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티타임

from Fanfic/Hellsing 2009/02/10 16:03
  “저녁은 그만둬. 그냥 자리에 들겠어.”

  열여섯 살 어린 나이의 인테그라 F. W. 헬싱 경이 그런 청천 벽력같은 명령을 내렸음에도, 집사인 월터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성장기에 먹어두지 않으면 골다공증이 일찍 오게 된다던가, 지금 식사를 안 하면 아침까지 최소한 열 네 시간은 속이 비게 되니 위에 안 좋을 거라던가 하는 얘기는 일체 입에 담지 않았다. 일이십 년 해온 집사 생활이 아니다. 세바스찬의 눈치가 백단이라면 이쪽은 못해도 삼천 단.
  그렇다고 아직 어린 주인을 빈속으로 침대에 들일 생각은 꿈에도 없는지라 집사는 야식을 핑계로 꽤나 화려한 식탁을 마련하였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감자 스프, 구운 닭고기를 얹은 샐러드 한 사발에 잘 토스트된 이탈리안 브레드, 디저트로 시럽과 생크림을 얹은 딸기까지. 몇 개의 접시에 식기까지 추가하자 자그마한 야식용 쟁반은 말 그대로 터질 듯 했다. 집사가 간단한 야식이라며 그 쟁반을 들고 나타났을 때 지은 주인의 표정은 그야말로 볼만했지만, 집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접시와 식기들을 하나하나 테이블에 나열했다.
  거창하다고? 세상에는 피자헛에서 패밀리 사이즈 피자 두 판을 혼자 먹어치우거나 맥도날드에서 빅맥 열두 개를 먹어치우는 대식가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어디까지나 한입거리 간식일 따름이다. 설령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우길 심산이었다.

  “월터도 참...알았어. 두고 가.”

  다행히 헬싱 경은 지시를 무시한 집사를 나무라기 이전에 그 올곧은 충성심을 먼저 고려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집사는 음식에 보이는 주인의 긍정적인 반응에 힘입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깊이 허리를 숙인 뒤 보무도 당당하게 사실(私室)을 나갔다.
  혼자 남은 헬싱 경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집사가 차려놓은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오후 세 시 이후로는 아무것도 안 먹었으니 분명 위는 텅텅 비어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조금 전부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던 듯도 싶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음식은 꽤 맛있어 보이기도 했다. 분명 그녀의 취향을 잘 아는 집사가 드레싱은 적게 하고 파마산 치즈를 듬뿍 갈아 양상추 속에 숨겨 두었을 것이다. 헬싱 경은 손을 뻗어 엷게 자른 빵을 한 조각 갈라 스프에 담갔다.
  그러나 역시 속이 편치 않다.
  오틀랜드 공작가의 티타임은 워낙에 음식이 다양하고 맛있기로 유명했다. 티타임을 주도하는 오클랜드 공작부인 자신도 워낙 미식가이지만, ‘티타임에 방문한 이가 누구든 간에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이기 전까지는 절대 문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접대 철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왕가와도 별 인연이 없고 원탁회의 일원도 아니었건만 공작가의 오후는 언제나 손님들로 만원이었다. 선대 헬싱 경과 절친한 관계였던 두어 가문 외에는 친교라는 걸 아예 모르기로 유명한 헬싱 경까지 예의상 두어 번 참석했을 정도였다.
  보통 때라면 나이 차가 많은 다른 백작부인들 사이에서 얌전한 손녀딸 노릇을 하며 맛있는 음식이나 즐기다가 돌아왔을 것이다. 미성년의 당주이자 여백작인 헬싱 경은 나름대로 사교계에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사였다. 열세 살에 작위를 계승해 일반적인 여백작의 호칭인 Dame 대신에 남자의 호칭인 Sir를 수여받은 뒤 방대한 헬싱 가의 영지를 홀로 꾸려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월반해서 열여섯 살에 옥스퍼드에 입학 허가를 받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나이 든 노부인들은 티파티에 거의 참석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앉는 자리에라도 대충 앉혀 주면 좋으련만, 오틀랜드 공작부인은 일부러 혼자 찾아온 아가씨가 없는지를 물색하던 끝에 결국 이제 갓 서른이 된 램홀 남작 부부와 한 테이블에 그녀를 데려다 앉혔다.

