쏜 탄환은 저것을 맞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헤헤...호오오....피군...피가 흘러.”
  “닥쳐!”

  헬싱 경은 바닥에 떨어진 총은 버려둔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어차피 총은 화이트 채플의 십자가를 녹인 은으로 도금이 되어 있어 흡혈귀가 만지기는 꽤나 어려운 물건이다. 상황이 종료된 후 다시 가져오면 될 것이다. 그러나 흡혈귀 쪽에서는 그녀에게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그녀 머리 위로 다가왔다. 서둘러 다시 총을 발사하려는 순간, 다시 한번 강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윽!”

  흡혈귀는 그 잠깐의 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의 머리 위로 뛰어내려왔다. 허둥지둥 몸을 굴리며 허리에 찬 검을 뽑으려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벽에서 튀어나온 주먹이 퍽 하고 그녀를 노리던 흡혈귀를 날려버렸다.

  “볼썽사납군. 주인이여.”
  “아카드?”

  머리 위에서 자신의 넘어진 모양새를 내려다보는 아카드의 표정에 헬싱 경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헬싱 가에 봉사하는 흡혈귀에 의해 복도 바닥에 메다 꽂혀진 보육원의 흡혈귀는 스스로가 불리하다는 것을 느낀 모양으로, 이미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없었다. 헬싱 경은 삐걱대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총을 주워든 다음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 종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출동 명령은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집사의 요청을 받았다. 혹시 모르니 따라가 보라더군.”
  “언제부터 요청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지?”
  “주인의 안위가 위험할 때부터일 걸. 아마도.”

  여전히 야릇한 미소를 띠고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어!”
  “물론 그러셨겠지.”

  종의 얼굴에 걸린 묘한 웃음기가 조금 더 깊어졌다.

  “하지만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다. 뒤는 내가 맡지. 헬싱 경.”

  흡혈귀의 눈에 비웃음이 엿보이는 것이 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약간의 자존심 따위는 승리할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요는 전투가 아닌 전쟁을 이기면 되는 것이다. 하여 헬싱 경은 끓어오르는 울분에 이를 악물면서도 한편으로는 흡혈귀의 말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 나는 후방에서 지휘하겠다. 모체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분부대로.”

  고개만 까딱거린 다음 사라지는 흡혈귀를 바라보던 헬싱 경은 들고 있던 총을 거칠게 총집에 쑤셔 박은 뒤 건물을 나왔다. 그녀가 나오는 것을 본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무기들을 받아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괜찮아. 현황을 다시 알려줘.”
  “알겠습니다. 지금 구조된 인원은 전부 열한 명으로 작업은 완료되었고, 처리된 좀비는....”

  그러나 헬싱 경은 집사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종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분해서 견딜 수 없는 탓이었다.
  녀석은 분명 나를 비웃고 있었다. 내가 약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약한 주제에 강한 척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건방진 표정을 지은 것이다. 괘씸한 녀석! 분명 평소라면 별 것 아닌 일이었는데, 몸이 약하고 힘든 시기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녀석의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안 된다니. 여자라서 약하고 여자라서 이정도 밖에 할 수 없다니.
  여자인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헬싱으로서의 긍지를 부정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이런 통증 따위 느끼지 않는 몸이었으면 싶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수치심이 그녀를 끈덕지게 괴롭혔다.

  “...그래서 모체만 처리된다면 문제는 없을 걸로 예상됩니다.”
  “알았다.”

  헬싱 경은 내용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집사의 손에서 보고서를 받아들면서, 천막으로 설치된 지휘 본부 안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라도 하시겠습니까? 아몬드 비스코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 둘 다 부탁해. 차에는 크림과 시럽도 좀 넣어서.”

  뭐라도 좀 제대로 먹고 배를 채우면, 이 둔한 통증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

  “아, 그리고 지금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뭐지?”
  “여성분들의 몸에 좋다는 한방약이 요즘 유행하고 있다더군요.”
  “응?”
  “그러니까, 모자란 영양을 보충해준답니다. 어떤 분들은 드시고 나면 아픈 게 나아진다고도 하고요.”

  헬싱 경은 보고서를 들추다 말고 고개를 들어 집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집사의 얼굴 근육이 팽팽해진 것을 보니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 편치 않다는 것이 명백하였다. 자세히 보면 약간 진땀을 흘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나더러 그걸 먹어보라는 거야?”
  “꼭 그런 의도는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얼굴에 ‘잘 좀 고려해 봐주십사’하는 표정이 가득한데!
  화를 내고 싶었다. 흡혈귀에 이어 이제는 집사에게까지 대놓고 약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나. 이걸 소리를 지를까 말까. 내가 당신 같은 늙은이가 된 줄 아냐고 확 면박을 줘버려?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손이 보고서를 거세게 틀어쥐자 집사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그러니까 아가씨, 저는 그냥....”
  “...생각해보지. 지금은 차부터 좀 서둘러줘.”

