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Test

from Fanfic/Hellsing 2009/02/10 16:02
  집사는 주인의 방에서 정성스럽게 베갯잇을 매만지고 있었다.
  다른 곳 같으면 하녀들에게 맡길 수도 있겠지만 이곳의 관리만큼은 결코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는다. 그것은 주인의 방을 철통같이 경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그 행위 자체가 그의 자부심을 북돋아주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주인은 집사 이외에 다른 사람의 손이 탄 잠자리에서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몇 시간을 뒤척거리기 일쑤였지만, 그가 직접 정리한 잠자리에서는 아무리 신경이 곤두서 있었더라도 반시간 이내에 잠에 빠져들었다. 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사용하는 가는 은사(銀絲)처럼 세심한 신경을 가진 주인이 그의 손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은 집사로서 더할 나위 없는 자랑이었다.
  베게와 시트가 제 자리에 놓였는지 다시 한번 눈대중으로 확인한 뒤 마지막 정리를 위해 침대 머리를 우아하게 꾸미고 있는 조각 위에 먼지가 없는지를 살피고 있을 때, 벽 언저리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가 좀 이르지 않나, 집사 나리?”
  “이런, 아가씨의 침실 출입은 부디 삼가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아카드.”

  월터는 건너 편 벽에 불쑥 튀어나와 있는 사람 머리 모양의 형상을 향해 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챙 넓은 모자와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벽 사이를 함부로 통과해 다니는 저 흑발의 남자는 이 저택의 주인인 인테그라 F. W. 헬싱 경의 종복이자 흡혈귀인 아카드이다.
  종복이라고는 하나 보통 인간의 부하에게 기대할 수 있는 충성심이나 예의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함부로 주인 되는 자에게 반말을 찍찍 해대는 건 기본이고, 벽을 마음대로 통과해 다닐 수 있다는 장점을 이용해 지금처럼 남의 방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헬싱 가에서 근무하는 하녀들이 자주자주 바뀌는 것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식사로 혈액 팩을 충분히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마구 덮친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저택 안을 휘젓고 다니는 그의 행동은 얼마 전 헬싱 가에서 작위를 걸고 벌어진 바 있는 유난스러운 투쟁사와 맞물려 원한에 찬 유령이 집안을 돌아다닌다는 뜬금없는 괴소문의 근원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괴담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이미 온전한 처녀가 된 지도 반년이 넘어가는 주인의 방에 피를 원하는 흡혈귀가 함부로 드나들게 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종복일지언정 결혼도 안 한 아가씨의 방에 흡혈귀가 제멋대로 오간다니, 대대로 괴물을 사냥해 온 헬싱 가의 명예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다. 그런 연유로 월터는 작년부터 아카드에게 퍼붓는 잔소리의 강도를 두 배 이상 올려 왔지만 효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최소한 발은 들이지 않았어. 그리고 지금은 방 임자도 없지 않나.”
  “머리를 들이밀고 그렇게 말해 본들 무슨 소용입니까. 게다가 아가씨가 계시고 안 계시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미 말씀 드렸을 텐데요.”
  “또 그놈의 예의범절인가. 인간 아닌 자에게 인간의 매너를 기대하지 마라.”

  아카드는 귀찮은 듯 월터의 말을 딱 잘라 버리고는 아예 대놓고 방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와 깔끔하게 정돈된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왜 벌써부터 여기를 정돈하고 있는 거지? 인테그라가 오는 날은 금요일이잖아.”
  “이번 주에는 사정이 생겨서 하루 일찍 오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호오?”

  아카드의 동공이 호기심의 빛을 띠면서 크기를 키웠다.

  “드디어 기숙학교 생활을 포기하는 건가? 안 그래도 얼마나 갈 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 말, 아가씨께 직접 말씀드려 보시지요.”
  “데저트 콘도르의 9mm짜리 은 탄환이 최소 여섯 발은 날아오겠지.”
  “뻔히 아시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지만 그 녀석이 기숙학교 학생이라니 우습잖아. 처음에는 여왕 폐하가 노망이 난 거라고 생각했다.”

