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from Fanfic/Gundam 2009/02/10 15:58
  어느덧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어찌나 고민이 되었던지 미간이 몇 겹으로 접힌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눈 아래로 퀭하니 그늘이 졌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과연 내가 선택한 것이 정답일까? 신경질을 부리며 몇 번이나 턱을 문질러 보아도 그에게 답을 몰래 보여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래서 삶이란 결국 홀로 사는 것이라 했던가. 그는 급기야 헤어나올 길 없는 고뇌의 늪에 빠진 채 소용없는 발버둥을 치기 시작하였다.

  “이봐, 도대체 몇 시간이나 그러고 있는 거야? 좀 비켜 줘.”
  “아직입니다. 좀 기다리세요.”
  “이 녀석아! 도면 보게 모니터에서 비켜달라고 한 지가 언젠데!”

  뒤에서 아스토나지가 퍽 하고 그의 뒷머리를 갈겼다.
  아니 이 인간이 또! 안 그래도 난국인 이 상황에 성질까지 돋워야 되나. 카미유는 발끈해서는 뒤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 때리지 말라니까요!”
  “내가 한심해서 그런다, 한심해서! 이놈아, 온라인으로 엘레카 도감 하나 주문하는 데 뭐 그렇게 시간이 걸려?”
  “웃...꼭 이걸 써야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는 있는 거야? 당연히 남은 게 없으니까 여기로 온 거지. 정비 다 말아먹을래!”

  그러나 표독스럽게 소리를 질러 봐도 죄를 지은 것이 이쪽임에랴. 그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슬슬 문지르며 위자에서 일어났다.

  “열어둔 화면 닫지 마요.”
  “알았다, 알았어. 고이 접어 도구메뉴 아래 두마.”

  더 버티지 않고 자리를 내준 게 기특했던지, 정비반장은 화를 금새 풀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도면 관리 프로그램을 띄우고, 설비번호를 찾아서 스펙 확인, 재고 확인, 명령서 발급. 그리고 다시 반복. 이 한 가지 프로그램에만 특화된 그의 손놀림에는 뭔가 신들린 구석이 있었다. 자판 치는 속도라면 나름대로 꽤 빠르다고 자부하는 카미유가 보기에도 눈부신 속도였다.

  “바쁩니까?”
  “아아. 그렇기도 하지만, 문제는 기체별로 남는 부품이 몇 개 없다는 거야. 지금 같은 형국에 부품이 있다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기는 하다마는.”
  “그렇군요.”
  “멜라니가 과연 다음 부품을 제때 보내 줄지...액시즈 쪽으로 물량을 돌리는 거나 아닐까 모르겠다.”
  “....”

  아스토나지의 한탄에 카미유는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워 그냥 침묵했다.
  그들이 사이드 2의 21반치를 지나 항해해 온 지도 벌써 열흘째. 열흘 내내 함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떠오를 줄을 몰랐다. 티탄즈가 콜로니에 독가스를 주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에우고의 참모로 오래 활약해 온 레코아 론도가 적 편으로 돌아섰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편이었던 사람이 적으로 돌아섰다는 단순한 심리적인 패배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레코아가 비록 에우고의 핵심 멤버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최측근의 비서로 오래 활약해 온 몸이었다. 당연히 최고급의 기밀 사항에 대한 정보 또한 알고 있게 마련인 것이다.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혹시 에우고 명단 전체를 그녀가 티탄즈에 바친 것이 아니냐는 현실성 없는 얘기까지도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브라이트 함장이 그 얘기를 듣고는 기가 막혀 하기는 했다지만, 아무튼 사람들의 동요가 심각하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제 3의 세력으로 등장한 액시즈가 급부상하는 가운데, 아나하임 일렉트로닉스의 원조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는 에우고에게 패배는 곧 물량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더더욱 상황이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나름대로 명절이라고 하는 데도, 과자나 케이크의 특별 배급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면 짐작이 될까.

  “아참, 오늘 저녁에 크리스마스 쿠키 준다더라.”
  “어, 정말요?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그냥 평상시대로 지급하라는 지시라는데. 요리장이 반죽하느라 애먹고 있는 거 볼만하더라.”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괜찮아. 그런 계기라도 없으면 기운이 안 나잖아. 함장님이 잘 하시는 거다.”
  “뭐, 좋겠죠.”

  카미유는 심드렁하니 대꾸하고는 다시 아스토나지의 손놀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함장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상황이 급해졌다고 섣불리 근검절약을 시작한다는 건 사기에 지장을 준다. 그렇다고 사기진작을 위해 지나치게 풀어놓으면 오히려 정말로 상황이 안 좋았던 거구나 하는 쓸데없는 자각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정답은? 언제나 그랬듯이, 중심을 잡을 것.
  브라이트 함장은 기울어진 저울추를 맞추기 위해 급하게 반대쪽을 내리누르는 성마른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가 갖고 있는 최고의 함장이라는 명성은 그런 태도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카미유는 생각했다.

  “어라, 과자 좋아하잖아? 어째 반응이 신통찮다?”
  “다른 일로 고민중이라서요.”
  “...설마 세 시간 20분째 고민하고 있던 그놈의 엘레카 도감이냐?”
  “네.”
  “확 아무거나 질러라 좀. 아니면 둘 다 주문하던가.”
  “그 정도로 엘레카를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는 갖고 싶고....”
  “거 참, 고뇌하는 청춘이구만. 좋아하는 게 아니면 사지도 말던가.”