  평소보다 집사가 사라지는 속도가 퍽 빨랐다는 사실은 착시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헬싱 경은 구겨진 보고서를 다시 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참자.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더라. 따져보면 당장 의사를 모셔와 맥을 짚을 것도 아니고, 모처럼 월터가 권해주는 거니까 효과는 탁월하겠지. 머리가 멍해지는 진통제보다는 나을지도 모르니까 한번쯤 생각이나 해 볼까. 고대 흑마술도 배워 쓰는 마당에 동양의 한의학쯤이야.
  화를 다소 가라앉히고 있자니 집사가 이내 차와 과자를 가져왔다. 다과에서 좋은 냄새가 풍기자 마음이 조음 여유로워지는 듯해, 헬싱 경은 집사를 물린 뒤 비스코티를 한 조각 집어 황금색의 차에 깊이 담갔다. 그때였다.

  “누나.”
  “응? 누구지?”
  “나, 켄이야.”

  느닷없이 그녀의 눈앞으로 나타난 남자아이는 얼굴이 온통 피와 먼지로 지저분한 옷차림 그대로였다. 나이는 일곱 살에서 여덟 살? 아마도 방금 구조된 아이들 중 한 명인 듯 했다. 아직 씻기지도 못한 건가. 하긴 구조되고 나서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국원들이 돌보고 있었겠지만 인원도 모자라고, 아이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쉬이 따라잡을 수 있는 어른들은 많지 않으니까. 분명히 몰래 빠져나와 여기까지 온 거겠지.

  “침실에 갇혔다가 나온 거니?”
  “응. 근데 배고파.”
  “저런, 그러고 보니.”

  구조되기 전까지 얼마 동안이나 못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최소한 저녁은 쫄쫄 굶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음식 냄새 때문에 여기로 왔나.

  “지금은 과자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먹을래?”
  “응!”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세요 하고 두 손을 번쩍 내미는 아이의 표정은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다. 인테그라는 조금 미소를 지으며 손에 집히는 대로 비스코티를 두어 개 집어 아이의 손에 얹어 주었다.

  “과자만 먹으면 목 막힌다. 여기 물이랑 같이 마셔.”

  아이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과자 하나를 덥석 입에 넣었다.
  그러나 허겁거리며 급하게 삼킬 것이라는 헬싱 경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이는 과자를 입에 넣기 무섭게 퉤퉤거리며 뱉어 냈다. 몇 입 씹지도 않았는데.

  “맛없어!”
  “어쩌나. 달지 않아서 그런가? 크림에 찍어 먹으면 어때? 아니면 시럽에라도?”
  “싫어. 못 먹겠어. 너무 맛이 없어-.”

  맛있는 냄새가 나서 온 건데, 하며 아이는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헬싱 경은 조금 난처함을 느꼈다. 내 취향이 아이들과 상당 거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게 그렇게까지 못 먹을 음식이었나? 어릴 때는 돌도 씹어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사흘을 굶어도 순무는 맛이 없더라는 프랑스 왕자의 얘기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순무 얘기일 텐데. 아무리 안 달게 만들었다손 쳐도 명색이 과자 앞에서 맛없다고 도리질하는 굶주린 꼬마 녀석이라니. 설마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영국 급식 문화의 문제라는 것인가!
  헬싱 경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고뇌하고 있는 동안, 아이는 맛있는 냄새를 추적한답시고 자세를 낮추고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가 이런 저런 것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랍과 책상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아이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먹을 것이 아니라 아직 채 상자에 넣지 못한 레토 두 자루였다.

  “우와, 총! 진짜야? 만져도 돼?”
  “안돼, 위험해!”

  그러나 어린 사내아이란 원래 젊은 여자 말을 들어먹지 않는 법. 헬싱 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총집에서 총을 꺼내려 하던 아이는, 자루에 손이 닿자마자 소스라쳐서 레토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앗 뜨거!”
  “...켄?”
  “누나아-뜨거워-.”

  아이는 손을 그녀에게로 뻗어 보이며 총을 만진 손이 익어 버렸다고 울먹였다.

  - 설마.

  차갑고 날카로운 예감이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월터.”
  “예, 아가씨.”
  “물수건 좀 부탁해.”

  천막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는 그녀의 어조에 심상찮은 기운이 돌자, 말 그대로 순식간에 물에 적신 수건을 대령했다. 헬싱 경은 따갑다고 징징거리는 아이를 말없이 끌어당겨 수건으로 손과 얼굴, 양 팔, 그리고 목덜미를 북북 닦았다.
  어째서 눈치 채지 못했던 걸까.
  피로 젖어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아이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마르고 파리한 목덜미에는, 송곳에 찔린 듯한 자그마한 두 개의 상처가 있었다.

