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 Time

from Fanfic/Gundam 2009/02/10 15:59

  턱을 괴고 있는 저 모양새 좀 보라지. 제가 먼저 놀러와 놓고선 입이 댓 발은 나왔다.

  “뭐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아니.”

  아니라고 말하면 뭐하나. 표정이며 자세가 이미 ‘나 삐졌소~’하고 외치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약혼식이라도 할 거라고 전화한 지 사흘도 안 되었다. 아무리 소꿉친구인데다 같은 전함에서 한솥밥 먹는 사이였더라도 종전 이후로는 한 달에 한 번 꼴로도 연락할까 말까 했던 처지. 약혼한다는 소식에 선물이라도 싸들고 온 걸 보면 축하를 해주겠다고 온 것임은 확실했다. 선물이랍시고 사온 것이 애 셋 딸린 방 네 개짜리 집에는 어울리지도 않을 자그마한 신혼부부용 커피포트라는 얼척없는 센스는 그냥 넘어가 주자. 어차피 혼자 살면서 가정부와 집사를 부리는 열일곱 살 청년에게 15인용 전기압력밥솥을 가져오는 주부의 감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물 가져와 놓고는 마치 내 돈 내놓으시오 하는 듯 컵을 노려보며 뭐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이유는 뭐냐. 앞에 앉아 있는 사람 무안하게스리.

  “아무로.”
  “왜?”
  “혹시 요즘...돈이 모자라?”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 일년 전쟁의 영웅으로서 군에서 지급하는 월급이 풍족하다고는 하지만 프라우가 보기에 최근의 아무로는 지름이 지나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북미에서는 꽤나 유명세 탄다 하는 휴양지에 수영장과 정원이 딸린 집 장만했지, 집사와 가정부도 두고 있지, 반년 전에 받은 사진과 다른 차를 끌고 온 걸 보니 차로 새로 산 모양인데...확실하진 않아도 저번 달엔가는 자가 비행기 부품을 하나 둘씩 모으고 있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결혼할 때는 아이 셋을 입양해서 살 계획인 프라우로서는 일년 후에 장만해야 할 집에서부터 큰 차, 큰 냉장고 등등 세간살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돈 걱정이었다. 비록 연금을 양쪽에서 다 타고 있기는 하지만 퇴역한 이상 아무로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다섯 개 입이 먹고 살려면 신랑인 하야토가 어딘가 직장을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뭔가 하라고 닥달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로는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손을 휘휘 저으며 프라우의 걱정을 가볍게 뿌리쳤다.

  “누가 그래?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뭐.”

  저 인간이 지금, 어디 심사가 틀려도 단단히 뒤틀린 게야.
  하지만 프라우로서는 아무로의 심사가 꼬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집에 들어올 적만 해도 분위기 좋았다. 하야토가 꼬마들 챙기고 오느라 늦는다고 해도 별로 신경질 내는 기색도 없이 가볍게 응 응 하고는 끝이었다. 되레 골치 아픈 꼬마들과 조우하는 시간이 늦는다는 점에서 반색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더우니까 시원한 음료수 내준다고 오렌지 주스를 건네받은 다음부터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10분쯤 지나서는 말도 잘 못 붙일 만큼 표정이 달라졌다. 건강을 위해 특별히 신경 써서 고른 유기농 오렌지를 갈아 만든 생과일주스다. 오렌지에 알레르기가 있던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가 문제더냐.

  “오렌지 주스가 싫은 거야? 다른 거 내줄까? 키위랑 파인애플도 있는데.”
  “...됐어.”

  얼레.
  ‘아냐’라던가 ‘싫어’가 아니라 ‘됐어’?

  “어머 아무로, 정말 주스 때문에 기분이 상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냐.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마실 거리 때문에 화난 것 맞구만. 내 너를 안 지가 몇 년인데, 그 정도 눈치도 없을 줄 알고.