  아스토나지는 별로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는 카미유의 대답에 잠시 벙 찐 표정을 짓다가, 키보드를 몇 번 더 두드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나는 갈 테니까 이제 맘껏 고민하라구.”
  “다 끝났습니까?”
  “그래, 한 두어 시간 정도는 기름에 절어야 할 것 같다. 결정 잘 해라.”
  “네. 있다가 도와드리러 가겠습니다.”
  “좋을 대로.”

  아스토나지가 나간 뒤, 카미유는 다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을 띄우고 고민을 계속했다. 정비반장과의 대화로 잠시 맑아졌던 머리가 다시 아까의 까마득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아까보다 상태가 오히려 더 나빠졌다. 둘 중 하나의 분기에서 느닷없이 선택의 여지가 두 개나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둘 다 살까...아니면 아예 사지 말아버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고민스럽다니.
  처음에는 간단한 카탈로그를 주문해 볼 생각이었다. 저렴한 2인용의 엘레카는 수요가 많지 않은 만큼 차종도 적어서, 그리 화려하지 않은 책 한 권을 사기만 하면 만사 해결이었다. 그런데, 기왕에 2인용을 살 거라면 스포츠카의 도감을 살까 하는 생각을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스포츠형을 찾은 이후에는 4인승 세단, 세단 이후로는 SUV 도감에까지 손을 뻗쳐서 지금은 처음에 사려고 했던 것과는 영 동떨어진 비싸고 두툼한 책 두 권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런 걸 ‘기왕에’병이라고 하던가.”

  엘레카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게 뭐하자는 짓인지. 도감을 산다고 차를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를 사들인다고 해서 사라지는 일도 아닌데.

  “...후우.”

  카미유는 한쪽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열흘 전에, 그는 행방불명이라고 생각했던 동료를 만났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제는 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흘 전에, 그는 수십만의 사람이 한순간에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살아있는 지옥이란 어떤 것인지를 두 눈으로 보았다.
  열흘 전에, 그는 동생이라며 스스럼없이 다가왔던 여성이 실은 기억을 조작당한 강화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함장은 변함없는 진중함으로 그를 배려하고 있었다. 성격 나쁘기로 유명한 아스토나지도 시시껄렁한 농담을 지껄여 가며 며칠씩이나 그를 일에서 빼 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자극하지 말자고 약속이라도 한 듯, 온라인 쇼핑에나 열중하고 있는 그를 수정하기는커녕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세 가지 사실 중에서 내 마음을 쥐어뜯고 간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젠장.”

  그는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엄지손가락을 다시 한번 입에 집어넣으며 되는 대로 내뱉었다.
  무엇보다 답답한 일은 그 사람이 적이 되었는데도 나는 이 편이 옳다고 여긴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상하는 일은 열흘이 지나자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가슴아픈 일은 그녀가 나를 공격해온다면 내가 그녀를 서슴없이 죽일 거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엘레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무엇이든 타고 몰 수 있는 물건이라면 일단 호감을 가지고 보았다. 호모아비스도, 우주선도, MS도 잔뜩 사진첩이며 도감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 엘레카 도감을 추가로 채우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기왕이면 기왕이면 하고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것은 정말로 욕심이 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너무나 빨리 정상을 회복해 버리는 스스로가, 카미유는 불만이었다.
  수십만의 사람이 표표히 죽어갔어도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마음은 버릴 수가 없다.
  눈도 채 감지 못한 서러운 영혼이 우주를 가득 메워도, 나만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이것은 오만일까, 당연한 생존본능일까.
  모두 다 떠나버리고 나만 남아도, 모두 다 죽어버리고 나만 살아도, 나는 이렇게 변함없이 떼쓰고 욕심부리며 살아있을 거라는 사실이 소년은 못내 아쉬운 것이었다.

  “어이, 다 정했어?”
  “우, 우와! 아스토나지 씨! 놀랐잖아요.”

  카미유는 문을 확 열고 들어오는 아스토나지를 보고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다.

  “뭘 그렇게 놀라? 오호라, 울고 있기라도 했던 거야?”
  “그럴 리가! 두어 시간은 바쁘다면서요?”
  “사람이 모자라서 말이지. 나와서 좀 도와주지 그래?”
  “뭡니까, 명절부터 부려먹기나 하고.”
  “명절이니까 지금까지 봐 준 거지, 안 그랬으면 얄짤없다 이놈아.”

  아스토나지는 말을 마치고 싱긋 웃었다.

  “기왕에 살아 있으면 열심히 해야지, 안 그래?”
  “...우와.”
  “왜?”
  “악덕업주 대사같네요.”
  “이 녀석이! 30분 내로 정리하고 안 나오면 알아서 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스토나지가 씩씩대며 문을 쾅 닫고 나가자, 카미유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열심히 하세요, 당신.

  “역시, 두꺼운 게 더 좋겠지.”

  어차피 떠난 이를 따라 함께 갈 수 없다면, 남은 선택이 욕심이건 본능이건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형국은 불투명하고 마음은 상처투성이어도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는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스스로를 지키려는 이 작은 몸부림이, 부디 삶을 욕되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 뿐.
  카미유는 네 시간 가까이 고민하던 화면에서 간단하게 한 권을 골랐다.
  그리고 단호히, 그렇지만 뻔뻔스럽지 않게 구매확인 버튼을 눌러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카미유 비단.”

  살아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하여.

2009/02/10 15:58 2009/02/10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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