  “방금 구조한 아이들 다 데려와. 어서!”
  “네!”

  집사가 긴장한 얼굴로 뛰쳐나가 국원들을 소리쳐 부르는 동안, 인테그라는 조용히 아이의 두 손을 잡았다. 꼬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는 듯 멀뚱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보았다.

  “켄.”
  “응?”
  “침실에서 나오기 전에, 누구와 함께 있었지?”
  “누나.”
  “무슨 누나?”
  “...그냥, 누나.”

  인테그라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한 남자 뿐.

  “아카드.”

  대답이 없다.

  “아카드! 모체는 나중이야! 돌아와, 아카드!”
  “번잡스럽게 만드는군.”

  천막 안으로 스르륵 밀고 들어온 키 큰 남자의 형상에도 아이는 울거나 겁을 내지 않았다. 아니, 장신의 남자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 담긴 감정은 오히려 경애에 가까워 보였다. 그와 동시에 천막 안으로 월터가 얼굴을 닦인 아이들을 열 명 더 데리고 왔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핏기가 없었고...목덜미에는 엇비슷한 상처들이 생겨 있었다.

  “이 아이들은 뭐야.”
  “뭐긴. 보는 대로다. 주인.”
  “하지만 이 아이들은 스스로 조금도...!”
  “아직 자각이 없는 거다. 꼬맹이들에겐 그런 일도 있지. 평소에 친한 사이였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장난처럼 놀이처럼 다가와 모든 피를 빨리는 일도 생긴다, 고 아카드는 설명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얼굴은 창백한 가운데서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인테그라는 그렇게 느꼈다. 다 자란 처녀의 눈에 어린 것들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비록 흡혈귀로 화했다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변화를 견디지 못해 사라지기도 쉬운데, 용케도 다들 살아남았군.”

  단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도 무덤덤했다. 거의 즐거운 듯 보이는 흡혈귀는 별안간 품에서 총을 꺼내, 요란스러운 철컥 소리와 함께 아이들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아카드!”

  헬싱 경은 그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무심결에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홀린 듯한 눈으로 남자의 붉은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감정이 무뎌지고 있나. 그렇다면 어차피 이 녀석들은 곧 없어진다.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죽는다고?”
  “먼지가 먼지로 돌아가는 것일 뿐.”

  그냥 두어도 이 작은 흡혈귀들은 처해 있는 현실과 인간적인 사고 사이의 괴리를 넘기 힘들다. 먹으라며 피를 주면 이걸 어떻게 먹느냐며 질겁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음식도 먹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 결국 아이들은 노랗게 시들어가다, 놀이터에 놀러가기 위한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햇빛 가운데 몸을 던지며 죽어갈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잘하면 손을 더럽히지 않고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어떻게 할 거냐, 헬싱 경.”

  인테그라는 열이 오르는 머리를 짚었다. 몸에서 피가 빠져나오는 느낌과 함께 머리가 핑 돌고, 온 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시선은 어느새 그들이 경모하는 남자가 복종하는 한 여자에게로 옮겨졌다. 아마도 그녀에게서 피 냄새가 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내 헬싱 경을 향해 웃다가, 제각각 응석부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과 팔을 뻗어왔다.

  “아카드.”
  “분부를.”
  “죽여.”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Yes, my master."

  그리고 그 명을 받은 흡혈귀는 싱긋 웃은 뒤 깊이 고개를 숙였다.
  누나.
  누나.
  누나누나누나누나.
  헬싱 경은, 그녀에게로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뻗어 오던 열한 명의 아이들이 깊은 어둠에 삼켜지는 장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끝없이 지속되는 듯한 통증이 가슴에서 온 것인지 뱃속에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모체는 둘이었다. 시작은 보육원 원장이었더군.”
  “그랬나.”

  30분 뒤 모체의 처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흡혈귀는, 피로에 지친 얼굴로 앉아있는 그의 주인에게 돌아와 보고를 했다.

  “그리고 자원봉사자 중 한 아가씨가 추가로 흡혈귀가 되었지. 원래 모체의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고, 그냥 우연히 처녀였던 모양이다. 아이들의 피를 빤 것은 그녀야.”
  “왜 아이들을? 피에 취했나.”
  “마지막에 그러더군. 좀비에게 죽게 할 수가 없어서였다고.”
  “좀비에게 죽지 않게 하기 위해, 흡혈귀로 만들었다고?”

  하 하고 헬싱 경은 비웃음을 흘렸다.

  “가당찮은 핑계군. 실은 어린 피에 홀렸던 거겠지.”
  “그럴지도.”