  아카드는 말을 하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킬킬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월터는 애써 닦아 놓은 의자에 멋대로 앉는 그가 못마땅해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당주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래, 헬싱 경은 학교를 제대로 다닌 적이 없었다. 언제나 당주로서의 임무가 먼저였기에 모자라는 수업을 숱한 가정교사들로 보충할지언정 학업 때문에 임무를 회피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필연적으로 출석일수는 진급에 겨우 아슬아슬해서, 결국 저번 학기말에는 출석 대신 레포트를 아홉 개나 써 내야만 했다. 그 때문에 사흘이나 제대로 잠을 못 잤지만 영명한 당주는 그 일을 불평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포트 때문에 업무가 밀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상급 학교로 월반 진학을 하게 되는 올해 초, 약간의 마찰이 발생했다. 가장 지체 높으신 귀족 가문의 영양과 자제들이 다니는 최고의 사립학교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헬싱 가의 저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곳에서 기숙학교 스타일로 운영되고 있다. 물론 통학의 의사가 있다면 꼭 기숙사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최고의 학생들이 모이는 만큼 그들과의 인맥 형성 문제도 있고 해서 거의 모든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선택하게 마련이었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교칙상 전교생들 앞에서 본인의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헬싱 가의 업무가 대부분 베일로 가려져 있는 상황에서 어설픈 핑계라는 오명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어린 아가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보다 두 살 이상 많은 숱한 학생들 앞에서 가문의 당주 업무 때문에 기숙사를 사용할 수 없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 때 여왕 폐하가 직접 개입하시어 적어도 기숙사에서 한 학기만이라도 다녀보라고 명하시지 않았다면 일은 그대로 마무리가 되었을 것이었다.

  “저도 폐하께서 왜 그러셨는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여왕은 헬싱 경이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자제해 주십시오.”

  여왕은 영국이라는 나라와 국교회라는 종교 두 가지를 한 몸에 짊어지고 계신 분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여 여왕을 보필하고 있는 신하들은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그들의 의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국교회기사단장의 직함을 맡고 있는 이상 당주는 아무리 어려도 단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고 또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12인 원탁회의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은 기사단장에게, 여왕 폐하께서 동정심을 보이신다? 여왕 폐하의 신발끈이나 겨우 묶는 존재일 뿐인 일개 신하에게 개인적인 감상을 공개적으로 표출하신다? 신이여 보호하소서. 그건 곧 헬싱 경 자신과 그를 선출한 원탁회의 전부에게 나가 죽으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녹슬어 못 쓰게 된 칼은 다시 벼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진흙탕에 버려져야 마땅했다.

  “후후. 인간들의 자존심 놀음에는 관심 없어. 여왕은 인테그라가 어린 나이에 평범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게 불쌍한 거다. 기숙사에서 꼬맹이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수다를 떤다던가 하는 따분한 일상을 맛보여 주고 싶은 거야.”
  “평범한 생활에 익숙하도록 하기 위해서, 정도의 명목이라면 나쁘지 않군요.”
  “그렇게 설득했겠지.”
  “네에. 언젠가는 의무로라도 겪어야 하는 일이니까요.”
  “아마도. 그런데 오늘은 왜 일찍 돌아온다는 거지?”
  “내일 학교 행사가 있다더군요. 아마도 근교로 전교생이 피크닉을 가는 모양인데, 4분기 업무계획 작성 건도 있고 번잡스러운 것도 싫으시니 아예 빠지시겠답니다.”
  “피크닉?”
  “네. Thorpe park라는 놀이동산으로 가는 것 같더군요.”
  “아, 거기.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여신의 이름을 딴 신형 롤러코스터가 인기라던가.”

  월터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기억을 더듬고 있는 아카드를 향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거 참, 당신이 세간에 어둡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럴 때는 가끔 놀라게 됩니다.”
  “지루할 때는 소일거리가 필요한 법이니까. TV도 보고 라디오도 듣지.”

  아카드는 낮게 웃으면서 손을 올려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이제 곧 한낮이겠군. 나는 그만 자겠다.”
  “그럼, 아가씨가 돌아오실 때쯤 알려드릴까요?”
  “필요 없어. 낮에는 마중 나가지 않는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흡혈귀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도 기척도 없이 사라진 뒤, 집사는 흐트러진 의자의 배열을 말끔하게 정돈하고 다시 한 번 먼지까지 떨어낸 다음에야 주인의 침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허나 집사의 성실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헬싱 가의 어린 당주는 완벽하게 정리된 침실에 밤이 늦도록 들어가지 못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처리하지 못해 밀린 업무를 끝내야겠다며 고집을 부린 탓이었다. 대부분은 월터가 먼저 처리한 뒤 보고를 하고 정 사정이 중한 경우에는 기숙사까지 인편으로 서류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집에 있을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서류 결재를 위해 저녁 만찬을 포기하고 샌드위치와 주스로 식사를 때우고 있는데도 쌓여 있는 서류는 쉽게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특별히 하루 일찍 도착해서 일을 하고 있는데도 상황이 이 모양이니.