  “주스 싫으면 그냥 커피로 줄게. 자, 그거 다시 내.”
  “됐다니까.”
  “되긴 뭘. 컵 이리 줘. 그런데 너도 안 그러더니 마실 거에 까탈스러워졌네. 오렌지 주스 싫어하지 않았잖아? 그러고 보니 카츠가 요즘 음료수를 좀 가리는데, 콜라만 달라고 해서....”
  “됐다고 했잖아!!”

  아무로가 느닷없이 큰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프라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로?”
  “너, 변했어!”
  “무슨 소리야?”

  프라우는 얼굴이 벌개져서 그녀를 향해 삿대질까지 하는 아무로를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네들 둘이 알고 지낸 이래, 이렇게 화를 내는 그를 보는 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겨우 꼽을까 말까 한 정도였다. 게다가 그것도 대부분은 열두 살 이전의 일이라 기억조차 희미했다.
  헌데 오늘따라 저 인간이 왜 이러는 건지.

  “이거, 다른 거 따르고 남은 거 아냐?”
  “어머나, 아냐! 왜 그런 생각을 해?”
  “내 걸 늦게 내왔잖아? 게다가 껍질도 들었다구!”

  쟤가 미쳤나. 지금 고작 주스에 껍질 좀 들어갔다고 내 앞에서 시위하는 거야?
  프라우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약간이나마 가라앉히기 위해 천천히 숨을 한 번 고른 뒤 입을 떼었다.

  “진정해 아무로. 다 떨어져서 새로 짜느라고 조금 껍질이 들어갔을 뿐이야.”
  “내 말은...!”

  그녀의 쌀쌀한 말투에 아무로는 조금 기가 죽은 듯 움찔 하고 손을 내렸다. 살짝 프라우의 눈치를 보는 걸 보니 아주 수틀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뻗친 열을 진정시키지는 쉽지 않았던지, 아무로는 내린 손으로 식탁을 탁 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성의가 없단 말이야!”
  “....”

  가슴이 서늘해졌다.
  새로 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경을 덜 쓴 것도 사실이다. 껍질이 붙어 있거나 말거나 적당히 벗기기만 하고는 믹서기에 던져 넣은 오렌지에는 어지간히 여유 만만한 프라우도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녀에게는 이미 더 중한 사람이 여럿 있는지라 그에게는 더 이상 세심하게 마음을 써 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그녀의 가족이 될 사람들이기에 그녀는 그것이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올 마음이 줄어듦을 느끼고 있는 처지로서는 서운하겠지. 답답하겠지. 어쩌면 화도 나겠지. 조금은 짜증도 나겠지. 스스로가 깨닫지 못할지언정, 약혼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것도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조금의 배려도 없이 그녀가 따라올 수 없는 어딘가로 먼저 가버렸던 것은 그의 쪽이 아니던가. 그녀의 성의 없음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열어 주었다면 그녀는 아마도....
  아니, 지금 와서 그런 것을 생각해봤자 무얼 더하겠는가.
  나는 더 이상 너를 걱정해줄 수 없어. 차라리 그냥 나를 미워해.
  그래서 프라우는 그의 처연한 표정을 보면서도 이를 악물고 애써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어리광부리지 말고 그냥 마셔, 아무로.”

  그리고 아무로의 동공이 확대되는 것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 자신의 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 한때 내 심장에 맞닿아 있었던, 어느새 너무나도 멀리 가버렸던 이여.
  나의 심장에는 이미 다른 사람을 채웠다네.
  그래도 그 심장이 나 때문에 찢어질 일은 없겠지...그대의 가슴은 이미 다른 이로 인해 산산이 조각나 있을 테니....


  예전에는 하고 싶던 말이 산처럼 많았다. 하지만 그 중 지금 할 수 있는 얘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프라우와 아무로는 약 15분간, 아이들을 데리고 하야토가 들어올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애꿎은 주스만 휘저어가며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만 있었다.

2009/02/10 15:59 2009/02/1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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