  흡혈귀는 고개를 까딱 하며 긍정했다.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진정한 이유를 알아낼 수도 없다. 헬싱 경이 그렇게 믿기를 원한다면, 그냥 그렇게 믿는 편이 나았다. 얽히고설킨 인간의 복잡한 애정보다는 괴물의 단순한 악의가 더 이해하기 쉬우니까.
  헬싱 경은 흡혈귀의 보고를 기존의 서류에다 슥슥 덧붙인 뒤, 들고 있던 펜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이제 끝났네.”
  “그렇군.”
  “아카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무엇을.”

  헬싱 경은 눈을 천정으로 둔 채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째서 아이들을 안 죽여도 된다고 말했지?”
  “그럼 너는 왜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는 대답이었다. 물을 줄 알고 있었나. 이렇게나 마음이 읽히기 쉬운 주인이라니. 헬싱 경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 먼저 물은 건 나야.”
  “그러기를 바란다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묻지 마라.”

  흡혈귀는 여전히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어지간한 헬싱 경도 그 말에는 할 말을 잃었다.

  “역시, 그런 것이었나.”

  흡혈귀는 그녀에게 기다리라고 제안했다.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죽던가, 아니면 완전한 흡혈귀가 되어 인간의 피를 찾는 괴물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헬싱에게는 그들을 처단할 의무가 주어진다. 동정도 연민도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 길을 택했다면 손에 흐르는 것은 사람의 피가 아닌 괴물의 먼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다. 이미 그 아이들은 조금이나마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을 때 죽었으므로 이제는 누군가 그 짐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천장을 계속 노려보았다.

  “울고 있나, 인테그라?”
  “누가.”

  조금이라도 인간의 영혼을 갖고 죽을 수 있었다면, 그 피의 무게는 기꺼이 내가 지고 갈 테다.
  결코 철없는 눈물로 흘려보내거나 하지 않아.

  “흐음.”

  아카드는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기울이며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 주인의 강약은 100여년을 종으로 지내온 그조차도 함부로 측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늘어졌다 싶으면 바로 튕겨내고, 좀 단단하다 싶으면 이내 물렁해진다. 피의 내음만으로도 한 눈에 강도를 짐작할 수 있었던 여태까지의 당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아까까지는 저 정결한 피가 과연 초대 헬싱의 강함을 따라잡을 날이 올 것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미 그것을 능가해 버린 듯한 감동마저 느껴졌다.
  어째서 이 여자는 강함을 가늠하기가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가.

  “그나저나 그 보육원은 어쩔 거지? 소금을 치고 부숴버릴 건가.”
  “바보 같은 소리. 물론 소독은 하겠지만, 그러고 나면 꽃을 심을 거다.”
  “꽃?”
  “그래.”

  다소 멍청해진 얼굴의 흡혈귀를 향해, 헬싱 경의 눈이 반짝 하고 푸른빛을 띠었다.

  “그 앞에 예쁜 공원을 만들어서, 다음에 올 아이들이 그 일을 결코 눈치 채지 못하게 할 거야.”

  느닷없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웃음이 튀어나왔다.
  흡혈귀는 이상하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어깨를 들썩여 가며 웃었다.

  “하하하하...다음 아이들, 인가. 아하하하.”

  아아 이제야 알겠어.
  남자는 결코 저 정도로 강할 수 없다. 남자들은 적을 부수고 심장에 말뚝을 박고 그들의 목을 치고 영지를 황폐화시키겠지만, 결코 싸움 가운데에서 미래를 바라볼 수 없어. 적의 둥지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소금을 뿌린 뒤 악마를 가두는 것은 남자의 법도이지만 그 자리에 씨를 뿌려서 새싹을 틔우는 것은 여자의 방식.
  저 헬싱의 피를 이은 당주는 여자이기에 약하고 여자이기에 저 정도로 강한 것이다.
  심장이 마른 지도 오래된 차가운 몸이, 마치 불이라도 옮겨 붙은 듯 뜨거워졌다.
  그러나 헬싱 경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종의 행동 따위에는 신경을 꺼버리고, 수정이 끝난 보고서를 확인하면서 손으로 턱을 괸 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월터가 권해주는 한방약을 먹어볼까 봐. 더 이상 근심거리가 되는 건 질색이야.”
  “좋을 대로.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너는 이미 충분히 강해.”
  “비행기 태우지 마. 아까는 잘도 비웃던 주제에.”
  “아니, 진심이다.”

  저토록 강렬한 푸른 눈동자를 한번이라도 내 것으로 해볼 날이 있을 것인가.
  입을 삐죽이는 헬싱 경을 바라보면서, 불사의 왕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끼는 감정을 맛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가씨는 한약 한 재를 먹고 나서 생리통이 없어졌답니다(...).
2009/02/10 16:03 2009/02/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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