  “하아.”

  인테그라는 월터가 손수 정돈해 두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포근한 침대를 그리워하며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잠자리에 민감한 그녀로서는 기숙사의 침대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루 세 시간을 자는 것도 어려워서 뻣뻣한 기숙사의 시트 밑에서 얼마나 뒤척거렸던가. 사람은 적응의 생물인지라 요즘은 그나마 라틴어로 번역된 교과서를 읽으면서 한 시간 정도를 보내면 그럭저럭 잠이 들 수 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싶다는 욕구는 주말 저녁까지 항상 그녀를 괴롭혔다. 어쩌면 내일 가는 피크닉을 깔끔하게 포기하도록 만든 원동력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욕구일지도.

  “여왕 폐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폐하께서 어디까지나 그녀를 위하는 의도에서 기숙학교를 권하셨다는 것은 십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피로와 일이 가중되게 되리라는 점을 미처 예상치 못하셨을 수는 있는 일 아닌가.

  “이런 이런. 열네 살 꽃다운 나이의 충실하기 그지없던 신하, 드디어 여왕 폐하에게 역심(逆心)을 품다.”
  “놀아줄 시간 없어.”

  갑자기 바닥에서 등장한 흡혈귀의 모습에도 인테그라는 쌀쌀맞게 대꾸할 뿐, 0.5밀리 H심을 집어넣은 샤프펜슬로 서류에 줄을 쳐가며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냉정한 대응에 끄떡없는 것은 흡혈귀 쪽도 마찬가지였다.

  “기숙학교라는 데가 충성심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곳인 모양이지?”
  “속이나 긁으러 온 거라면 사라져.”
  “그러지 말고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을 해봐. 그러면 충실한 하인이 주인의 일을 도와줄 지도 모르지.”

  너처럼 불량한 자의 어디가 충실한 하인의 모습이라는 거냐-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 위해 인테그라가 고개를 들자, 바닥 근처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흡혈귀도 붉은 눈동자를 들어 책상 위의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러나 선글라스로 가리지도 않은 그의 눈에는 조금쯤 평소와 다른 빛이 스며들어 있어 흡혈귀의 주인은 약간 놀라움을 느꼈다.

  “혹시 요즘 피가 모자라?”
  “전혀.”
  “그런데 눈이 왜 그렇지?”
  “내 눈이 어떤데, Sir. Hellsing?”

  왠지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질문을 받아치는 흡혈귀에게 뭐라고 딱히 꼬집을 만한 구석은 또 없다. 인테그라는 그에게 대답할 말을 찾느라 약간 말을 입에서 굴려야 했다.

  “뭐랄까, 배가 고파 보여.”
  “그건 경의 기분 탓이야. 오랜만의 집 밥을 대강 때우는 게 억울한가.”
  “정말로 그럴지도.”
  “어차피 일찍 돌아와 봤자 격무에 시달리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왜 Thorpe park에 가지 않았지?”
  “거기라는 걸 어떻게...아, 월터가 얘기한 건가.”
  “자자. 말을 돌리지 말고.”
  “돌리긴 누가. 가장된 위험을 돈 주고 즐기는 취미는 없으니까 그런 거다.”

  퉁명스럽게 대꾸한 다음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는 주인의 뚱한 얼굴과는 반대로, 종복인 흡혈귀의 입에 솟아오른 비틀린 미소는 점점 더 깊이를 더해 갔다.