  “아직 아이도 없는 부부라는군요. 남작부인이 아직 이십대 초반이니까 얘기가 통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그러나 반시간도 안 되어 헬싱 경은 쥐죽은 듯 조용한 테이블에 난처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날씨나 홍차 이야기를 건네다가 심지어 샌드위치 접시를 들어 권해 보아도 남작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겁에 질린 눈초리를 할 뿐 일체 말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부 사이에서도 대화다운 대화가 전혀 오가지를 않았다. 아니, 대화가 오가지 않는 경지를 넘어 서로에게 일체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아무튼 간에 남작은 주전자를 가져다 자기 찻잔에는 홍차를 따르면서도 부인의 빈 잔을 채울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으니까.
  헬싱 경은 조금 전 스프에 담가 두었던 빵 조각이 눅눅해져서 걸죽한 액체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죄 많은 놈이었는데.”

  남작 부인은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따뜻한 봄날씨에도 긴 장갑을 끼고 있었다. 목덜미의 멍을 감추기 위해 티타임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차이나 칼라의 웃옷을 입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속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그쪽 방향의 전문가인 헬싱 경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램홀 남작이 아내를 수시로 때린다는 소문은 헬싱 경도 집사로부터 들은 바 있었다. 이유까지야 듣지 못했지만 워낙에 핑계 있는 폭력은 흔해도 이유 있는 폭력은 드문 법. 헬싱 경은 램홀 남작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결국 자기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애초에 노부인들이 등장하지 않은 것도 이 남자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작이 괘씸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리고 얌전한 여백작 행세를 하고 있는 주제에 이 자리에서 분란을 일으킬 수도 없었고, 좀비 아닌 사람을 상대로 ‘네가 제 마누라 귀한 줄 모른다는 그 밥통이냐!’하면서 발목에 차고 있는 은제 권총을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헬싱은 영국을 위협하는 돌연변이들을 처리하는 기관일 뿐 사람들 사이의 문제에는 아예 관여하지 않는다. 이 일과는 관련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개는 인간 아닌 적들을 상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헬싱 경이지만 가끔 이런 사람 사이의 문제가 눈에 들어오면 몇 가지 생각에 슬퍼지곤 했다.
  첫째로는 힘과 의지 없이 당하고만 사는 이의 삶이 불쌍하다는 것.
  둘째는 도울 수 있는데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의 무관심이 치졸하다는 것.
  셋째는 힘도 있고 의사도 있지만 개입할 수 없는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것.

  “어쩔 수 없었잖아.”

  빵 조각이 완전히 스프 속으로 침몰한 뒤에도 그녀는 멍하니 스프 그릇만을 바라보았다.
  헬싱 경은 하는 수 없이 공작부인이 특유의 분방한 사교성을 발휘해 남작에게도 말을 걸어올 때를 조용히 기다렸다가 테이블을 떠버렸다. 다행히도 티타임이 끝날 때까지는 다시 부딪칠 일이 없어, 공작부인과 인사를 나누고 저택을 나설 때에는 기분이 꽤 나아져 있었다.
  정원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작은 파열음과 울부짖음을 듣기 전까지는.
  두말할 필요 없이 차 앞에서 대기하던 집사와 함께 헬싱 경은 행동을 개시했다. 오틀랜드 공작가의 너른 정원 안쪽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가 보니 거기서는 아니나 다를까, 램홀 남작이 부인의 멱살을 잡고 한창 복부를 난타하던 중이었다. 코피라도 흘렸는지 부인의 얼굴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옷은 바닥의 먼지로 지저분했다.

  “뭐, 뭐야?!”

  감히 남의 집안, 그것도 초대받은 공작가의 저택 안에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정말 제대로 걸렸군. 절대로 가만 안 두겠어. 타인의 출현에 놀라 엉거주춤하는 남작을 바라보는 헬싱 경의 눈은 좀비를 상대할 때 이상으로 파랗게 불타올랐다.

  “월터.”
  “알겠습니다.”

  집사는 주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큼성큼 남작을 향해 다가가, 부인을 잡고 있던 손을 거칠게 떼어 냈다.

  “넌 뭐야?”
  “그러한 폭력 행위를 눈에 띄지 않게만 했어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겠습니다만, 남작님.”
  “뭐라고?”
  “저의 주인 되신 백작님께서 당신의 행동을 매우 언짢아하고 계셔서 말입니다. 주인의 근심을 덜어드리지 않고서야 집사라고 말할 자격이 없지요.”

