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secret

from Fanfic/Gundam 2009/02/10 15:59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가 고프게 마련이다.
  숨을 안 쉬는데 성공해서 죽었다는 사람 얘기는 있어도 굶어죽는 데 성공해서 죽었다는 사람은 없다. 생존욕구란 때로 다른 고통을 모두 상회하는 힘을 내는 법. 사나흘 생으로 굶은 사람 앞에 먹을 것이 놓여 있다면 위장에 구멍이 뚫리거나 말거나 일단 집어먹고 보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음식에 손이 닿는 한 굶주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먹을 게 근처에 없다면 찾아 먹으러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쳇. 낮잠 자다 못 먹었을 때는 챙겨 주기도 하더니.”

  혼자 있게 해 달라고 큰소리 탕탕 치고 사람들을 쫓아 버렸음에도 시간이 지나자 어김없이 배는 고파왔다. 온몸으로 시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훈련도 내팽개친 처지에 식당에서 뻔뻔하게 밥 달라며 기웃거리기가 뭐해서, 사람이 없을 때 몰래 챙겨와 방에서 먹을까 하는 궁리도 해 보았지만 이런저런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전투함의 식당에서 아무도 안 마주친다는 건 불가능할 듯 했다. 최소한 배식 담당 정도는 상대해야 할 터.
  그래도 한두 끼니는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하지만 물도 안마시며 하루를 넘게 버티고 있자니 멀쩡한 위장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뱃속에서 하도 시위를 해대는 통에 잠이 제대로 안 올 지경이었다. 예전의 기억을 살려 행여 누군가 식사를 슬쩍 내려놓고 가지 않았을까 싶어 몰래 방문을 열어봤지만 혹시나 해보아도 역시나. 결국 그는 가능한 거주 구역에 사람이 거의 없는 훈련 시간을 틈타서 슬쩍 방 밖으로 나온 것이다.

  “게으름 피우는 자는 먹지도 말라 이건가...분명 크와트로 대위야. 약았다니까.”

  그나마 식당까지 가지 않아도 휴게실에 이런저런 자판기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랄까.
  연방군이 아닌 민간조직 에우고 소속이라 그런지 몰라도 아가마의 휴게실 비품은 꽤나 화려한 구석이 있었다. 군용의 맛없는 가루 주스 대신 사제 오렌지 주스가 비치되어 있었고, 상표도 알 수 없는 닭다리 모양의 흐물흐물한 고형물 대신 진짜 치킨과 햄버거가 덥혀져서 나왔다. 비록 신선한 야채나 과일은 없다지만 부모님이 근무했던 공장시설의 어설픈 먹거리들을 기억하고 있는 그로서는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었다.
  기왕 나온 김에 잔뜩 챙겨가기만 하면 며칠은 더 식당에 안 가고도 버틸 수 있어. 치사하게 밥을 안 주는 걸로 사람을 꾀어내려 들다니. 끽소리 못할 때까지 단단히 틀어박혀 있을 테다.
  그러나 정치인 스타일의 가짜 단식을 꿈꾸며 의기양양하게 휴게실에 들어가려던 그의 시도는 안쪽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 차단당했다. 훈련 중인 전함 휴게실에 사람이? 설마 누군가 내가 나올 걸 짐작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바짝 오그라드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재빨리 개폐 스위치 쪽으로 뻗으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무중력 공간에서 허둥지둥 손을 끌어당긴다는 건 되레 몸에 급격한 반동을 주는 격이 된다. 결과적으로 끌어당긴 손 대신에 그의 몸이 스위치를 향해 돌진하고 말았다.

  “흡...!”