  “그렇군. 고작해야 롤러코스터 수준의 스릴로 스스로의 강인함을 확인해야 할 만큼 약하지는 않다는 건가.”
  “잘 알고 있으면 묻지 마. 보시다시피 바쁘다.”
  “하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운 일이 싫다면 다른 곳을 다녀도 되잖아. 놀이동산이라고는 해도 치기어린 장난감들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잘도 아는군.”
  “TV를 보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거든. 해변의 즐거움과 재미, 넵튠스 가든으로 오세요 따위.”
  “폐인 났다.”
  “자꾸 돌아가지 마, 헬싱 경. 내가 묻고 있는 건 단 한 가지야. 진짜로, 왜 가지 않았지?”
  “....”

  아직 하인과의 말싸움을 피하는 법을 모른 채 지지 않는 것만이 강한 것이라 여기고 있는 어린 당주는, 드물게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그녀의 종복은 그녀가 서류를 두고 있는 책상 위로 살그머니 다가가 마치 유혹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닌가?”

  흡혈귀의 주인이자 아직 어린 열 네 살의 소녀는 손에 든 서류를 다부지게 틀어쥘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종 되는 흡혈귀는 그 단순한 동작에서 피어오르는 옅은 수치와 외로움의 향기를 쉽게 맡을 수 있는 연륜과 기술을 갖고 있었다.

  - 역시나.

  학교란 닫힌 조직에 가까워 조금이라도 튀는 존재에게 의외로 상당히 가혹한 환경이 되기 쉽다. 헬싱 가문의 이 어린 영양(令孃)은 최고의 학교에 월반으로 진학할 만큼의 당당한 실력을 갖추고는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대놓고 선언했다가 급하게 철회한 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종종 급한 일이라며 수업을 빼먹거나 하는 것 때문에 다른 학생들로부터 다소 경원시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원체 국교기사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영국 내에서도 극히 일부이다. 그나마 그중 대부분은 기사단 자체가 명목상으로만 남아 있는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진정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영국 내에서 이백 명도 채 되지 않는데다 그 중 절반이 기관원. 이 상황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그녀가 학교 조직에서 겉돌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인정받기란 사실 어렵다.
  아무래도 평범한 생활을 맛보라며 그녀를 기숙사로 보낸 여왕의 판단은 조금 착오였던 것 같다. 그러나 신하된 자로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터. 최소한 말씀하신 한 학기만큼은 충실히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과, 당장 이 생활을 청산하지 않으면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이성 사이의 고민이 당주의 작은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차라리 여왕에게-”
  “동정은 필요 없다, 종복이여.”

  인테그라는 단호하게 흡혈귀의 말을 자르며 서류를 책상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어. 그리고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거다.”

  그 순간 흡혈귀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외롭지 않다며 변명하지 않는다. 친구가 없어도 된다고 억지 부리지도 않는다. 스스로가 외롭고 슬프다는 것을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 해결을 위해 스스로의 의무를 적당히 덜어내려 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눈은 단단하지 않지만 망설이고 있지도 않다. 뒤를 돌아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하는 자. 험한 길을 골랐으면서도 스스로의 방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
  어린 당주는 어떻게 보아도 인간 그 자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처음 얼굴을 마주 대하던 바로 그 순간의 모습 같지 않은가.

  “하하하...역시 대단하군, 주인. 아하하하.”

  아카드는 당주의 책상 앞에서 기분 좋게 한참을 웃었다. 인테그라가 어느덧 그의 눈에 잠시나마 비쳤던 기묘한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느닷없이 흡혈귀의 서늘한 손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럼 갈까.”
  “뭐야!?”
  “Thorpe park. 실물은 한 번도 못 봤으니 구경이나 가보자고.”
  “무슨 소리야? 지금이 몇 신데!”
  “개장 10주년 기념으로 10월까지 밤샘 야간개장을 한다더군. 뭐라더라. 낮보다 밝은 밤을 아침까지 즐기세요, 였을 걸.”
  “진짜로 TV 폐인이 되기로 작정했냐? 이거 놔!”
  “송구하오나 요즘 세상이 너무 조용해서 당신의 종이 좀 무료하나이다. 집사! 차 대기시켜.”
  “하인 주제에 누구한테 명령하는 거야! 주인은 나야!”

  그러나 아무래도 이번에 한해, 흡혈귀의 의지는 주인의 것에 그다지 반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월터의 도움을 받은 둘은 어느 사이엔가 교외로 향하는 차 안에 함께 몸을 싣고 있었다.