  전직 쓰레기 처리반이었던 집사는 순식간에 남작을 땅에 메다꽂은 다음 그의 무기인 은사(銀絲)를 휘둘러 남작의 옷가지를 싹둑싹둑 잘라 냈다. 아마 남작으로서는 무언가가 번쩍거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이 폭력을 휘둘러 본 적은 많아도 당해 본 적은 없던 남작으로서는 이것이 생전 처음 겪는 공포였던지, 넥타이와 와이셔츠 깃, 그리고 양복의 소매가 서너 번 잘려나가자 이내 부들부들 떨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 다음에는 어디를 잘라 드릴까요? 손가락? 아니면 발목?”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남작을 향해 집사가 한 발자국을 내딛었을 때였다.

  “남편에게 무슨 짓을!”
  “부인?”
  “이이에게 더 이상 손대지 말아요!”

  놀랍게도 집사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은 다름 아닌 남작부인이었다. 분명 남편의 옷가지를 손도 대지 않고 잘라내는 그의 모습에 그녀도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맞은 상처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그녀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집사와 남작 사이에 부동자세로 서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바보가 된 것은 다름 아닌 헬싱 경이었다.
  나쁜 쪽은 분명 남작 쪽이 맞았는데. 나는 그저 도와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남편에게 흙과 피로 더럽혀진 몰골을 당하고서도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협박하는 꼴은 못 보겠다니.
  뱃속이 딱딱해져 왔다. 헬싱 경은 눈앞에 놓인 음식 접시를 무시한 채 소파 위에서 몸을 공처럼 말았다.

  “왜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거냐고.”

  남작부인은 헬싱 경이 정중한 사과를 하고 난 뒤 남작의 차로 데려다 줄 때까지 남편의 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는 제의도 거절한 채 마치 폭력배를 보는 듯한 미심쩍은 눈으로 집사와 그 주인을 흘겨보았다. 자신을 유린하는 자를 사랑하나? 그러나 부인의 눈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처치 곤란할 정도의 불안. 내 편은 어디에도 없다는 공포. 자기 자신마저 적으로 만드는 바로 그 두려움.
  돌아오는 차 안에서 헬싱 경은 입을 다물었다. 친정이 가난해서 맞고 지내는 부인을 모른 체 한 지가 이미 꽤 되었다던가, 남작과 헤어지면 작위를 잃게 되는 평민 출신이라던가 하는 집사의 얘기는 한 귀로 흘려버렸다. 사정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부인이 스스로 나서 자기 남편을 보호했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이 적극적으로 남편-혹은 남편이 있음으로서 유지되는 일상-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제길, 언제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 따위 생활을!”

  인간이란 정녕 그렇게나 어리석어 질 수도 있는 것인가.
  식욕 같은 것이 생길 리가 없었다. 소리 없는 탄식만이 밤을 깊게 했다.

  - 슬퍼 마라. 그 여자는 헬싱 경의 동정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으니.

  분명 텅 비어있는 방 안을 익숙한 목소리가 내달렸다.

  “듣고 있었어?”
  - 아아.
  “어째서 가치가 없다는 거야.”
  - 그 여자는 두려움의 유혹에 졌다. 인도(人道)를 잃은 이상,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 없어.
  “사람이 아니라면 뭔데.”
  - 아마도 너희들은 그것을 ‘체념’이라 부를 거다.

  흡혈귀의 기척이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 하지만 나는 그냥, 괴물이라 부르지.

  이윽고 방에는 헬싱 경 혼자만이 오롯이 남았다.
  따뜻하던 스프가 다 식어빠진 뒤에도, 그녀는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뒤적거리며 한참 동안이나 소파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사람이, 아니다.”

  그녀에게 복종하고 있는 흡혈귀는 한 마디로 남작부인을 인간이 아니라 단정했다. 이미 길을 잃었다고도 했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부인은 자신을 파괴하는 남편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삶의 결론은 뻔한 것이다.
  하지만 부인은 아직 살아 있다. 지금이 아닌 어느 순간에는 사람인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내가 그녀를 위해 슬퍼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왜 어떤 이에게는 사람으로서의 길을 걷기가 이다지도 힘들어야 한단 말인가.
  눈물이 단 한 방울, 인테그라의 눈에서 떨어졌다.
  석 달쯤 후 남작 부인이 결국 남작의 손에 죽고 램홀 남작의 작위가 박탈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뒤, 헬싱 경은 이후 몇 년이나 오틀랜드 공작가의 티타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2009/02/10 16:03 2009/02/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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