  작금의 사태를 잊어보고자 눈을 감아보아도 헛수고.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방향을 돌려보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결국 휴게실 문은 징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그는 차마 안에 누가 있는지 바라볼 생각도 못 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문 앞의 손잡이를 꼭 잡고 신발을 바닥에 고정시켰다.
  이제 이걸 어쩐다냐. 뭐 근사하게 변명하는 방법 없을까. 차라리 몸살이 나서 나왔다고 해 버려?
  신속하게 움직인다고 신발에 고정띠를 안 붙여 둔 게 지금처럼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진작에 항구에서 실수할 때부터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어라, 카미유군인가?”
  “블랙스...준장님?”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은 상당히 의외의 인물이었다.
  에우고의 수장이라지만 일단은 군인인지라, 훈련시간에 블랙스 포라 준장이 브리지에서 이탈하는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안전을 위해서나 최종 결정을 위해서나 준장은 항상 최전선의 함교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무게감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무거운 것이 뒤에 있으면 물체는 절대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니 한 집단의 우두머리는 항상 최전선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함께 지낸 지 그리 오래지 않은 카미유도 그 얘기만큼은 귀에 박힐 정도로 들었다.
  그런데 지금 중후하고 절도있는 에우고의 수장이 군의 훈련시간에 휴게실에 혼자 틀어박혀 하고 있는 일이란 게...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런, 먹을 걸 앞에 두고 나눠먹지도 않다니 내가 실례했군. 여기 앉게.”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뭘. 이건 비어드 프로스티 특제 호박 케이크라네. 사이드 4에서 특별히 조달해 온 거지. 접시도 여분으로 하나 더 있으니까...자, 여기 포크.”
  “아니, 저....”
  “음료수는 우롱차면 되지?”
  “네.”

  알겠습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토를 다는 게 무의미해 보일 정도로 당당한 태도에 카미유는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준장의 말에 따라 테이블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따라오는 호박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안에 넣고 씹었다. 치즈와 시럽을 듬뿍 넣어 진득하게 만든 호박 케이크는 무중력 아래서도 부스러지지 않고 입 안으로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어라.”
  “맛있지?”
  “네.”

  원래 단 음식도 호박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 카미유였지만, 그 케이크는 꽤 맛이 있었다. 많이 달지도 않은데다 너무 퍽퍽하지도 않았다. 배가 고픈 나머지 뭐든지 맛있게 느껴질 때라는 상황을 참작해도 제법 잘 만든 것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앞에 놓인 케이크와 차를 허겁지겁 먹느라 말을 하는 것도 잊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케이크 세 쪽을 해치우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린 카미유는 눈앞에서 준장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약간 당황했다.

  “저, 준장님.”
  “아아 이런, 미안하네. 다른 생각을 조금 하느라. 다 먹었나? 더 줄까?”
  “아뇨. 잘 먹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어서 놀랐겠지.”

  카미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것은 훈련 시간에 무중력 지대인 휴게실에서 천연덕스럽게 케이크를 즐기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케이크 한 판을 간식으로 다 먹는다는 건 아무리 단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치 좀도둑이 몰래 숨어들 듯이 혼자서 테이블에 앉아, 케이크 한 판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건 블랙스 준장에게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었다. 준장에게는 있는 놈이 베풀어야 살만한 세상이 된다는 농담을 곁들여가며 함교의 모두와 케이크를 돌려 먹는 풍경이 더 어울렸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물어보고 싶어서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배고픔이 물러난 자리에 고양이를 수십 마리는 죽일 만한 호기심이 들어앉아 출렁거렸다.
  그런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던지, 준장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린노어 2에도 언더 계열 출판물이 들어온다고 했던가.”
  “네? 아, 네.”
  “이 케이크는 무중력에서도 따로 팩 없이 먹을 수 있게 제작된 거라네. 사이드 4의 호박파이 이야기를 알고 있나? 그 쪽 출판물에 우주이민 초기사로 두어 번 실린 적이 있는데.”
  “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콜로니 건설로 전 지구권이 떠들썩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건설이 많아지게 되면 당연히 사람이 많이 필요하게 마련이고, 사람이 갑자기 많아지다 보면 관리 감독이 소홀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감독이 소홀해졌음에도 콜로니를 짓는 작업은 한동안 큰 탈 없이 계속 진척이 되었다. 건설 중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이 점차 늘어났지만 다들 당사자의 안전 책임이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콜로니 건설 공사에서도 최소한의 배상금 이외에는 지급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사건이 일어났다.
  연방군 소속의 장비 점검반이 건설 현장으로 들어가 설비를 검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건설 중의 콜로니가 의례 그렇듯이 그곳 또한 미로 같은 길 투성이였고, 가지고 갔던 전자 나침반이 갑작스러운 태양풍 과다로 고장나자 그들 열두 명은 금새 길을 잃었다.
  만일 요즘처럼 건설 중의 정기적인 순찰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했더라면 그들은 사흘 안에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부 위험지대에만 순찰 지역이 국한되고 있었고, 그들이 거기까지 이동하기는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우연히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공기 충전이 잠시나마 가능한 폐쇄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속절없이 차례차례 죽어가던 어느 날, 물자로 들어온 호박파이 한 다스를 발견해서 그걸 나눠먹었다 한다. 결국 그들이 구조된 것은 없어진 호박파이를 회수하러 온 업체의 수송선에 의해서였다.
  이후로 관리 감독이 소홀했던 콜로니 건설공사는 건설시 안전수칙을 좀 더 강화했고, 결국 호박파이는 그 콜로니의 명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섯 명만 살아남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잘 알고 있군. 하지만 사실은 호박파이가 아니라 호박 케이크였던 거야. 사이드 4의 3반치에 가면 제대로 된 호박 케이크를 먹을 수 있지. 바로 이거라네.”
  “잘 알고 계시네요.”
  “그 콜로니가 내 고향이니까. 어렸을 때 나는 이 호박 케이크를 아주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이걸 죽어라 싫어하셨어. 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안에서는 이걸 절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네.”
  “어라, 왜요?”
  “당신이 구조되기 전에 너무 많이 드셔서, 질려버린 거라고 항상 말씀하셨지.”
  “준장님 아버님이 그 다섯 사람 중 한 분이셨습니까?”
  “그래. 아버지는 결국 그 일 이후 전역하셨네. 하지만 나는 왜 아버지가 생명줄이었던 그 케이크를 싫어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그래서 언제나 그 때가 되면 반액 세일하는 케이크를 판으로 사서 한 조각씩 숨겨두고 먹곤 했지.”