                                                  *                                   *

  노랗게 붉게 물든 활엽수들 사이로 걸린 조명은 휘황하기 그지없었다. 놀이기구를 비추는 커다란 등 말고도 알록달록한 빛깔의 자그마한 전구들이 마치 루미나리에처럼 화려한 무늬를 만들면서 물결처럼 떠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10주년 기념’이라는 거대한 글자가 레이저로 공중에 그려질 때면 감탄한 사람들의 환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런 곳을 다녀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인테그라는 눈이 휘둥그레져, 넋이 나간 양 색색으로 물들여지는 거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면 어느 사이엔가 단정한 정장 차림새로 옷을 바꿔 입은 흡혈귀의 감상은 단 한마디였다.

  “낮보다 밝다는 건 거짓말이군.”
  “그게 소감의 전부야?”

  늘 하던 버릇대로 받아치고는 있었지만 인테그라는 사실 하인의 반응에 특별히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아직은 열네 살. 아무리 똑똑하고 강단이 있어도 번쩍이는 불빛에 마음을 빼앗길 나이인 탓이다. 호위를 겸해 주인의 옆을 따라가던 아카드는 소녀의 발걸음이 이 불빛 저 불빛을 따라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상의 안주머니에 넣어 둔 티켓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면 개찰구를 지난 이래로 이걸 한 번도 써먹어 본 적이 없다.

  “밤이라 돌아가는 건 몇 가지 안 되는 것 같지만, 뭐라도 탈 생각인가?”
  “말했잖아. 돈 들여 싸구려 스릴을 사는 취미는 없다고.”
  “매표소 아가씨는 표만 사면 타는 건 공짜라던데.”
  “뭐? 도대체 무슨 티켓을 산거야 너.”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반짝거리는 단풍을 바라보던 인테그라는 그 말에 느닷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몰라. 그냥 표를 샀을 뿐이야.”
  “잔말 말고 줘봐.”

  흡혈귀의 손에서 낚아채듯 티켓을 가져간 소녀는 얼굴까지 찌푸려가며 잠시 종이를 뚫어지게 노려보더니 이내 하하 하고 웃고 말았다.

  “야간 자유이용권을 사버렸구나.”
  “표 종류는 하나가 아닌가.”
  “아무것도 안 탈 거면 입장권만 사면 되는 거야. 별 걸 다 알길래 그냥 뒀더니, 이런 건 몰랐나봐?”
  “그거 참 미안하게 됐군. 생각 없다면 그냥 구경이나 하지.”

  그러나 느긋하게 사과하는 흡혈귀의 말투에 미안하다는 감정은 털끝만큼도 들어 있지 않았다.

  “표 값이 아깝게 됐네.”
  “뭐 어때. 고귀하신 헬싱 경이 저런 험한 꼴을 자랑하게 되는 것보다야 낫겠지.”

  아카드는 싱긋 웃으며 긴 팔을 뻗어 멀리서 오르락내리락하며 돌아가고 있는 북구(北歐)의 배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줄지어 앉은 그 배에서는 끊임없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저건 정말로 무서워서 소리치는 게 아닐 걸.”
  “글쎄 어떨까.”
  “가까이 가서 구경할래.”
  “좋으실 대로.”

  종복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긍정의 대답을 하기 무섭게 소녀는 걷는 속도를 빠르게 높였다.
  비록 충성심이나 예의범절과는 거리가 있는 하인이지만, 내일 동급생들과 이곳을 오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일 간다면 언제나처럼 혼자 구경하며 다니거나 피크닉에서까지 교사들과 환담을 나누려 애쓰는 우등생인 척 할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학생들이 그녀를 일부러 괴롭히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자부심이 높은 청년들이다. 하지만 굳이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어린 꼬마에게까지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기에는 또 너무나 자존심이 강한 이들이었다. 친한 사이들끼리는 파티를 연다 술을 몰래 마신다 하며 흥청망청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하는 것 같지만 동급생일지라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이들에게는 어디까지나 예의의 선을 갖출 뿐 절대로 일정한 테두리를 넘기지 않았다.
  만일 내일 가기로 했다면, 나는 모두와 함께 저 요동치는 배를 타고 마치 두려운 듯 소리를 지를 수 있었을까? 그보다는 혼자 다니는 것에 지쳐 여왕 폐하께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기숙사를 나오리라 마음먹게 되지 않았을까?
  어찌되었던 간에 대낮부터 그런 복잡한 문제를 고민하며 이곳을 거닐게 되는 것보다는 저 발칙한 하인과 함께 밤의 불빛을 따라 걷는 것이 그녀 자신으로서는 훨씬 더 편한 일이었다.

  “과연. 한가운데 있는 저 축을 돌려서 배를 움직이게 하는 거군.”
  “그렇네.”
  “그런데 왜 한 바퀴 다를 완전히 돌리지 않는 거지? 그 편이 더 멋질 텐데.”
  “설마. 뒤집어지면 정말로 떨어질 지도 몰라.”
  “하지만 칸막이는 다들 되어 있잖아.”
  “그렇다손 쳐도 그건 동력의 낭비야.”
  “가끔 한두 번씩 임의로 해 줘도 좋지 않을까. 재미있을 거다. 몇 명은 기절해 버릴 거고.”
  “아아, 깜짝 이벤트로 한다면 분명 그럴 걸.”

  키득거리며 웃는 소녀를 돌아보는 아카드의 눈이 다시 한 번 묘한 빛을 띄웠다.

  “기절하는 게 재미있나?”
  “민폐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별 것 아니잖아. 오히려 안전 의식 고취를 위해서는 좋은 자극제가 되겠지.”

  가볍게 대답하는 소녀의 볼에, 마치 쌀쌀한 밤공기를 막아주려는 것처럼 장갑을 낀 흡혈귀의 손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아득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부드럽게 울렸다.

  “그럼, 죽는 건 어때?”

  인테그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바싹 다가온 아카드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라면 절대로 읽을 수 없을 흡혈귀의 사고가 소녀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그들이 싫지? 그들이 밉지? 주인인 네가 명령만 내리면 나는 그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어.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지.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어. 네 마음대로 세상을 다시 지을 수도 있다. 자. 어떻게 생각하나.

  호흡이 어려웠다. 입술이 타기라도 한 듯 바짝 말라왔다.

  - 선택해라. 나의 주인이여.

  메마른 입술을 간신히 달싹거리던 인테그라는, 비뚤어진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카드의 눈에서 보이는 예의 그 묘한 빛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문득 깨달았다.
  이 자는, 지금 내가 약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여왕 폐하를 의심하는 작은 말에서, 인간인 동급생보다도 괴물인 자신을 편하게 여기는 행동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안위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에서 내가 약해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나의 약점을 비틀어 공격하려는 것이다. 지금 내게, 자신이 재미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약점을 물어뜯는 것으로 충성심을 표시하는, 짐승의 논리로 주인을 섬기는 이 자.
  이 자는 진실로 인간이 아니다.
  헬싱 가의 어린 당주는 숨을 깊이 들이쉰 뒤 아무 색깔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감히 네 주인 된 인간을 시험하려 들지 마라, 흡혈귀.”
  “Yes, My master."

  웃음기를 채 지우지도 않고 고개를 깊이 숙이는 흡혈귀의 낯에다 욕이라도 한 바탕 퍼부어 주고 싶은 마음을 뒤로 한 채, 인테그라는 발을 돌려 들어왔던 출입구를 향했다.

  “돌아가겠어.”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지 않고?”
  “필요 없다.”
  “그 정도는 같이 먹어줄 수도 있는데.”
  “천연덕스럽긴! 돌아가면 관을 은으로 도배할 줄 알아!”

  벌컥 화를 낸 다음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쫒으면서 아카드는 느릿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후, 선대 아서보다도 빨리 거부하는가.”

  새로운 헬싱 경이 작위를 받은 지도 어언 일년. 이렇다할 사건도 없이 관원들도 처리 가능한 쓰레기들만을 상대하기에는 그의 능력이 쓸데없이 지나친 감이 있었다. 세간의 사정을 파악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어쩌면 다시 봉인해달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저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가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새 주인의 의지를 보고 있노라면 앞으로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생긴다.

  “역시 재미있어...그렇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 볼까.”

  주인이 먼저 들어앉아 있는 차 위로 쏟아지는 창백한 달빛 쪽이, 흡혈귀에게는 놀이공원의 찬란한 불빛보다 청량하였다.



  배경은 헬싱 작품 당시보다 9년 전, 즉 1990년입니다.

2009/02/10 16:02 2009/02/1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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