  준장의 눈길이 카미유의 얼굴을 지나쳐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위로 깊이 들어앉은 초록색 눈이 짙은 색으로 일렁였다. 아마도 어린 시절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카미유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을 길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어두운 방에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허겁지겁 케이크를 밀어 넣고 있는 소년을 상상했다.
  어린애는 어른들이 맛있는 것을 먹지 말라고 해서 화가 났다.
  그래서 혼자 사서 숨겨두고 혼자 먹었다.
  어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고는 그 일을 잊었다.
  어린애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응?”
  “왜 지금도 그러시는 겁니까?”

  블랙스 준장은 카미유의 느닷없는 질문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다가 아까의 묘한 미소를 다시 얼굴에 그렸다.

  “요즘 청년들에게는 정말로 깜짝 놀랄 때가 많아. 내가 늙은 탓인가.”
  “아, 저는....”
  “신경쓸 것 없어. 나머지 얘기를 해 줄 테니. 내가 아버지로부터 그 시절의 진짜 얘기를 들은 건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일이었지.”

  인적 없는 곳에 갇힌 열 두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구조대가 나타날 거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혼자 있었다면 금새 미쳤을 거라고, 모두가 함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돌아가면 지금의 우정을 절대 저버리지 말자며 약속도 하고 농담도 했다.
  그러나 희망을 갖고 소변과 땀을 정수해서 마셔가며 버틴지 이 주가 넘어가자, 그들은 조금씩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기다릴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더 조금씩 먹고 마셔야 했다. 공기도 점점 더 탁해지고 있었다.
  서로는 서로의 생존에 점점 더 짐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모두 죽던가 아니면 누군가 죽던가, 둘 중에 선택을 해야만 할 시기가 왔을 때 우연히 케이크가 든 상자를 얻게 된 거라네.”

  그러자 그들은 우연히 발견한 호박 케이크를 걸고 목숨을 건 내기를 했다.
  케이크 속에 무작위로 심지를 꽂고 다시 포장을 해서 몇 바퀴 돌린 다음 한 조각씩 갈라 먹는다.
  심지가 나온 사람은 자신의 물과 공기가 든 봄베를 자의든 타의든 내놓아야만 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조각에 심지가 들지 않았기를 기원하며 케이크를 먹었다. 당장을 살아가기 위해, 동료와 친구의 케이크 안에 죽음을 말하는 심지가 들어있기를 빌었다.
  개중에는 조용히 제 손으로 봄베를 내어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제발 살려달라며 무릎을 꿇고 비는 사람도 있었고, 기왕 죽을 바에는 남들 좋은 일을 시킬 수 없다며 도망치려고 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결국에는 생존에 미친 악착같은 손들에 붙들려 봄베를 빼앗기고야 말았다.
  그러기를 일곱 번. 간신히 구조된 사람들은 결국 각자 제대를 하고 뿔뿔이 흩어진 뒤 단 한 번도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인터뷰를 할 동안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도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더군. 불문에 붙여진 거지. 그래서 사람들이 영웅적인 생존이라고 칭찬하며 그 케이크를 특산물로 만들어낼 동안, 당신들이 느꼈을 고통도 함께 묻혔다네.”
  “그건, 살인이 아닙니까?”
  “카르네아데스의 배를 아나?”
  “바다에서 조난당했을 때, 내 판자로 다가오는 다른 사람을 밀어버린다는 얘기 말입니까?”
  “그렇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는 때라면, 살인도 죄가 아니라는 의미라네. 만일 그 문제가 이슈화되었더라도, 그분들은 죄가 없는 거야.”
  “하지만....”
  “그리고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 일을 내내 괴로워 하셨지.”

  남은 모두는 누군가의 봄베를 공평하게 가른 뒤 다음 번 케이크를 자를 때가 올 때까지, 장막 같은 침묵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동료를 죽여가며 살아야 하는 스스로를 혐오하였다.
  지금 살아서 뭐 해? 다음번에는 내가 죽을지도 모르잖아.
  그렇지만 후회와 두려움에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단 한 마디만이 울려퍼진다.
  그래도 나는 살고 싶어.

  “그래서 아버지의 기일이 되면 가능한 이렇게 하고 있다네. 그러니까, 카미유군.”
  “네?”
  “자네는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게나.”

  마치 할아버지에게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느긋하던 카미유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괴로워하실 필요가 없었어. 당신 잘못이 아니었지. 워낙에 세심한 분이었으니까 가슴이 아팠겠지만, 그런대로 훌훌 털고 일어나셨더라면 더 좋았을 거야.”

  어린애는 자라고 나서 어른들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과하고 싶었지만 이미 때가 늦어서, 어린애는 도리어 화가 났다.
  솔직하게 말해주었더라면 사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잊지 않기 위해 혼자서 그날을 기념한다.
  다른 어린애에게는 이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라이라 대위의 일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겠지. 하지만 자네는 잘못한 게 아냐. 물론 괴롭겠지만....”
  “...저, 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생각해 보게.”

  블랙스 준장은 서둘러 일어나는 그를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고 순순히 놓아 주었다. 카미유가 우물쭈물 자판기로 다가가 몇 가지 음식과 음료수를 뽑아드는 것도 못 본 척했다.

  “어쨌든 나를 여기서 본 것은 비밀로 해주게.”
  “네.”

  휴게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카미유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케이크 판에서 다시 새 조각을 뜨는 준장의 모습이었다.
  크와트로 대위는 카미유의 단식이 이틀을 넘어 사흘째에 이르자 상황이 조금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에마 중위나 레코아 소위가 뭔가 먹을 것을 갖다 두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무렵, 의외로 선선히 카미유가 먼저 식당에 모습을 나타낸 것을 보고 조금 놀라움을 느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예닐곱 끼니를 고민하며 굶었을 소년 치고는 얼굴빛이 상한 기색도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던 블랙스 준장이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는 것은 보았지만 영문을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유야 어떻든 잘 된 일이지 않나. 오늘은 뭘 좀 먹고 쉬게 하고, 내일부터는 훈련에 편입을 시켜보세.”
  “수정이 필요하지는 않겠습니까?”
  “아직 어린애야. 겨우 머리가 식었을 테니 이번은 넘어가지.”
  “알겠습니다.”

  크와트로 대위는 식사 2인분을 급하게 먹어치우고도 자신들보다 빨리 일어난 카미유가, 뚱한 얼굴이나마 블랙스 준장을 향해 작게 목례를 하고 지나가는 것을 보며 뭔가 둘 사이에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바쁜 스케줄에 쫓긴 나머지 그는 결국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일을 잊었다.

2009/02/10 15:59 2009/02/1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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